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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08)화 (108/141)

108화

사냥터에 있어야 할 황태자가 난데없이 아드넬의 침실에서 튀어나오니 하녀는 거의 귀신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서 궁의를 불러오래도!” 하며 크게 호통치자 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본성으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빠르게 달려 도착한 하녀는 대충 전하께서, 궁의를, 별궁으로, 하는 식으로 단어를 끊어 말하며 전달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백발노인이 된 궁의 다르문은 자신의 제자를 먼저 보낸 뒤 마차를 타고 별궁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하녀가 말을 전한지 이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스승님!”

다르문이 먼저 보낸 제자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몸을 비켰다.

황급히 다가가자 피가 멈추지 않아 새빨갛게 물든 붕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쌕쌕 숨을 내쉬며 혼절한 요즈음 화제의 주인공과 응접용 소파에 앉아 초조함으로 다리를 떠는 바스토르가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 우선 피부터 멎게 해 주게……!”

바스토르가 간절한 음성으로 외치자 다르문은 일단 상처부터 확인할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저, 스승님. 그…….”

그때 다르문에게 제자가 가까이 다가가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예상치도, 상상치도 못한 발언에 다르문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젖어 들었다.

“지금 이곳에 이분을 모시는 하녀가 있나?”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제자는 마치 튕겨 나가듯 침실을 나서 금세 모나를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진작 사용인들이 몰려든지라 그녀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사이 다르문은 챙겨온 가방에서 지혈제와 붕대 등을 미리 꺼내두었다.

“……아드넬 님!”

방에 들어선 모나는 혈색 없는 얼굴에 기함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런 그녀를 제자가 이끌고 가자 다르문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치료가 급해 본성에 있는 다른 궁의를 불러올 수는 없네. 하니 자네가 나 대신 해 주어야 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

“……보면 알 걸세.”

다르문은 캐노피의 커튼을 촥 치고는 다짜고짜 약과 함께 모나를 밀어 넣었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누워 있는 아드넬의 등에는 피로 흠뻑 젖은 붕대가 올려져 있었다.

제자가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상의를 벗긴 순간 가슴을 동여맨 찢어진 복대를 발견하고 일단 붕대만 올린 채 손으로 눌러 지혈하던 것이다.

“젖은 붕대는 치우고 내가 준 지혈제를 상처에 뿌리게. 그리고 붕대를 아주 단단히 감으면 자네가 할 일은 끝이야.”

커튼 뒤로 다르문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나는 훌쩍이면서도 손을 뻗어 등 위의 붕대를 치웠다.

그제야 갈기갈기 찢긴 것 같은 심각한 상처가 보였다.

모나는 “흡!” 하고 격하게 숨을 들이켜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냥 대회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심각한 상처를 입는단 말인가, 그곳에서 제일 큰 짐승이라곤 사슴뿐인데 갈고리에 걸려 찢어진 것 같은 상처는 제 눈으로 보고도 쉬이 믿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피를 닦아내고 지혈제를 뿌리고, 마지막으로 붕대를 감기 위해 아드넬의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렸을 때였다.

“……맙소사!”

놀란 음성에도 다르문은 침묵했다.

사실 놀라기로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제자에게 “남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여성분이십니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땐 기함하고 말았으니까.

모두가 남자로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모나를 일부러 불러온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녀 또한 그 저의를 빠르게 눈치채고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도 손에 힘을 주어 붕대를 단단히 감았다.

감는 와중에도 피가 흘러내려 수시로 닦고 지혈제를 뿌려야 했지만 전혀 수고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드넬 님, 절대 이렇게 돌아가시면 안 돼요. 제발, 제발 무사히 깨어나 주세요.’

아드넬이 남자였든 여자였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얼마던가.

어느새 아드넬에게 마음을 연 2황자도, 그녀와 긴 시간을 함께한 필립도, 이렇게 다친 줄도 모를 제이든도, 그리고 수많은 별궁 사용인까지.

모두에게 아드넬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모나는 등을 붕대로 꽁꽁 싸매고서야 조심스레 커튼을 걷고 나왔다.

그동안 다르문은 제자를 보내 본성에 있는 여자 궁의를 불러오라 이른 상태였다.

지혈제를 뿌리고 붕대를 감는 건 출혈을 막기 위함이지, 본질적인 치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반드시 봉합해야만 했다.

제자가 방을 나서자 남은 건 세 사람뿐이었다.

다르문은 이제 사정을 들어야겠다는 듯 바스토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바스토르는 침중한 얼굴을 두 손을 감싼 채 연신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이게 다 어찌 된 일입니까?”

“사냥터에……. 마수가 나타났다.”

마수, 혹은 괴물.

그것은 마녀가 세상에 나타나 사냥당할 때 함께 사라진 것이었다.

그들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마녀뿐이기에 그들의 존재가 지워지면서 마수 또한 함께 사라졌고 사람들은 크게 안심했다.

분명 그럴 터인데…….

“아드넬이……날 구해 주었고.”

사냥터에서 별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8년 전 아드넬이 제게서 도망칠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마도구일 터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대비책으로 늘 가지고 다니는 듯한데 그 덕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딱, 그 혼자만.

“아니, 친위대 기사단장님은 어딜 가시고 전하와 저분만 함께 계셨단 말입니까?”

“호르세 후작에겐 따로 맡긴 임무가 있다.”

비밀 거처에서 아드넬에게 들은 내용 중 일부를 공유해주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는 자가 누구인지 뒤를 캐라 명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호르세 후작은 친위대에서도 몇몇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웠다.

그 명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드넬이 이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이상한 건 다른 기사들은 그 마수를 전혀 보지 못했다는 거야. 비명이라도 들릴 법한데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저가 본 것만 무려 두 마리다.

그리고 그것은 얼핏 사슴의 형상도 띄고 있었다.

어쩌면 사냥터에 있는 사슴을 인위적으로 바꿔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불현듯 들었다.

“일단 나는 사냥터로 돌아가야겠다. 한시가 급해.”

원래도 아드넬이 치료받는 것만 보고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바스토르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창 난리가 났을 사냥터에 남은 마수들도 모두 잡아야 하고 사람들의 통제도 막아야 하고 이래저래 수습할 일이 많았다.

‘이번 사건에 대한 소문은 어쩌질 못하겠군.’

바스토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사냥터로 향했다.

본성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둔 채, 전신 무장한 기사들을 데리고 빠르게 말을 달려 도착한 사냥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사태를 파악해 보니 사냥터에서 튀어나온 마수의 등장에 아연실색 놀라 대부분 사람은 마차를 타고 도망쳤으나 몇몇은 그들에게 진작 죽임당한 뒤였다.

곳곳에서 고함과 비명이 낭자하게 울려 퍼지고, 기사들은 어디서 자꾸만 나타나는 마수와의 고군분투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랄 만한 건 아직 마수가 사냥터 밖을 벗어나진 못했다는 점이었다.

바스토르는 끌고 온 병력 중 절반은 사냥터를 둘러싸 포위망을 만들 것을, 나머지는 사냥터 안으로 들어가 사냥할 것을 명했다.

그동안 착실히 훈련받은 기사들답게 모두 명을 받자마자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들이 진열을 갖추고 머지않아 마수들의 울음소리도 사방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불행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 *

세레나는 그저 모른다, 모른다고 일축했지만 테시우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아드넬을 죽이려 들었어.’

맨 처음 별궁에 왔을 때 세레나는 그녀를 동경한 나머지 자처해 시녀가 되겠다 했다.

그러나 실상은 아드넬에게 독이 든 샴페인을 먹이려 했고, 작정하고 죽음을 꾸몄으며, 갑자기 나타나선 저주를 풀어 주기까지 했다.

‘무려 아드넬의 목걸이를 가지고.’

그런 세레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테시우스는 부득 이를 갈면서도 쉬지 않고 달렸다.

사냥터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왔지만 그의 목적지는 오직 한 곳, 별궁이었다.

‘위험에 처하면 마도구를 사용하겠다고 내게 일전에 말했으니까.’

8년 전 델리움에서처럼 아드넬은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순간이동 마도구를 사용할 테니 안심하라, 걱정하지 말라 말해 주었다.

세레나가 그녀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모습에 어쩌면 이미 해를 가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아드넬은 평소에 그 목걸이를 차고 다니지 않았다.

사냥 대회 같은 공식 행사에는 남장을 하고 나타나는 만큼 더더욱 차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몰래 그녀의 목걸이를 훔쳐 갔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이제 그만 멈추라는 듯 고통스러울 정도로 격하게 요동쳤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드넬의 안위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로.

그렇게 황성 뒤편 사냥터 쪽에서부터 별궁까지, 한참을 달리고 또 달린 끝에 테시우스는 마침내 그녀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침실 앞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하나같이 걱정과 염려,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비켜라!”

“2황자 전하……!”

대체 뭘 하고 왔기에 머리는 잔뜩 뻗쳐 있고 전신이 땀 범벅인지, 뒤늦게 그를 발견한 별궁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며 몸을 비켰다.

테시우스는 갈라진 인파 속 굳게 닫힌 방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그 순간 그의 코끝에 아주 익숙하고도 끔찍한 냄새가 어른거렸다.

‘피 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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