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무감정하기까지 한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째서일까.
여태 해 온 모든 일들과 과거가 허무하게만 느껴지면서 죽기 직전에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차르륵 넘어갔다.
‘후작을 만나고서부터 지금까지…….’
아마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쯤, 길거리를 한창 방황할 때였을 것이다.
칙칙한 회색으로 물든 원피스 한 벌로 사계절을 버티고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던 나날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도 부모나 보호자라고 할 법한 사람은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바논 고아원장.’
세레나는 꽤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이렇다 할 특징은 없는 아이였다.
잿빛으로 물든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는 흔하디흔했고, 밖에서 잔뜩 고생한 탓에 손이고 얼굴이고 할 것 없이 상처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연유에선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무척이나 반색하며 보살펴줄 테니 따라오라 말했다.
당연하지만 세레나가 그를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인 삶에 처음으로 나타난 온기 어린 손길은 참으로 따듯했으니까.
세레나는 주저 없이 그의 손을 잡았고 그날 이후 이어진 나날들은 퍽 행복했다.
따듯한 물로 몸을 씻을 수 있었고, 흉터로 가득한 손등엔 약을 바를 수 있었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프와 부드러운 빵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세레나가 고아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이 찾아왔다.
후작이었다.
‘……다들 쉬쉬하지만, 저는 확실히 보았습니다. 제 어미랑 똑같이 생긴 어린 꼬마 아이가 도망치는걸!’
‘그 여자는 마녀였습니다. 부랑자들과 함께 지낸 덕에 들키지 않은 것 같은데, 꼬리가 길면 언제고 밟히기 마련이지요.’
‘당연히 죽었습니다. 정체가 밝혀졌는데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으니, 그 여자의 물건들도 시체와 함께 다 불태워 버렸고요. 딱 하나만 빼고 말입니다.’
‘바로 이 반지입니다. 특이하게도 마녀의 시체에 가까이 가져다 대니 반지에서 빛이 나더군요.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고 알았지요, 이 반지로 마녀의 피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마녀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데! 그런 악독한 것들을 곁에 둘 순 없는 노릇이라 이렇게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아, 글쎄 얼마 전에 길을 가다가 죽은 마녀와 똑 닮은 아이를 발견한 게 아닙니까!’
‘제가 끼고 있던 반지 또한 그날 이후 처음으로 빛났습니다. 저 아이는 마녀가 맞습니다!’
‘……실은 연금술사나 마법사에게 팔 생각으로……. 그들에게 이미 사라진 마녀는 신기한 연구 대상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무, 물론 후작님께서 명하신다면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가 처리할……!’
‘아!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 근데 이렇게나 많은 돈을요? 아……. 감사합니다, 후작님! 감사합니다!’
세레나는 그날따라 유독 잠이 오질 않았고, 주방에 물을 뜨러 가다가 우연히 그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바논 고아원장은 원체 목소리가 큰 사람이어서 잘 들렸지만 반대로 대화를 나누는 이의 음성은 거의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화를 듣고 온전히 이해하기에 당시의 세레나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녀는 어떤 남자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이 있는 곳에서 하루를 꼬박 달려야 도착하는 영지의 저택에 당도하게 되었다.
후작을 처음 마주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이 반지를 기억하니?’
‘아뇨……. 저는 처음 보는 건데…….’
‘……아무래도 빛이 나다 보니 한 번도 보여 주질 않았나 보군. 뭐,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아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가요……?’
‘너는 오래전 사라진 마녀의 핏줄이다. 그들은 전염병을 다루고 짐승을 부릴 줄 알며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후작은 그리 말하며 종이에 쓰인 술식을 보여 주었다.
세레나가 글을 배운 것은 훗날의 일이었으므로 금기에 대한 설명은 읽을 수 없었지만, 복잡하고 낯선 모양새의 술식은 처음 보는 것이었음에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그렇지! 자, 봐라. 처음 보는 것인데도 바로 이해하지 않았느냐.’
‘그, 그런데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예요? 누구에게요?’
‘알다시피 우리 제국에는 두 황자 전하가 계시지. 그리고 나는…….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2황자 전하의 외숙이 되는 사람, 리비엘 라이칸 후작이다.’
세레나는 그제야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 자인지 알 수 있었다.
2황자의 외숙씩이나 되는 이가 저를 데려오다니!
하지만 진짜 놀란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나는 너를 훗날 2황자 전하의 옆에 세울 것이다. 단순히 황자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황태자비, 그리고 시간이 흘러선 황후의 관을 머리 위에 씌울 것이야.’
그 말을 듣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세레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대답도 못 한 채 숨만 격하게 들이켰다.
그러나 말을 잇는 후작의 얼굴엔 단호함과 확신이 가득했다.
‘비록 신분은 미천하나 네가 가진 능력은 위세 높은 공작가 영애들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런 네가 아니라면 달리 누굴 옆에 세운단 말이냐?’
‘그, 그럼……. 짐승으로 바꾸는 건 왜…….’
‘……지금 2황자 전하께선 후계자 수업을 포기하셨다. 그 말인즉슨 차기 황태자로 유력한 사람이 1황자 바스토르라는 얘기지. 그러하면 자연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1황자가 아니겠느냐?’
‘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제 몸을 태워 빛내는 촛불처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격을 포기하고 1황자의 그림자가 되길 자처하다니,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나는 그게 못내 안타까웠다. 해서 2황자 전하께서 가질 수 있는 마땅한 자리를 드릴 것이야.’
그리 말하며 후작은 테시우스의 초상화를 보여 주었다.
짙은 흑발은 검은 융단처럼 은은하게 윤기가 흘렀고 황금처럼 빛나는 금안은 고귀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하나 모나지 않은 완벽한 이목구비는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왕자님 그 자체였고, 세레나의 부족한 어휘력으론 그저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외모였다.
그 초상화를 본 순간 세레나는 대번에 그를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나중에 나와 결혼할…….’
‘그렇지. 어떠냐, 용모도 그렇지만 능력 또한 출중하신 분이시다.’
가슴이 콩닥콩닥하며 설렘으로 박동했다.
오래된 흉터가 자잘하게 새겨진 두 뺨은 앳된 봄꽃처럼 수줍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후작은 씨익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모든 일엔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네 힘을 빌려 2황자 전하를 짐승으로 바꾸고, 그 죄를 바스토르에게 돌릴 생각이다. 그가 마녀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로 만들 계획이지. 물론 네 정체가 드러나는 일은 없을 거고. 넌 그저 내가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된다.’
황자와의 결혼, 그리고 황후의 관.
감히 넘볼 생각도 할 수 없는 그 고귀한 자리에 올라갈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만큼 세레나는 미련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상화 속 제 또래 남자아이는 정말이지 너무,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런 남자가 제 짝이 된다는데 어찌 마다할까.
세레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로부터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바얄란 자작가의 영애가 되었다.
물론 힘든 일도 많았다.
귀족들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예법들을 배워야 했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도 신경 써야 했다.
평생을 모르고 살았던 글공부는 물론이고 차를 내리는 법, 사교댄스, 각종 역사까지 공부할 것도 수두룩했다.
여기에 마녀의 힘을 사용하는 법도 배워야 했다.
후작은 한 달에 한 번씩 사람을 데려왔고, 세레나는 그에게 저가 본 술식대로 주술을 걸었다.
처음엔 번번이 실패했지만 시간이 흘러선 다섯 명 중 한두 명꼴로, 더 시간이 흘러선 두 명 중 한 명꼴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테시우스였다.
‘그분은 내 남자가 될 운명이니까. 그렇게 맺어지게끔 태어났으니까.’
영혼의 반쪽, 진실된 사랑.
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저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레나는 아무리 힘든 시간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마녀의 힘을 갈고 닦으며 치료 약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얼굴과 손의 흉터도 모조리 지웠다.
칙칙한 회색 머리칼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났을 때 세레나는 완벽한 귀족 영애가 되었고, 마침내 온전히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산티노로 가는 여행 행렬에 바스토르의 시녀로서 합류하게 되었다.
테시우스가 짐승으로 바뀌게 된 날이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제 거의 다 왔는데.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목걸이로 능력도 증폭했고, 마침내 후작이 알려 준 비기로 저주도 풀어 주었는데.
‘아드넬을 사랑하니까.’
‘무릎은 얼마든지 꿇을 수 있다. 개처럼 빌고 다리 사이를 기어가래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맹세는 안 돼, 그건 오로지 아드넬의 것이야.’
‘너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마음 한 조각 갖지 못할 것이다.’
저주를 풀어드리는 날에야말로 내 자리를 찾게 될 거라고, 늘 그렇게 생각해오며 손꼽아 기다렸다.
삶의 목적 또한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연모해 온 이가 내뱉는 음성은 한겨울 서릿바람처럼 싸늘하고 차가웠다.
저가 바랐던 말을 듣는 건 아드넬이었고, 아드넬이 들어야 하는 말을 들은 건 세레나 자신이었다.
‘왜 이렇게 돼 버린 거지?’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 저주를 풀어 주면 당연히 제게 빠져들 거라 믿었건만.
그녀가 착실히 준비하는 동안 이미 2황자는 아드넬이란 계집에게 온 마음을 다 내주었다.
‘당신의 사랑 하나만을 바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가 내뱉은 어떤 말에서도 세레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제 하나뿐인 운명은 다른 여인을 사랑한다며 짐승으로 바뀌는 저주마저 자기에게 걸라 하고 있었다.
“하……. 하하…….”
허탈한 웃음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가슴은 텅 빈 듯 공허하고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간 여러 가지 일을 해 왔지만 정작 그녀가 바란 건 테시우스 하나였다.
다른 것들이 성공을 향해 달려간들, 그의 마음 한 조각도 갖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냥 다, 죽여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