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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07)화 (107/141)

107화

저주를 건 사람을 보았다고?

테시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말했다.

“처음 보는 여자였습니다. 아주 초췌하고, 악바리로 가득 찬 얼굴을 한 채였죠. 그녀는 이상한 주문을 읊으며 잠드신 전하께 저주를 걸더니 방을 나서자마자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결했어요. 저는 밤잠이 오지 않아 물을 가지러 일어났었는데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했고요. 하지만…….”

세레나는 어느새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보았음에도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차마 나설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음 날 아침이 되면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그날 전하께서 놀라 사라지시고 말았죠.”

“…….”

“그 죄책감을 저는 평생토록 외면할 자신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죽은 여자가 남긴 물건들을 토대로 조사를 시작했고, 그녀가 제국에서 사라진 줄만 알았던 마녀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레나는 엄청난 사실을 고백하려는 듯 숨을 고르더니,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 또한 같은 마녀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마녀!

그 말을 듣는 순간 테시우스는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뭔가 머릿속에서 퍼즐이 짜 맞춰지는 기분이 드는 와중에, 세레나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저주를 거는 것과 반대로 풀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방법을 찾아 헤맨 세월이 무려 8년, 마침내 방도를 찾아내었고요.”

세레나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만개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두 손을 모아 가슴께에 올렸다.

“제가 마녀라는 사실을 밝히는 건 그야말로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나, 오로지 전하의 안위만을 생각해 결심을 내렸어요. 오늘에야말로 세레나가 전하의 저주를 풀어드릴게요.”

“…….”

그러나 테시우스는 저주를 풀 수 있다는 말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마녀라면 왜 그 샴페인을 마신 거지?’

아드넬은 능력으로 그것이 독이라는 걸 알았고, 샴페인을 권한 건 세레나였다.

한데 독이 들어간 걸 당연히 알고 있었을 세레나가 자기가 마신 걸로도 모자라 아드넬에게 직접 권하기까지 했다?

답은 하나였다.

‘아드넬을 죽이려 한 게 너였구나.’

분명 저가 모르는 꿍꿍이가 더 있을 터다.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일단은 장단을 맞춰 주는 편이 좋았다.

아무래도 대화를 통해 단서를 더 캐내야 할 듯싶어, 테시우스는 순순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지친 나머지 힘이 없다는 듯, 다분히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반면 세레나는 처음으로 그가 먼저 다가오자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졌다.

‘역시! 전하께서도 유일하게 저주를 풀어 줄 수 있는 내게 한순간에 마음을 내어주신 거야!’

제 예상은 역시나 빗나가지 않았다.

세레나는 서둘러 옷으로 가린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조악하고 볼품없는 매듭 중간에 달린 푸른 사파이어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 보석을 본 테시우스가 흠칫 놀랐으나, 세레나는 그가 긴장해서 그런 줄로 생각하곤 넓은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세레나가 전하의 옆에 있어 드릴게요.”

“…….”

세레나는 마치 감싸듯 한 팔로 그의 등을 끌어안은 채, 다른 손으론 목걸이를 손에 쥐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후작이 보여 준 술식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힘만 있으면 이렇게 간단한 것을.’

등에 맞닿은 그녀의 손을 타고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테시우스의 전신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마나를 처음 느껴 보았을 때의 이질감같이 기묘한 힘을 느낀 순간, 테시우스는 꽤 오래 잊고 있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바스토르와 함께 여관에 있었을 때…….’

그날 뒷마당에 나갔을 때 테시우스는 갑자기 사람으로 돌아왔고, 바스락하는 명백한 발소리를 들었다.

여태껏 잡지 못한 인기척의 주인, 그날 받은 느낌과 무척 비슷한 지금의 감각, 그리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저주를 거는 것과 반대로 풀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레나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까지.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머리는 생각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정신은 점점 아득해졌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지난번과 같이 어쩌면 이대로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때, 테시우스는 자신의 몸을 흔드는 거센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전하! 2황자 전하!”

“…….”

테시우스는 잠시간 멍하게 있더니 곧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보았다.

짐승의 커다란 앞발이 아닌, 검을 잡아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바닥이 보였다.

‘돌아왔어.’

“이제 전하께서 다시금 짐승으로 바뀌실 일은 전혀 없을 거예요! 세레나가 저주를 완전히 풀어드렸으니까요.”

목걸이가 없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정도의 방대한 힘이 들어간지라, 세레나가 이마 위에 배어 나온 식은땀을 흩어내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테시우스는 그런 세레나를 응시하더니, 그녀가 의심하지 않고 또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질문을 머릿속에서 골랐다.

“……그런데 왜 굳이 죽었다고 알린 거지?”

“아……. 그건…….”

세레나는 흠칫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잠시 대답을 회피했다.

저가 죽음을 가장한 이유는 아드넬이 마녀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알아챌 수 없을 독이었으니까, 그래서 죽일 요량으로 타서 준 건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마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샴페인을 마시고 죽은 사람 행세를 한 건데.

하지만 2황자는 그 사정을 모르니 저러한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세레나는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곤 서둘러 답했다.

“그편이 더 움직이기 쉬울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목숨이 걸린 일이다 보니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딱히 믿음이 가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아낼 건 아직도 많다.

테시우스는 미심쩍은 기색을 감추며 태연하게 다시 질문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사냥터에 전하께서 나타나셨거든요. 무려 짐승의 모습으로요!”

이건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 세레나가 냉큼 답했다.

그런데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테시우스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물들자 세레나는 그런 그가 무척 안쓰럽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당시 전하께선 어딘가 약에 취한 듯 멍해 보이셨어요. 그 모습을 보신 황태자 전하께서 포박하라 명하시자 황급히 숲속으로 도망치셨죠. 저는 그런 전하를 보고 뒤따라갔는데,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전하를 이곳까지 데려다 놓았어요.”

약,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무리.

그건 테시우스가 이성을 놓기 전 만난 불청객이었다.

그것만큼은 진짜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군. 이미 죽은 걸로 알려진 네가 어떻게 초대받아야지만 들어올 수 있는 사냥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거지?”

“아, 짐칸에 몰래 숨어 들어갔거든요. 아무래도 시녀 생활을 하며 얼굴이 많이 팔렸다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포박을 명하셨다면 기사들도 뒤따라갔을 터, 한데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홀로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 그건…….”

“하물며 그 검은 옷을 입은 무리에게도 띄지 않고? 그들 중 한 명은 내가 일찍이 겪어 보았어, 내 몸에 상처를 낼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지. 하지만 넌 자신의 기척 하나도 숨기지 못해.”

“…….”

테시우스가 질문을 거듭할수록 세레나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참으로 얄팍하고 허술한 거짓말이로군. 네 입은 그런 말밖에 내뱉지 못하는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기적이 존재하지 않다면 그런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전하를 이리 찾아낸 것 또한 기적과 같은 일……!”

“듣고 싶지 않다.”

테시우스는 그 자리에서 세레나를 밀쳐내며 일어섰다.

그리곤 부득 이를 갈며 한겨울 서릿바람보다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아드넬은 어디 있나.”

* * *

“여기가……. 대체…….”

바스토르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끔벅거렸다.

무슨 연유에선지 회오리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어지러워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이에 바스토르는 잠시간 눈을 감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흉악하고 이상한 괴물을 만났다.

그것은 무척 잔인하고 소름 끼쳤으며, 오직 살의만이 존재했다.

눈앞에서 조우한 그 순간은 아마 평생토록 잊지 못하리라.

그만큼 끔찍하게 생긴 마수였다.

‘하지만 한 마리가 아니었어. 분명 뒤에서…….’

몸을 돌리자마자 순식간에 덮쳐들어 오는 또 한 마리의 괴수가 보였다.

너무도 빠르고 가까워 끝을 직감할 수밖에 없던.

그러나 저보다 먼저 괴물을 발견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스토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번쩍 뜨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자신의 바로 옆에 엎드린 채 누워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드넬!”

바스토르는 황급히 몸을 숙여 그녀의 안색을 확인했다.

뒤늦게 느껴지는 피 내음, 등에 선명하게 새겨진 상처.

매서운 채찍질에 살이 터져나간 것처럼 찢어진 상처에선 붉은 피가 퐁퐁 솟아 흘러내렸다.

새하얀 시트가 젖어갈 정도의 출혈량, 척 보기에도 심각한 치명상이었다.

‘아드넬이 날 감쌌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두 팔을 뻗어 제 몸을 감싸 안는 그녀였다.

하지만 마수의 속도는 인간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이런 큰 상처를 입은 듯했다.

바스토르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갈하고 깔끔한 방, 그러나 곳곳에 놓인 가구며 벽면의 장식만 보아도 귀족의 저택 혹은 황성 어딘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바스토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갔다.

닫힌 문을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열자, 지나가던 하녀가 “어마!” 하며 들고 있던 세탁물 바구니를 놓쳤다.

그녀가 입고 있는 유니폼은 그의 눈에도 아주 익숙했다.

“지금 당장 궁의를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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