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곧 있을 사냥 대회에서 테시우스와의 돈독한 우애를 보여 주면 되노라고 말했지만 바스토르의 심경은 복잡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판단일 뿐 본질적인 문제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는 탓이다.
‘대체 누구일까.’
그가 테시우스를 해하려 한다는 악의적인 소문 외에도, 세레나가 죽었다.
바스토르가 직접 명해서 별궁으로 보낸 시녀이나 대외적으론 자원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사인도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죽음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세레나가 내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부의 적이 있는 것일까.
무엇 하나 해결된 것 없이 짐작만 차고 넘쳤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바스토르는 테시우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늘 그래왔듯 고민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그러나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 거처에,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바스토르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너…….”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시우스만 있을 줄로 알았던 비밀 거처엔 아드넬이 함께 있었다.
이 아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런 의문도 잠시, 바스토르의 분노한 눈동자가 테시우스를 향했다.
“끝내 내 조언을 무시한 거냐?”
아드넬에 대한 이상한 점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는 동생을 걱정했다.
온갖 기기묘묘한 화장품을 만들어내는 아드넬이 만약 저주와도 관련이 있다면 그것만큼 큰일이 없을 테니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거리를 두라 말했다.
아무리 마음을 준 사람이래도 의심을 완전히 거두진 말라 그리 일렀거늘, 제 형의 진심 어린 조언보다 아드넬이 더 중요했던 것일까.
크게 동요하는 보랏빛 눈동자 위로 섭섭함과 실망감이 어렸다.
“널 믿었다, 테시우스. 남들이 뭐라 말해도 너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라, 언제나 네 안위를 걱정했는데……. 끝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했구나.”
분기 어린 목소리에 스며든 서운함은 명백했다.
테시우스는 진심으로 뭐든 설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 다급히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그 간절한 시선에 아드넬은 지금 바스토르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붙잡고 보았다.
“전하……! 뭐든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제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던 바스토르는 아드넬의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서늘한 낯빛으로 말했다.
“네가 거짓말에 능숙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상한 점만도 한둘이 아닌데, 진실 하나 없는 말을 들어 무엇하지?”
“오직 진실만을 말씀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잠시간 응시하던 바스토르는 곧 낮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열린 문을 닫았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짐작이라면 이제 진저리가 나서 뭐라도 듣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소파에 털썩하며 한쪽 다리를 꼬고 앉자 아드넬은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테시우스는 쌩하니 반대편으로 건너와 그녀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무엇이든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물으십시오.”
“……좋아. 먼저 너의 이름들, 그리고 주인이라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바스토르는 일찍이 테시우스에게 말했던 의문점을 줄줄이 읊었다.
테시우스가 그녀에게 물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고, 아드넬은 그때처럼 차분하게 하나하나 답하며 바스토르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이름이 흡사한 이유부터 시작해서 아실라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점, 델리움에서 어떻게 화장품을 만들었으며 마도구를 갖게 되었는지, 사실은 여자이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과 심지어는 마녀라는 것까지도.
진실을 내뱉을 때마다 바스토르의 눈동자는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모두,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정말로……. 네가 마녀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물론 세간에 마녀가 어떠한 존재로 알려졌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아드넬은 가방 깊숙한 곳에서 엄마의 목걸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제아무리 빛나는 보석이라 한들 한낮 광물에 불과할 터인데, 아드넬이 건넨 목걸이의 물방울 모양 사파이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영롱하게 일렁였다.
바스토르가 이게 뭐냐는 듯 고개를 들자 아드넬이 답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으로, 이걸 사용해 마녀의 능력을 개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흘러들어온 수많은 지식은 모두 치료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뭐……? 치료?”
“2황자 전하께서 앓으시던 병도 그 지식과 능력을 바탕으로 만든 연고로 치료한 것입니다.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아드넬의 눈동자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제 말마따나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온전히 믿기 어려웠다.
“내가 들은 것이 정녕 사실이냐?”
바스토르는 아드넬이 아닌 테시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테시우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저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만약 방법을 알았더라면 진작 2황자 전하의 저주를 풀어드렸을 겁니다.”
“왜지? 실제로 그런 능력을 사용한다면 넌 곧장 처형당할 텐데, 그렇게까지 테시우스를 도와줄 이유라도 있나?”
“그건…….”
아드넬은 잠시 머뭇거린 끝에, 바스토르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제가…… 2황자 전하를 사랑하니까요.”
이어진 말에 크게 놀란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드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테시우스는 바로 옆에서 들은 사랑 고백이 못내 좋다는 듯 콧수염을 씰룩이며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럼 아드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테시우스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드넬이 사실 여자였고, 테시우스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녀 또한 같은 마음이다.
여기에 아드넬의 설명을 옆에서 들으면서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 바스토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다 알고도 말 안 한 거냐?”
“…….”
그거야 말했다간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테시우스는 새삼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 감사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아드넬의 허벅지 위로 앞발을 올리며,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 보였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해를 가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이래서 백날 잘해 줘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까. 나 혼자 맘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애태웠군.”
“……송구합니다, 전하.”
아드넬은 고개를 살짝 수그려 보이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이 남았다.
다름 아닌 세레나의 죽음과 관련된 얘기였다.
테시우스가 따로 알아보겠노라 했지만 황태자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말하는 게 나았다.
더구나 때마침 수도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만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추수제 첫날 연회에서, 누군가 제 샴페인에 독을 탔습니다.”
정확히는 엘루디아라는 식물의 즙이며 재스민차와 복용하면 반응하는, 그 때문에 세레나가 죽었노라 고백하는 아드넬의 얼굴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세레나 님은 모르고 드셨습니다. 해독제를 만드는 법은 알고 있었으나, 누군가 독을 탔다면 세레나 님이 무사하신 걸 보고 의심을 품을까 차마…….”
아드넬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간 잊었던 죄책감이 다시 몰려온 탓이다.
테시우스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알고 있는, 또 그동안 숨기고 있던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아드넬은 손을 들어 눈물을 슥 훔치고는 바스토르를 응시했다.
그는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생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그건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저주도 마찬가지다. 아드넬은 그와 관련된 게 없다 말했고, 실제로 테시우스의 병은 거의 치료되었어.’
정말로 아드넬이 고백한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면 세레나의 죽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이용해 아드넬을 죽이려 한 것이겠지, 하지만 왜?
기껏해야 화장품이나 만드는 아드넬을 죽여서 얻을 이득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테시우스가 처음 저주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어 얻을 이득이 뭔지 아무것도 짐작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조만간 큰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것.’
미수에 그친 살해, 제국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소문.
단순히 그 두 가지만 보더라도 모종의 무리가 움직이고 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바스토르는 생각을 정리하고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믿어 보지.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의심을 거둔 것도, 또한 아무런 처분이 없을 거란 것도 아니다.”
“……예.”
“별궁을 나갔다고 말해 놨다 하니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록 해. 그리고 테시우스.”
바스토르는 ‘처분’이라는 단어에 꿍해졌는지 샐쭉하게 저를 쳐다보는 테시우스를 향해 말했다.
“이번 사냥 대회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너와 내가 어떻게, 또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보여 줄 필요가 있어. 지금 수도에 도는 소문을 없애려면 눈으로 보여 주는 것뿐이다.”
“……크릉.”
“그럼 얘기는 다 한 줄로 알고 이만 가 보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풀리지 않던 의문점을 해결한 것만으로도 한결 머리가 가벼워졌다.
바스토르는 그대로 비밀 거처를 나서 본성으로 향했다.
전부 다는 안되더라도 아드넬과 관련된 것만큼은 호르세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건물 뒤편, 기척을 숨긴 채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게르펜 또한 바스토르가 사라지자 홀연히 후원을 벗어났다.
그로부터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사냥 대회 당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