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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12)화 (112/141)

112화

테시우스의 말을 듣고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든, 그는 저를 결코 사랑하지 않을 것이란걸.

하지만 두 사람이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둘이 함께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데,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뒤틀리다 못해 내장이 썩어 문드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둘 다 죽여 버리는 거야.

그럼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해질 테니까.

‘……아니야. 둘 다 한날한시에 편안히 눈 감게 해 주고 싶진 않아.’

다시 생각해 보니 저들에겐 고통 없는 죽음도 아까웠다.

나야말로 죽을 것 같은데 그 아릿한 가슴의 통증을 저만 느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누구 한 사람은 살려 두어야 했다.

물론 다른 한 명도 쉽게 죽이긴 싫으니 그럼 주술을 걸어야 하는데, 내가 아는 것 중에…….

‘최대한 끔찍한 것으로.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 만드는 것으로.’

……그래, 그게 좋겠어.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그랬다간 나도…….’

영원히 그를 가질 수 없다면 내가 살아갈 의미도 없어.

평생을 그렇게 생각해 왔고, 오직 그것 하나만 바라왔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그냥 다 죽이자.’

비단 저 둘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가 갖지 못한 그들의 행복까지도.

‘전부 다 죽여서 없애 버리는 거야.’

모조리 앗아가는 거야.

깔끔하게, 청소해 버리는 거야.

그 모든 광경을 목도할 단 한 사람만 빼고.

마침내 세레나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기사들은 착실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뿜어내는 기운이 심상찮아 바짝 긴장한 채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세레나가 저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아드넬이 그랬겠죠. 마녀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고, 치료에 훨씬 가까운 존재라고.”

테시우스 또한 긴장한 채로 지켜보던 중이었으나 이어진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실제로 나를 치료해 줬으니까.”

“하지만 태양과 달처럼, 빛과 어둠처럼, 모든 것엔 상반되는 것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죠.”

세레나는 테시우스를 향해 눈물 젖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치료도 물론 가능하지만 역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소리랍니다.”

“그게 무슨……. 큭!”

그러나 테시우스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일순 세레나의 전신에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그를 강하게 밀쳐낸 탓이었다.

침실은 순식간에 시커먼 암흑으로 뒤덮였고 뱀의 혓바닥처럼 넘실대는 힘이 모든 것을 휘감았다.

사랑스럽던 분홍빛 머리칼은 물이 빠지는 것처럼 잿빛으로 물들어가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광기와 살의, 집착과 증오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였으며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에선 피 내음이 느껴졌다.

어둠에 휘감긴 세레나는 그들이 알고 있던 마녀, 그 자체였다.

[전부 다, 죽일 거야.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야.]

끽끽거리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탁한 공기에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아드넬!’

테시우스는 본능적으로 아드넬이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틀며 팔을 뻗었다.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오직 저뿐이었다.

[어딜!]

그러나 쇳소리처럼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강한 힘이 그를 옭아매었다.

깔깔대는 비릿한 웃음소리가 뒤따라오며 테시우스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먼지로 자욱한 공기를 들이마신 듯 쉬이 숨을 쉴 수도 없었고, 어두운 기운은 그들 내면에 깊이 잠재된 악몽을 깨우고 있었다.

전신이 덜덜 떨리며 피부가 아릿하게 욱신거렸다.

모두가 고통 어린 신음성을 내뱉는 중에, 세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갖지 못한다면 이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어…….]

절박하리만큼 간절한 음성과 함께 세레나의 뺨을 타고 마지막 눈물이 흘러내렸다.

툭, 하고 검게 물든 물방울이 땅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 * *

떠나려 했다.

하지만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오랜 시간을 함께해오며 숨 쉬듯 당연하게 해 온, 그녀를 지키는 일.

제이든은 누군가 아드넬을 해치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이후로 사라진 행세를 하며 줄곧 근처에 머물렀다.

언제 누가 나타나 그녀에게 해를 끼칠지 모르니까.

하지만 아드넬은 출입이 금지된 후원에 몰래 들어갔고, 수풀을 헤치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들어갔다.

뒤따라간 그곳에서 제이든은 독특한 모양새의 건축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드넬은 그 안에서, 짐승과 함께 있었다.

‘어떻게 이 황성에 흑표범이……!’

처음엔 보고도 믿기지 않아 당장 아드넬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드넬은 흑표범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정말이지 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제이든은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지켜보았고 머지않아 그 흑표범이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곁에 저렇게 큰 짐승이 붙어 있으니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해치지 못할 터였다.

더구나 그 짐승은 아드넬과 무척 친근해 보였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긴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언제고 지켜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제이든은 이후로 별궁을 몰래 빠져나와 밖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문들의 행적을 밟기 시작했다.

때마침 수면 밖으로 드러난 수상쩍은 움직임들이 혹 그녀와 관련이 있진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어찌나 철두철미한지 맨 처음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은 자들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면 모두 죽어 땅속에 묻힌 채였다.

별 소득 없이 돌아와야만 했으나 그나마 다행인 건 아드넬이 아직 그 이상한 거처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냥 대회 당일, 잡부로 위장해 들어간 제이든은 아드넬이 함께 지내던 흑표범의 등장을 목격했다.

그리고 아드넬이 그 짐승을 뒤따라 사냥터에 들어가는 것도 보고 말았다.

‘아드넬, 안 돼……!’

끽해야 사슴들이나 뛰어노는 사냥터라 한들 뒷발에 채거나 길게 자란 뿔에 찔리면 어지간한 장정도 큰 부상을 입기 마련이다.

다만 황태자의 명으로 기사들까지 우르르 몰려 들어간 터라 그는 눈에 띄지 않게 빙 돌아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따라갔음에도 아드넬은 찾을 수 없었다.

대낮에 낀 안개는 음습하여 시야를 방해했으며, 청각에 의지를 해 보려 해도 들려오는 목소리랄 만한 게 전혀 없었다.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사냥터에서 그가 찾은 것이라곤 아드넬이 아닌 괴물이었다.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돌아가야 해.’

제이든은 아드넬이 순간이동 마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필립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드넬이 예전에 두 사람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마도구를 사용하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만 지금은 별궁에 끌려온 상황이라 목적지를 카르카스의 집이 아닌, 이곳 별궁 자신의 침실로 새로이 설정했다고 했다.

강제로 갇힌 마당에 허락 없이 별궁을 벗어났다간 도주했다는 죄를 뒤집어쓸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쨌든 사냥터에 들어간 아드넬이 저가 본 것과 같은 괴물을 발견했다면 분명 그 마도구를 사용해 도망쳤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제이든은 곧장 별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시간 차이로 아드넬보다 먼저 그녀의 침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는 암살자를 목격한 그날처럼 두꺼운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만큼 언제 무슨 위험이 찾아올지 모르니 급박한 일이 생기면 그때 나타날 생각으로.

그러나 아드넬은 머지않아 척 보기에도 아주 심각한 상처를 입고 돌아왔고, 그 모습에 숨이 턱 막혀 저도 모르게 뛰쳐나갈 뻔했으나 하필 황태자와 함께 있었다.

그와 함께 있던 탓에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무의식중에 간간히 새어 나오는 신음을 듣노라면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숨어서 있을 것이 아니라 당당히 나가서 손을 잡아 주고 간호해 주면 좋으련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원래는 사람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조용히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궁의들이 돌아가고선 모나가 곁을 지켰고, 이후론 테시우스와 교대했다.

제이든은 잠자코 그의 흐느낌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드넬, 제발……. 네가 없으면 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2황자는 저만큼이나 진심으로 아드넬을 사랑하는 듯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를 사랑하는 아드넬 또한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몸을 숨기고 기척을 감추고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는 시간은 당연하지만 무척 힘들었다.

2황자가 자리를 비우거나 혹은 깜박 잠에 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끝내 불청객은 찾아왔고, 악바리를 쓰며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네 것이었던 적이 없다.’

‘아니, 아니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어질 운명이었어!’

‘내 운명은 오직 아드넬이다.’

‘아니라니까!!’

머지않아 방 안은 어두운 기운으로 잠식되었고, 기사들은 힘을 쓰지도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제이든뿐이었다.

아마도 세레나가 인지하지 못한 유일한 존재라서 가능한 듯싶었다.

[내가 갖지 못한다면 이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어…….]

낮은 중얼거림이 들린 순간, 제이든은 본능적으로 저가 나타날 때가 지금임을 알 수 있었다.

“아드넬……!”

제이든은 온몸을 던져 아드넬의 전신을 꽁꽁 감싸 안았다.

그 찰나와도 같은 시간에 고개를 뒤로 꺾은 채 바르르 떨던 세레나의 전신에서 아까보다 훨씬 짙고 사악한 힘이 뻗어 나왔다.

훙 하는 바람이 일 정도로 강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람들을 뒤덮었고, 제이든은 몰아치는 끔찍한 고통에도 아드넬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테시우스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힘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다시금 눈을 떴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짧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밤도, 세레나의 발악도.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악몽이 아침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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