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사냥 대회를 사흘 앞둔 시점, 아드넬은 테시우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후 먼저 별궁에 돌아왔다.
같이 별궁으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혼자 온 것인데 오자마자 들려온 소식에 그만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제이든이 떠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 편지를 두고 갔어.”
필립은 어딘가 굉장히 불편하고, 또 서운한 표정으로 아드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제이든 또한 감쪽같이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찾던 중 발견한 편지는 그가 남긴 것이었고, 필립 또한 그 내용을 읽었다.
아드넬은 황급히 넘겨받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이미 내가 떠난 후일 테지.
미안해, 아드넬. 더는 네 곁에 있을 수가 없었어. 머리로는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늘 그렇듯 내 뜻대로 되지가 않았어.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지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널 보니 그 진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마음과 같길 바라는 이기심이 고개를 치켜들더라.
너뿐만 아니라 날 위해서도 이만 떠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이해해 주길 바라. 그리고, 잘 지내.
언제까지고 네가 행복하길.
- 제이든.]
편지를 다 읽었을 즈음 아드넬의 눈동자엔 이슬 같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제이든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만큼 충격은 컸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그와의 이별이 이리도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이야.
그렁그렁 맺힌 눈물은 금세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모습에 필립이 죄책감 어린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아드넬. 다 나 때문이야.”
“……필립 때문이라니?”
“예전에 2황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을 때 제이든에게 따로 얘기했었어.”
그런 식으로 마음을 강요하지 말라며, 한 번만 더 그런 모습을 보이면 가만히 있진 않겠다며 제이든을 몰아세웠노라고.
필립은 그날 나누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홀로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떠나 버렸구나.
아드넬은 침중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데.
이제야 왔냐며 힘들진 않았냐 물어볼 것 같은데.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옆에 있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쉬이 현실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2황자 전하께서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으셨다니…….”
일주일이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말과 달리 테시우스는 여전히 짐승의 모습이었다.
당장 사냥 대회가 코앞인데, 별궁으로 돌아올 수도 없을뿐더러 제때 참석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에 바스토르 또한 조급해졌으나 해결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테시우스는 돌아오는 대로 빠르게 가겠노라 안심시켰지만 불안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대회 당일, 황성 뒤편 사냥터.
인위적으로 만든 넓은 사냥터 곳곳에 막사가 세워지고 한껏 차려입은 이들이 차례차례 도착했다.
사냥은 승마와 같이 귀족들의 고급 취미 중 하나였다.
때문에 곰이나 멧돼지 같은 위험한 동물은 찾아볼 수 없고, 제일 큰 사냥감이라 봐야 뿔이 길게 자라난 사슴이 고작이었다.
여기서 제일 많은 동물을 사냥한 이가 우승하게 되지만 그보다는 결혼 적령기의 영애, 영식들이 제 짝을 찾으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런 만큼 수도의 거의 모든 귀족이 참석했다.
‘어째 사냥감보다 사람이 더 많은 기분인걸.’
어차피 귀부인이나 영애는 사냥을 하지 않으니 얌전히 막사에 있을 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무척 많은 수였다.
아드넬은 불안한 눈으로 막사가 세워진 사냥터를 둘러보았다.
사실 그녀가 참석할 이유는 없지만 테리우스가 돌아오지 않았다 보니 좀 불안한 게 아니었다.
늦게라도 오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야지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온 것인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작은 수군거림은 불안감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
“2황자 전하께선 어딜 가신 거지?”
“이제 곧 시작인데 아직도 오지 않으시다니…….”
“이런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시는 건 말도 안 돼.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
“그럼 정말로 그 소문이…….”
시종, 시녀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작게 소곤거리며 저들이 들은 소문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소문이 도는 와중에 무슨 일을 꾸미는 게 더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시우스가 나타나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어쩌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잠재우려면 당사자가 등장하는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흘러 바스토르가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려 단상 앞에 섰을 때도 여전히 테시우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스토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짧은 연설을 마쳤으나 아드넬이 올려다본 보랏빛 눈동자는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이윽고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아드넬도 덩달아 바짝 긴장하며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사냥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적어도 오늘 대회가 끝나기 전까지만이라도 오면 어느 정도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텐데.
‘어서 돌아오세요, 전하.’
아드넬은 간절히 빌며 어린 영식들이 활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테시우스는 여전히 비밀 거처에 있는 채였다.
혼자가 아닌, 낯선 이들과 함께.
* * *
‘왜 바뀌질 않는 거지.’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은 조급해지는데 거울 속에 비치는 건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평소 바뀌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진작 변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아드넬보다 먼저 거처에 들어왔고, 그녀가 오기 하루 전 흑표범으로 변했으니까.
하지만 열흘을 족히 넘겼는데도 테시우스는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던지라 이젠 조급함을 넘어서 답답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내게 저주를 건 이들이 나도 모르는 새에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모든 것이 딱 들어맞을 리 없다.
바스토르가 저를 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도는 만큼 반드시 대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하필 이때, 그것도 처음으로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짐승의 모습으로 참석한다는 게 말도 안 될뿐더러 갔다가는 되레 사냥당하는 꼴이 되고 말 터다.
테시우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제발, 제발 한시라도 빨리 돌아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던 그때였다.
쿵쿵!
닫혀 있는 문 너머로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려오며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사냥감을 포위하듯 에워싼 형태라, 테시우스의 동공이 가늘게 좁아졌다.
‘누군가 작정하고 찾아왔다.’
의심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분노로 변모했다.
아마도 밖에 있는 저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맨 그의 적일 터였다.
게다가 대놓고 문을 두드리며 기척을 숨기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며 근육이 팽창했다.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린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잠겨 있던 문이 강제로 열렸다.
갑작스레 등장한 불청객은 전신을 어두운 옷으로 감싸고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린 채였다.
보이는 곳이라곤 핏빛으로 물든 새빨간 눈동자뿐, 그가 뿜어내는 기운 또한 범상치 않았다.
“…….”
사내는 당장이라도 제게 뛰어들 것처럼 상체를 낮춘 채 위협적으로 그르렁대는 테시우스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름 아닌 작은 약병으로, 신비롭게 빛나는 바스토르의 눈동자와는 달리 칙칙하고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보라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테시우스가 흠칫 몸을 떨기 무섭게 남자는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분명 액체에 불과할 터인데, 뚜껑이 열리는 순간 액체는 보랏빛 기체로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방 안을 잠식했다.
안개 같은 기체 구름 속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탈출구는 단 하나, 저 사내를 뚫고 가는 것뿐이었다.
“크르릉……!”
테시우스는 거칠게 울며 문 앞을 막아선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꿰뚫을 듯 살벌하게 드러난 송곳니가 빛난 순간, 사내가 재빠르게 꺼내든 날카로운 단도 또한 예리하게 번쩍였다.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 한 차례 공격이 오갔다.
남자는 테시우스가 휘두른 거대한 앞발을 유연하게 피함과 동시에 그림자처럼 빠르게 옆으로 돌아가 허벅다리에 상처를 냈다.
그리 깊숙하지도, 또 급소를 노리고서 한 공격도 아니었다.
일부러 움직임을 느리게 할 목적으로 낸 상처였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짐승으로 바뀐 테시우스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속도였다.
만약 무투회에서 이자를 만났더라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한 실력자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나가야 하는데.’
저런 속도라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절대 뚫고 지나갈 수 없다.
저와 다르게 급소를 노리지 않고서도 상처를 낼 정도의 실력자를 이기려면 한 번 달려드는 것만으로도 많은 허점을 보이는 짐승의 모습으로는 불가능했다.
지금 당장 사람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무기 하나 없는 상태로 이기기란 무리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저 남자를 뚫고 나가는 것 하나뿐이었다.
테시우스가 다시금 달려들기 위해 몸을 살짝 뒤로 빼며 전신의 근육을 팽창시켰을 때였다.
‘……어?’
일순 정신이 몽롱해지며 콧속으로 들어온 연기가 복잡하게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세뇌하듯, 혹은 본능을 자극하듯,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대며 점차 몸에 힘이 빠졌다.
정신을 차려 보려 해도 자꾸만 어지러워졌다.
눈을 끔벅거릴수록 눈앞의 남자는 자꾸 흐려지더니 차츰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훨씬 작고 여린 체구, 새카만 옷이 아닌 하얀 셔츠에 갈색 바지를 입은.
빛바랜 흑발이 어깨 위에서 찰랑이며 말간 얼굴 위로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