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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09)화 (109/141)

109화

훈련을 하다 보면 다치는 일도 허다했다.

기본적으로 목검을 쥐는 것과 진검을 쥐는 것 자체가 다르니까.

그에 따라 대련 방식도 바뀌고, 툭 하면 상처가 났다.

무게 또한 달라서 검을 휘두르다 보면 손바닥이 터지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테시우스는 피 냄새에 차츰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드넬……!”

테시우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캐노피의 커튼을 확 들추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색색 대는 아드넬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제대로 피가 멎지 않은 듯 동여맨 붕대가 붉은색으로 젖어 들어가고, 핏기가 사라진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 아아……!”

뭐라 말을 할 수 있을까.

테시우스는 절망하며 마치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시야를 가리고 싶을 만큼, 아드넬이 이만큼이나 다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상이라는 걸 알 수 있어 더더욱 그랬다.

‘널 지켜주겠노라, 그리 다짐했는데.’

현실은 어떻던가.

쳐들어온 불청객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성을 놓았다.

세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짐승의 모습을 한 채로 사냥터에 나타났을 터, 그 모습을 본 아드넬은 어땠을까.

그녀의 성격이라면 마도구 하나만 믿고서 뒤따라 들어갔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렇게 나타난 내가 원인이 되어 이런 상처를 입은 건 아닐까.

“윽…….”

밀려오는 죄책감,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미안함이 가슴을 옥죄었다.

테시우스는 잔뜩 움켜쥔 주먹을 심장 가까이 대며 허리를 숙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가슴께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언제인지도 모를 새에 맺힌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지며 옷을 적셨다.

“2황자 전하…….”

다르문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2황자는 저 아드넬이란 여인을 마음에 품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남자로 알았고, 병을 치료해 줬으니 가까이할 뿐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사이일 뿐이었다면 저리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쥐고 눈물 흘릴 리 없었다.

테시우스는 기어 올라가듯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드넬의 옆 침대 가에 걸터앉은 채 그녀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

아직은 산 사람이 분명한데 손에서 느껴지는 냉기는 죽은 자의 것과 비슷했다.

어쩌면 이미,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지도.

“아드넬, 제발……. 네가 없으면 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테시우스는 울먹이며 아드넬의 손을 쥔 채 자신의 이마로 가져다 댔다.

나의 모든 온기를 너에게 전해 줄 수만 있다면, 너의 모든 고통을 내가 가져갈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나는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는데.

어느새 테시우스는 소리 없이 오열하고 있었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 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늘 넓기만 하던 그의 등이, 어깨가, 이토록 작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구나……. 그리고 진작, 아드넬 님을 마음에 품으신 거야.’

모나는 눈가를 소매로 훔치며 애써 흐느낌을 참았다.

지금껏 그녀를 모신 저도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이는 어떻겠는가.

숯불로 가슴을 지진 듯 고통스러울 그 심정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사이 본성으로 달려간 다르문의 제자가 여자 궁의를 데려왔다.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기 위함이었으나 다소 끔찍할 테니 나가 계시란 말에도 테시우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고통을 일일이 확인하고 그 상처를 입힌 이에게 똑같이 돌려주겠다는 듯 활활 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상처를 봉합하고 붕대를 두를 때만 잠시 고개를 돌릴 뿐, 치료가 끝나자마자 다시금 아드넬의 얼굴을 눈동자에 담으며 차가운 손을 연신 어루만졌다.

누구도 그런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

테시우스는 모나가 해야 할 간호조차 자신이 자처했다.

물수건으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이마를 닦아 주고, 손과 팔을 주물러 주고, 간간이 고개도 돌려 주는 모든 수고스러운 일을 도맡았다.

혹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협탁 위의 종을 울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모나를 비롯한 궁의들 모두 침실을 나섰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노을이 완전히 내려앉고 짙은 밤이 되기까지 테시우스는 계속 아드넬의 곁을 지켰다.

정확히는,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나타나기 전까지였다.

* * *

‘날 외면하셨어.’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주를 풀어드린 건 나, 이 세레나인데도.’

자꾸만 숨이 막혀 헉헉 하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정작 찾은 건 아드넬이었어.’

까득, 이가 갈렸다.

‘아드넬, 아드넬, 아드넬……!’

세레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목걸이의 줄을 거세게 잡아 끊었다.

낡은 매듭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뜯어져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분기로 씩씩대는 숨소리는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대체 그년이 뭐기에, 전하께서 내게 그것을 찾으시는 건데!’

그는 내 남자였다.

내 영혼의 반쪽, 운명이 짝지어 준 단 한 사람.

그렇지 않다면 시궁창의 쥐처럼 쓰레기통을 뒤지며 연명하던 저가 실은 마녀의 피를 이었을 리도 없고, 후작씩이나 되는 대단한 이가 저를 먼저 찾아올 리도 없으며, 테시우스에게 짐승으로 변하는 주술을 걸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주를 풀어 주는 순간 그는 저와 사랑에 빠졌어야 했다.

녹인 황금을 부은 듯 찬란한 눈동자는 저만을 바라봐야 했고, 생기로 물든 입술은 제게 사랑을 속삭여야 했으며, 그의 거대한 팔은 저를 감싸 안아 줘야 했고, 그의 든든한 등은 오직 저만을 지켜 주는 방패가 되어야 했다.

분명, 분명 그래야만 하는데!

‘……아니야. 그냥 잠깐, 착각하신 거야. 저주가 풀린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워서…….’

[그러면 왜 아드넬을 찾으시는데?]

그 순간 제 목소리를 똑 닮은 질문이 귀로 들리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레나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세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병을 치료해 줬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근래 친하게 지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저주를 풀어 준 건 난데 왜 아드넬을 찾아? 눈앞에 있는 내가 아니라?]

‘내 안전을 확인하셨으니 다음으로 그 애를 찾으신 모양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언제부터 2황자 전하께서 그리도 다른 사람을 챙기셨다고?]

키킥.

비웃는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세레나의 입술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또륵 흘러내렸다.

[그 허술한 거짓말은 또 뭐야? 설마하니 그 정도도 대비하지 못한 거야?]

‘당연히 날 본 순간 사랑에 빠지셔야 했으니까! 내게 그런 걸 물으시는 게 어디 말이나 돼?!’

[멍청한 세레나. 아둔한 세레나. 그러니 아직도 이용만 당하는 거겠지.]

‘그러는 넌 대체 누군데! 왜 자꾸 나한테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거야!’

[나는 너야, 세레나. 이제 해야 할 일이 뭔진 잘 알겠지?]

‘뭐, 뭐?’

또 한 번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에 세레나의 눈동자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벌어졌다.

[당연히 되찾아야지. 내 남자를, 내 운명의 짝을. 아드넬은 물론이고 모두에게 보여 주는 거야. 그리고 똑같이 되갚아주는 거야.]

“……그래, 맞아.”

깨물린 입술이 마침내 자유를 찾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공허하던 갈색 눈동자에 광기가 어렸다.

‘모든 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었어. 난 그저 다시 찾는 것뿐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작은 소란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세레나는 씨익 웃으며 자신이 내동댕이친 목걸이를 주워 들었다.

끊어진 매듭을 묶어 다시금 목에 건 그녀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오두막을 벗어났을 땐 나지막한 목소리로 “후작의 개들아.” 하고 읊조렸다.

그 순간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사방에서 튀어나오며 그녀의 앞에 섰다.

‘망할 계집.’

‘건방지기 짝이 없어, 마음 같아선 그냥 죽여 버리고 싶은데.’

‘이번 일만 끝나면 반드시 폐하께 말씀드려 처리하고 말 거다.’

어느 순간부터 저가 제 주인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세레나는 그들에게 있어서도 고까운 존재였다.

진짜 주인님이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 주라 명하셨으니 따를 뿐, 오직 그녀만 이 사실을 몰랐다.

세레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2황자 전하께선 어디로 가셨지?”

“별궁입니다.”

“아드넬은?”

“……마찬가지입니다.”

사태는 진작 파악했다.

인위적으로 만든 사슴 변종으로 황태자를 처리하려 했으나, 소리를 막는 마법석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음에도 순간이동 마도구라는 변수 때문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덕분에 애먼 사람만 상처를 입었다지, 그에 따른 보고는 이미 게르펜이 하러 갔다.

‘어차피 폐하의 계획은 거의 모두 실현되었어.’

황태자가 죽지 않은 건 조금 아쉽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이 실패한 건 아니다.

그를 끌어내릴 거리는 차고 넘치도록 많으니까.

그리고 세레나는…….

‘……뭐, 이건 됐나. 제 운명이야 나중에 알게 되겠지.’

남자의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며 호선을 그었다.

물론 복면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세레나는 잠시간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날 별궁에 데려다줘.”

“별궁에……말입니까?”

“그래. 정확히는 2황자 전하가 계시는 곳으로,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이제 온전히 사람으로 돌아온 그를 찾을 일이 뭐가 있다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으나 곧 세레나가 그와의 사랑을 꿈꾸며 허구한 날 노래 부르던 것을 떠올리고 금세 수긍했다.

‘뭐, 허튼짓이야 하겠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다시 짐승으로 바꾸겠다 난리를 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금기를 깬 벌을 고스란히 받을 텐데, 그 정도 생각 머리는 있겠지.’

사내는 생각을 마치고 세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별궁에 도착한 건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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