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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10)화 (110/141)

110화

저물어 가는 계절의 밤.

짙은 어둠은 고요했고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라곤 열기에 들뜬 숨소리뿐이었다.

테시우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드넬의 뜨거운 뺨 위로 손을 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널 이 별궁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아니면 델리움의 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만약 내가 널 만나지 못했더라면.’

너는 여전히 그 산속에서 지내다가 좋은 집을 구해 두 조수와 함께 살았겠지.

이런 일에 휘말릴 필요도 없이 평온하게, 위험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삶을, 네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그렇게.

‘모든 것이 내 탓이다.’

누군들 그렇게 살고 싶을까.

잘 지내던 아드넬을 강제로 데려오고, 별궁에 가둬 두고, 그 때문에 그녀는 원치 않던 황후와 공녀들을 위한 화장품까지 만들어 바쳐야 했다.

와중에도 마음은 왜 그리 착한지 별궁 사용인들을 시작으로 제국민을 위한 화장품까지 만들었지.

그리고 끝내 날 위해, 능력까지 개방했다.

‘너에게 무엇 하나 준 게 없는데…….’

너는 늘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

정작 돌려받은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참으로 끝없이.

그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누구보다 창피하고 또 미안했다.

‘그러니 반드시 눈을 떠야만 해. 네가 베풀어 준 것 그 이상으로 돌려받아야 해.’

귀하디귀한 사람, 땅을 비추는 태양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사람.

테시우스는 진심을 담아 아드넬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절대 널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죽음의 신과 싸워서라도 쉬이 보내 주지 않을 거라고.

필요하다면, 내 목숨과 맞바꾸어서라도 이 땅에 널 붙잡아 둘 거라고.

아드넬이 절대 원치 않을 말들은 테시우스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가 간절히 바라며 아드넬의 이마를 닦아 주기 위해 물수건을 적셨을 때였다.

통통.

‘유리?’

문을 두드리는 것과 다른,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시우스는 번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시 한번 통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커튼으로 가려진 테라스 쪽에서였다.

‘대체 왜, 이다지도…….’

테시우스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이렇게 큰 상처까지 입었는데 여기서 뭘 더 얼마나 하려고?

왜 아드넬을 가만두질 않는 거야?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착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분노로 물들어가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시야가 차츰 붉어지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반대로 머리는 찬물이라도 부은 양 차가워졌다.

테시우스는 들고 있던 물수건을 내려놓고 곧장 테라스 앞으로 향했다.

착 하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걷어졌다.

“……넌…….”

“전하…….”

테라스 앞에 선 인영을 발견한 순간 테시우스의 미간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 표정을 본 세레나는 금세 울상이 되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기가 막히는군.’

이렇게 대범하게 찾아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문을 통해서가 아닌, 2층 테라스를 통해서.

제 기척 하나 숨기지 못하는 여자가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을 리도 없었다.

테시우스는 잠깐 고개를 돌려 아드넬을 살핀 뒤 잠긴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왔다.

그리곤 세레나의 팔을 부러지도록 세게 움켜쥐었다.

“아얏……!”

“너, 대체 무슨 속셈이야.”

“아, 아파요. 우선 이것부터 놓아주시고…….”

“당장 말해!”

아드넬이 저렇게 되었는데 눈에 보이는 게 있을 리가, 테시우스가 으르렁대듯 말하자 세레나는 그런 그를 잠시 올려보는가 싶더니 곧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이 그의 뺨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어쩜, 전하께선 이리 화내시는 모습조차 아름다우신지…….”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냐?”

“미치다뇨, 저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걸요.”

테시우스가 팍하고 세레나의 손을 쳐냈음에도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미소가 무척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일단 들어가서…….”

“들어가?”

“밖은 춥잖아요. 여기서 긴 대화를 나누었다간 틀림없이 감기에 걸리고 말 거예요.”

태연하기 짝이 없는 말에 테시우스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성까지 놓은 건 아니라, 그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오만상을 쓰며 세레나를 퍽 밀쳐냈다.

세레나는 등 뒤의 테이블 덕에 넘어지진 않았으나 비틀거리며 떠밀리고 말았다.

“네까짓 게 감히 어딜 들어온다고 말하는 거냐.”

“그야 당연히 전하의 침실…….”

“네가? 대체 왜?”

“전 전하의 하나뿐인 운명이니까요.”

이제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당시엔 아드넬이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그냥 두고 왔다만.’

세레나가 저주를 풀어 준 건 사실이나 그녀에 대한 미심쩍은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드넬이 더 급해 뒤로 미뤘을 뿐이지, 언제고 심문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제 발로 찾아왔으니 차라리 잘됐군.’

테시우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세레나의 팔을 다시금 잡았다.

“따라와라.”

때마침 지금 아드넬의 침실 앞에는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대로 넘겨주어 지하 감옥에 가두면 되겠지, 그 생각으로 테시우스가 성큼 들어섰을 때였다.

“……뭐야, 저년은?”

“뭐?”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테시우스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선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드넬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구나, 전하의 침실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여태 저 계집을 간호하고 계셨던 건가요? 고귀하신 2황자 전하께서 직접?”

어느새 세레나의 얼굴은 얼음장보다 차갑고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얼핏 무감각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이 실로 낯설었다.

“……그래, 내가 간호했다.”

“왜요? 모나가 있는데?”

“아드넬을 사랑하니까.”

그러나 테시우스가 내뱉은 한 마디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표정하던 세레나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진 마수의 형상처럼 흉악하게 찌푸려졌다.

말 한마디에 확 바뀐 표정 변화가 너무도 극심해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아드넬을 사랑한다고 했다.”

“……하! 하하!”

세레나는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그 음성을 들은 기사들이 문밖에서 “전하, 괜찮으십니까?” 하고 문을 두드려 왔으나, 세레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내게 저것을 찾으신 거였어.”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세레나가 작게 중얼거리며 테시우스의 팔을 뿌리쳤다.

갑작스레 팔을 힘을 준 탓에 그만 놓치고 만 틈을 타 세레나가 목에 건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제가 했던 말씀, 기억하시나요?”

“뭐?”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저주를 거는 것과 반대로 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요.”

테시우스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레나가 저주를 푼 건 사실이지만, 그런 힘이 있으면 반대로 걸 수도 있겠지.

때문에 테시우스는 누구인지 모를 여자가 8년 전 주술을 걸었다는 얘기보다 세레나가 의심스러웠다.

신뢰가 하나도 없다고나 할까.

과연 그 생각대로, 세레나는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실제로 가능하답니다. 저는 그 두 가지 술식을 알고 있거든요.”

“……역시, 네가 내게 저주를 걸었군.”

“그건 정말 아니에요. 제가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세레나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아드넬, 저 못된 계집에겐 일말의 자비도 베풀고 싶지 않으니까. 전하께서 하시기 나름이에요.”

“……너, 설마……!”

“내 앞에 무릎 꿇고, 날 사랑하겠다고 맹세해. 당신의 이름과 목숨을 걸고서! 그러지 않으면 아드넬을 짐승으로 바꾸어 버릴 거야. 영영,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싸늘하고 차가운 음성이 테시우스의 귓가에 날아와 꽂혔다.

아드넬을 짐승으로 만든다니, 내가 겪었던 그 고통을 그녀에게도 주겠다고?

‘그것만은 절대 안 돼, 하지만……!’

그의 심장은 아드넬의 것이었다.

테시우스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격도 그녀의 것이었고, 목숨을 걸고 하는 사랑의 맹세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다른 여인을 사랑하겠다 맹세하는 순간 그 입술 또한 다른 여인의 것이 될 터다.

‘아드넬은 결코 기뻐하지 않을 거야.’

동시에 아드넬을 지켜야 해.

테시우스는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세레나를 직시하며 짓씹듯 내뱉었다.

“무릎은 얼마든지 꿇을 수 있다. 개처럼 빌고 다리 사이를 기어가래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맹세는 안 돼, 그건 오로지 아드넬의 것이야.”

“뭐……?”

“저주, 기꺼이 받아들이지. 단 아드넬이 아닌 내게.”

테시우스는 두 팔을 뒤로 감춘 채 말했다.

“반항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도록.”

“당신, 정말……!”

입술을 질끈 깨문 세레나의 표정은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낙심한 것 같기도, 분노한 것 같기도,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깨달은 것 같기도,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반되는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있었다.

“내가 어떻게 버티고 또 버텨 왔는데……! 무려 8년이란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침내 저주까지 풀어 주었는데도 왜 내게 돌아오지 않는 거야! 대체 왜! 왜냐고!”

쿵쿵 발을 구르고 악바리를 쓰며 외치는 세레나의 쟁쟁한 외침은 침실 밖에도 전해졌다.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기사들이 “전하!” 하고 외치며 벌컥 문을 열어젖혔으나, 테시우스는 손을 들어 보이며 그들을 제지했다.

“난 단 한 번도 네 것이었던 적이 없다.”

“아니, 아니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어질 운명이었어!”

“내 운명은 오직 아드넬이다.”

“아니라니까!!”

마치 울부짖듯 내뱉는 음성에선 쇳소리가 났다.

눈물이 차오른 눈동자엔 광기와 집착이 가득했다.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시선을 받아내며 테시우스가 말했다.

“너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마음 한 조각 갖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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