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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04)화 (104/141)

104화

머리로는 아니라는 걸 아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아드넬이었다.

꿈결 속의 음성이 들린다면 딱 이런 기분일까.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분명 저를 부르고 있었다.

‘아드넬.’

음성을 듣고 얼굴을 본 순간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공격했던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으나, 이성이 흐려진다는 걸 자각하지 못할 만큼 그는 무언가에 취해가고 있었다.

아드넬을 따라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테시우스는 마치 홀린 듯 그녀를 따라갔다.

그가 공허한 눈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문 쪽으로 다가가자 사내 또한 몸을 돌렸다.

“허, 듣기는 했지만 정말 이런 효과를 낼 줄은…….”

“사람에겐 정말 아무런 해가 없습니까?”

한편 그 모든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게르펜에게 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를 드러내며 달려든 짐승이 한순간에 온순해질 줄이야, 저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동물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약이다. 이만 사냥터로 가지.”

게르펜은 짤막하게 답했으나 티를 내지 않을 뿐 놀랍기로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마녀의 능력이 이 정도였던가.’

본래 다친 동물을 치료할 때 경계심을 풀고 따라오게끔 만들어진 약이라고 들었는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세레나가 제 주인에게 보이는 방만한 태도가 무척 못마땅하긴 해도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꽤 돌아갔다.

만약 그조차도 없었더라면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 해치웠을 텐데, 그래도 아드넬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은 마녀인 데다 당장은 저들 편이니 두고 볼 뿐이었다.

“너희들은 2황자를 데리고 사냥터로 가라. 슬슬 계획이 시작될 터, 나는 별궁에 갔다가 합류하지.”

“예!”

어느새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린 테시우스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라면 일단 따라가고 보았다.

게르펜은 제 수하들에게 따로 임무를 내린 뒤 홀로 별궁으로 향했다.

사냥 대회가 열린 만큼 다소 한산했으나 사용인들은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는 단 한 곳, 그것도 그들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아드넬의 침실이었다.

‘목걸이를 찾아야 한다.’

원래는 아드넬을 처리하고 찾을 계획이었으나 그동안 테시우스와 함께 있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지금은 사냥 대회로 자리를 비웠고 2황자도 없는 상태.

목걸이는 아마도 침실에 있든지 혹은 아드넬이 하고 있을 터였다.

일단 그것만 확인하면 되었다.

다만 지금은 밝은 대낮이라, 게르펜은 몸을 숨기고 있다가 후원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아드넬의 침실 근처에 크게 자라난 나무 위로 올라갔다.

거의 다 저물어가는 나뭇잎이 흔들리며 떨어진 순간 그는 훌쩍 도약해 테라스로 단숨에 넘어갔다.

익숙하게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게르펜은 전과 같이 소파 아래부터 시작해서 물건을 숨기기 좋아 보이는 곳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가 원하던 걸 발견했다.

‘이공간 마법이라.’

침대 아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겉으로 보기엔 별것 없는 가방에 불과했다.

모양새도 그렇고 소재도 그렇고 퍽 볼품없었으나 안에 든 물건은 아무리 꺼내도 끝없이 나왔다.

온갖 종류의 액체가 담긴 병은 물론이고 묵직한 돈 자루에 두꺼운 노트까지 중요한 물건이라면 모두 이곳에 담아 두는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손을 뻗은 순간 손끝으로 다소 딱딱하고 거친 무언가가 느껴졌다.

뒤따라 나온 나무 상자는 척 보기에도 오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도금이 벗겨진 쇠고리를 열자 드러난 것에 복면으로 가려진 무표정한 얼굴 위로 미약한 미소가 떠올랐다.

‘목걸이다……!’

제 주인이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목걸이는 과연 들은 것만큼이나 영롱하게 빛났다.

살아 움직이는 물방울을 넣은 듯, 맑은 호수같이 일렁이는 사파이어는 척 보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혹시 차고 간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세레나가 즙을 탄 샴페인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드넬은 해독제를 만들지 않았다.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던 모양인데, 그 결과가 목걸이도 차고 나가지 않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있어선 실로 잘된 일이었다.

게르펜은 목걸이가 들어 있는 상자를 소중히 챙긴 뒤 나머지 물건들은 도로 가방에 넣고 가방 또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아예 온 적도 없다는 듯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 * *

대부분의 남자들은 사냥하러 떠났고, 막사에 남은 건 귀부인과 영애들이었다.

당연하지만 눈에 띄었다가는 지난 추수제 연회처럼 붙잡힐 터였다.

그만큼 아드넬은 화제의 주인공이라, 저를 발견하고 눈을 빛내는 여자들로부터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그들에게 붙잡혀 화장품에 관한 걸 설명하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드넬은 주인을 따라온 하인들이 잠깐씩 쉬어가는 조악한 막사 뒤편에 숨은 채 연신 눈알을 굴렸다.

대놓고 찾는 티를 내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 눈으로라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테시우스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드넬은 절망했다.

이는 바스토르도 마찬가지라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사냥하러 가는 대신 권좌에 앉은 채로 애써 초조함을 감췄다.

하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지 못했다.

바스토르의 옆에 서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사냥터로 들어가는 입구 쪽, 좁게 난 숲길 쪽으로 막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흑표범이다!”

그가 외친 한 마디를 시작으로 일제히 시선이 몰렸다.

그리고 그곳엔 어지간한 성인 남성 크기만 한 커다란 짐승, 흑표범 테시우스가 서 있었다.

“꺄아악……!”

“황태자 전하를 보호해라!”

“어서 잡아!”

여기저기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오자 기사들은 일제히 창을 치켜들었다.

저들이 보기에도 누군가를 해치려는 듯 공격성을 드러내진 않으나 사람을 단숨에 물어 죽일 수 있는 흑표범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냥터, 그것도 수도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큰일이었다.

여자들은 우르르 막사 안으로 몰려들어 가고 따라온 호위 기사들이 그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가운데, 바스토르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테시우스……!’

이곳에서 저 흑표범이 2황자라는 걸 아는 이는 그와 아드넬뿐이었다.

바스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황급히 창을 치켜든 기사들을 제지했다.

“공격하지 마라! 아직 사람을 해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서둘러 내 말을 가져오도록!”

“예, 황태자 전하!”

이 순간 필요한 건 침착함이었다.

바스토르는 기사가 자신의 말을 가지고 오는 동안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는 테시우스를 지켜보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테시우스가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사냥터에 올 리 없다. 게다가 이리 대놓고 나서면서 공격성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떤 약 같은 것에 취했을 가능성도 있겠어.’

테시우스를 지키려면 그가 직접 나서야 했다.

일단 사로잡기만 하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보호할 수 있었다.

물론 순순히 잡힐지는 미지수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어서 기사가 말을 끌고 돌아오자마자 바스토르는 안장 위에 올라탔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막사를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온다. 하나 절대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된다, 밧줄로 사로잡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존명!”

눈처럼 새하얀 털을 휘날리며 백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하며 땅을 울리는 발굽 소리에 일순 흑표범은 움찔하는가 싶더니,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숲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스토르를 선두로 뒤따르는 기사들은 일제히 창을 든 채로 말을 달려 쫓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아……! 안 돼!’

한편 막사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아드넬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비명을 참았다.

그녀가 바란 대로 테시우스는 끝내 나타났으나, 사람이 아닌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사들이 그를 사로잡으러 들어갔으니 어쩌면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그려질수록 아드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누가 주먹으로 내려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아파 왔다.

쿵쿵대는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여기서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이성적이었더라면 바스토르를 믿고 기다렸을지도 모르지만 아드넬은 테시우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아드넬에겐 최후의 수단이 하나 있어, 일단 테시우스를 만나기만 하면 다른 곳으로 도망치게 해 줄 수 있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드넬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억지로 일어났다.

자꾸만 숨이 가빠 와 어지러웠으나 지금은 그런 제 몸 상태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드넬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등 뒤로 멈추라는 고함이 울려 퍼졌으나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머릿속을 지배한 건 오직 테시우스, 그리고 끔찍한 울부짖음이었다.

‘제발, 제발!’

어떻게든 그를 찾아야만 했다.

무기도 방어구도 없고 심지어는 길조차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눈 앞을 가리는 대낮의 안개를 헤치며, 일말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 아드넬은 그저 테시우스를 찾고 찾고 또 찾았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풀을 파헤치며 난 상처의 통증은 가슴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테시우스……!”

마른 입술 사이로 절절하리만큼 간절한 목소리가 튀어나온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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