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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01)화 (101/141)

101화

‘……어?’

입 안에서 느껴지는 다소 신선하고 낯선 맛, 그러나 결코 이상하지는 않았다.

바다 내음이 나긴 하지만 전혀 비리지 않았으며 식감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알싸하면서도 신 김치의 맛이 일품이었는데, 독특하긴 해도 어쩌면 밋밋할 수도 있는 미역국의 풍미를 최대로 끌어내 주었다.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음식은 없으리라 생각될 만큼 둘의 궁합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생각한 것 이상으로 괜찮다 보니, 테시우스는 일순 벙해져 두 눈을 끔벅거렸다.

“어때? 생각보다 맛있지?”

끄덕끄덕.

“역시 입에 맞을 줄 알았어.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아서 자주 해 먹는 음식이야.”

아드넬은 뿌듯하게 웃어 보이며 또 한 술을 크게 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후후 불어 식힌 뒤 내밀자 테시우스는 거리낌 없이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리들리가 만들어 준 건 다 못 먹겠는걸.’

처음엔 모양새 때문에 거부감이 들어 얼마 못 먹겠거니 했지만 막상 먹어 보니 되레 리들리의 음식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이 그릇을 완전히 비울 때까지 열심히 받아먹었다.

아주 많은 양은 아니라 배가 꽉 찬 건 아니지만 뜨끈한 국물에 쌀밥을 말아먹으니 속이 퍽 든든했다.

이후로는 아드넬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리고, 뒷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고서는 함께 거처를 나섰다.

리들리가 만들어 준 음식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였다.

‘역시 미로 같다, 외우기 어려워.’

테시우스야 늘 오가던 길이니 익숙했지만 처음 와 본 아드넬로선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사용인이 가져다 놓은 음식을 챙겨오려면 외워야 해서, 아드넬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는 길마다 기억하려 애썼다.

정자 뒤편에 도착했을 땐 늘 그랬듯 음식이 놓여 있었다.

이미 식어 버려 모락모락한 김이 피어오르진 않았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스테이크와 샐러드, 빵 등 알찬 구성의 음식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드넬은 미리 챙겨 온 그릇에 음식들을 챙겨 담고 테시우스와 함께 거처로 돌아갔다.

저녁때가 되면 식사를 가지고 온 사용인이 빈 그릇과 트레이를 도로 가지고 갈 터였다.

그렇게 또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복잡하던 길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졌다.

‘다음엔 나 혼자 가 봐야겠어.’

테시우스의 저주가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데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음식도 챙겨 와야 하니 한 번쯤은 저 혼자 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머지않아 거처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가져온 음식으로 한 차례 더 배를 채운 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몰려온 식곤증에 낮잠을 청했다.

그야말로 먹고 자고 쉬기만 하는, 완벽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늘 바빴던 아드넬이 처음으로 갖는 휴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그녀의 뒤를 캐는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 *

“아드넬 님 말씀이신가요?”

“하시는 사업 때문에 잠깐 별궁을 나가셨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일주일쯤…….”

“2황자 전하께서도 때마침 자리를 비우셨고요.”

“아, 후원에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 출입금지령을 내리셨거든요.”

아드넬의 행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확히 어딜 갔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고 하니 저들의 계획을 눈치채고서 몸을 피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여기에 테시우스도 함께 사라졌다고.

‘아마 다시금 짐승으로 변했을 테지.’

느지막한 오후,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남자는 수하가 가져온 정보들을 바탕으로 짐작했다.

테시우스가 매년 이맘때쯤 사라진다는 건 익히 알려졌으나 그게 저주 때문이라는 건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저주를 걸게 만든 장본인인 그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사내는 “흐음…….” 하며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좀 걸리는군. 나갔다고는 하는데 정작 나가는 걸 본 사람은 없다 하니.’

2황자가 사라지면서 후원에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는 건 테시우스가 후원에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드넬은 아니었다.

사용인들은 다들 그녀가 나갔다고들 말했지만 나간 걸 본 사람도 없을뿐더러 이날 별궁 밖으로 나간 마차 또한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아마도 별궁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것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꽤 으슥한 곳일 터.

때마침 테시우스도 자리를 비웠다.

그렇다면…….

‘혹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가?’

사내는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드넬은 대외적으로 남자라 알려져 있으나 실은 남장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간 치료 때문에 계속 붙어 있었던 사람이니만큼 어쩌면 테시우스는 이미 그녀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두 사람이 지금 함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어쩌면 눈이 맞은 걸 수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함께 있을 이유는 그뿐이니.

뭐, 눈이 맞았든 아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드넬이 가지고 있는 목걸이니까.

‘아마도 가지고 간 듯한데.’

마녀의 능력을 사용했다는 건 그 목걸이의 가치를 안다는 것과 마찬가지, 그런 목걸이를 두고 갈 리가.

본래 계획은 그녀를 제거하고 목걸이를 찾아 세레나에게 주는 것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곧 자리를 비울 테니 그때를 노려야겠군.’

하지만 그 전에 정말로 둘이 함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의 짐작이 틀렸다면 아드넬의 행방을 찾아야 할 테고.

“게르펜.”

“명하십시오.”

사내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남자가 나와 깍듯이 허리를 숙여 보이며 답했다.

“오늘 밤, 별궁 후원에 잠입해라. 테시우스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기척을 완전히 숨기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지 아니면 혼자 있는지 확인하고 오도록.”

“존명!”

명을 내리기 무섭게 남자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타고난 암살자인 게르펜은 사내의 충견이자 유일하게 믿는 심복이었다.

어젯밤 아드넬을 제거하라 보낸 수하도 바로 그였다.

‘그럼 느긋하게 기다려 볼까.’

사내의 주름진 얼굴 위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게르펜이 출입 금지령이 내려진 별궁 후원에 도착한 건 이날 늦은 밤이었다.

* * *

별궁에 잠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드나드는 사용인이 많아 옷차림만 달리해도 근위병은 크게 확인하지 않고 넘어갔다.

세탁방 하녀부터 마구간을 관리하는 마부까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외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운 건 금지령이 내려진 후원에 몰래 잠입하는 것이나, 게르펜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일엔 도가 텄다.

그는 별궁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거의 오가지 않는 마구간 창고에 숨어 있다가 느지막한 밤이 되고서야 슬그머니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옷으로 중무장한 탓에 유일하게 가리지 않은 눈동자를 제외하면 무엇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게르펜은 은밀히, 그러나 빠르게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잔디가 짓밟히며 나는 사박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후원 입구를 지키는 근위병조차 없어 게르펜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후원에 잠입할 수 있었다.

물론 있다 한들 결과는 지금과 똑같았겠지만.

‘매 끼니 정자 뒤편에 식사를 가져다 놓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짐승으로 변한 2황자가 자주 드나드는 길도 그 근처에 있을 터다.

게르펜은 정자 근처에 우거지듯 자란 수풀을 유심히 살폈다.

예상대로 그 뒤에 발자국이 남은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인위적으로 낸 것이 아닌, 자주 오고 간 탓에 잡초가 자라지 않아 자연적으로 생긴 길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게르펜은 인기척을 완전히 감춘 채로 나무 사이 사이를 지나쳐 길을 따라갔다.

중간중간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잠깐 당황했지만, 그마저도 발자국의 흔적을 찾아 금세 옳은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후원 가장 깊숙한 곳, 테시우스의 비밀 거처.

은은한 조명이 새어 나오는 건축물은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하려 한 것인지 반쯤 땅속에 들어간 모양새였다.

게르펜은 숨을 죽인 채 흙먼지가 내려앉은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눈에 띄지 않게끔 몸은 숨겼으나 귀는 쫑긋 세운 채로, 불빛과 함께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니까 여기서 이 카드를 발견하면 종을 누르는 거야. 알겠지?”

“크릉!”

“그럼 시작한다.”

다소 어리면서도 중성적인 목소리와 짐승의 그르렁거림.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폐하의 짐작이 맞으셨다.’

게르펜은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몰래 훔쳐보았다.

역시나, 그가 찾아갔던 침실의 주인과 흑표범으로 변한 2황자가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채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엔 카드 뭉치와 종이 놓여 있었다.

아드넬이 두 개로 나누어진 카드 뭉치의 가장 첫 장을 동시에 뒤집어 내려놓으면 둘 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테시우스가 빨랐다.

“……나보다 먼저 눈 뜬 거 아니지?”

“캉!”

2황자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격하게 부정했다.

아드넬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응시하더니 곧 “알았어. 그러면 다시 할게.” 하곤 도로 눈을 감았다.

마찬가지로 테시우스도 눈을 감았다가 아드넬이 탁하며 카드를 내려놓으면 다시 뜨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게임을 하는 모양이라, 게르펜이 생각한 그때였다.

‘……인기척!’

저 멀리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게르펜은 재빠르게 건축물 뒤로 몸을 숨겼다.

시간이 갈수록 터벅터벅하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달칵 문이 열린 순간, 게르펜은 다시금 숨죽인 채로 창문 너머를 살폈다.

‘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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