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황제 폐하라니.
그가 몸으로까지 번진 마음의 병으로 앓아누웠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황태자 바스토르가 황제 대리로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황제라니?
듣고도 믿기 어려운 말에 제이든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며,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가 긴장감으로 주먹을 움켜쥔 순간 사내가 덧붙였다.
“보신 바와 같이 목표물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우리의 계획을 알아챘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만 철수하도록. 행방과 관련해선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존명!”
지극히 깍듯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아까 꺼낸 무언가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더니 들춰 본 적이 없던 것처럼 이불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대로 떠날 줄로 알았는데, 그는 무언가 발견한 듯 손을 뻗었다.
다름 아닌 제이든이 협탁 위에 올려 둔 편지였다.
남자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낸 뒤 테라스 앞에서 내용을 읽었다.
모든 내용을 확인하고선 편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침대와 소파 아래는 물론이고 책상과 서랍, 물건을 숨기기 좋아 보이는 곳이라면 빠짐없이 살폈다.
커튼 뒤에 숨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들켰을 터였다.
그러나 제이든은 기척을 숨기는 데엔 익숙했고, 끝내 그를 발견하지 못한 암살자는 저가 찾는 게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용히 테라스로 나갔다.
어둠처럼 은밀하고 바람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의 기척이 어느 정도 멀어지고서야 제이든은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불안과 혼란으로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들은 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암살자와 대화를 나눈 목소리는 중년 남성의 것이었다.
그러나 앓아누운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목소리기도 했다.
이해되지 않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황제가 아드넬을 노리지?’
오히려 제 아들을 치료해 줬으니 상을 줘도 모자랄 판인데,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려 한다는 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암살자가 내뱉은 ‘황제’라는 호칭을 간과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는 떠날 수 없어.’
아드넬이 위험해 처했다, 그것만으로도 떠나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때마침 암살자는 그의 편지를 읽었다.
늘 아드넬의 옆에 붙어 있던 사람이 떠난 줄로만 알고 있을 테니 제 존재는 그들에게서 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움직이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백분 활용해야만 했다.
제이든은 협탁 위에 내려놓은 편지를 도로 챙기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누구인지 모를 이들뿐만 아니라 제 얼굴을 아는 사람 모두 그가 떠났다고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저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하지만 아드넬을 지키는 것만큼은…….’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숨 쉬듯 당연한 그의 일이었다.
너에게만큼은 어떠한 해도 가지 않게 해 줄게.
제이든은 굳게 다짐하며 침실을 나섰다.
아드넬이 그가 사라진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의 일이었고, 당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 * *
다음날, 테시우스와 함께 잠든 아드넬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부스스 눈을 떴다.
워낙 늦은 시각에 잠든지라 일어난 시간도 늦었다.
이렇게 늘어지게 자 본 게 얼마 만이더라, 아드넬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제 잘 땐 분명 다리를 베고 잤는데 일어나 보니 테시우스는 발라당 배를 깐 채로 옆에 늘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잠버릇이 꽤 고약한 모양이었다.
아드넬은 아직 깨지 않은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이곳엔 그녀가 만든 세안 화장품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바스토르만 사용할 테니 당연할지도.
그렇게 상쾌하게 씻고 나와서는 곧장 프리지부터 살폈다.
점심때인 만큼 퍽 허기가 진 탓이다.
하지만 프리지 안에는 빵과 치즈, 사과로 만든 음료수와 와인밖에 없었다.
‘역시 챙겨 오길 잘했어.’
사실 아드넬은 어젯밤 테시우스의 비밀 거처로 오면서 가방도 가져왔다.
짬짬이 적어 만든 천연 화장품 레시피 북은 물론이고 당장 쓸 수 있는 묵직한 현금과 제일 중요한 엄마의 목걸이까지 들어 있는, 이공간 마법이 걸린 가방이 그것이었다.
아드넬의 모든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오면서 여기에 뭘 더 넣어왔는데, 다름 아닌 이동식 화구와 몇 가지 음식 재료였다.
사용인이 가져오는 식사가 1인분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넬은 가방에서 화구를 비롯한 나머지를 하나하나 꺼냈다.
손잡이가 달린 냄비와 나무로 만든 식기류, 쌀과 소금, 말린 미역과 멸치 등이 그것이었다.
냉장 보관을 하지 않아도 되면서 보존 기간이 오래 가는 것들로만 추려 왔다.
‘아무래도 양식이겠지?’
사용인이 가져다 놓을 식사는 리들리가 만들었을 테니 아마도 수프나 스테이크 같은 양식 종류일 것 같았다.
아드넬도 한동안 양식만 먹었다 보니 조금 물려서 오늘은 미역국을 끓일 생각이었다.
빈 냄비에 자른 미역을 넣어 불리는 동안 다른 냄비엔 말린 다시마와 멸치를 넣어 육수를 우려내고, 미역이 적당히 불었을 땐 나무 그릇에 옮겨 담고 쌀을 씻어 불렸다.
냄비가 두 개밖에 없어 요리하기에 퍽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크릉…….”
그때 테시우스가 다소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더니 곧 벌떡 하고 몸을 바로 세웠다.
저가 어떤 자세로 잠들었는지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설마…….’
고개를 돌리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아드넬이 보였다.
한편 하루 새에 반말에 익숙해진 그녀는 테시우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친근하게 말했다.
“잘 잤어? 어제 엄청 피곤했나 봐, 꼭 사람처럼 누워서 자던데.”
“…….”
이런 젠장!
테시우스는 창피함으로 얼굴을 물들이며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물론 검은 털로 뒤덮여 보이지 않을 테지만 하필이면 잠들어도 그런 수치스러운 자세로 잠들다니!
아드넬이 저를 어찌 보았을지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테시우스는 황급히 욕실로 달려가 앞발을 세면대에 올린 뒤 두 발로 일어섰다.
혹시 눈곱은 끼지 않았나 일단 얼굴부터 확인하곤, 물을 틀어 대충 고양이 세수만 한 뒤 사뭇 태연한 걸음걸이로 돌아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척일 뿐, 심장은 여전히 콩닥대고 있었다.
‘그런데 뭘 만드는 거지?’
책만 놓여 있던 테이블엔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 올라가 있었다.
뭔가 굉장히 미끌거려 보이는 해초 같은 것이 담긴 그릇과 새끼손가락만 한 생선이 둥둥 떠다니는 물이며, 눈에 익숙한 것이라곤 소금과 후추뿐이었다.
테시우스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켜보자 아드넬이 웃으며 말했다.
“다 처음 보는 것들이지? 음, 간단하게 설명해 주자면 바다에서 나는 해초류로 만든 수프야. 지금은 낯설 테지만 식감도 나쁘지 않고 맛도 무척 깊어. 의외로 입에 맞을걸?”
“킁…….”
아드넬의 말에도 테시우스는 못 미덥다는 듯 콧등을 씰룩였다.
물론 여태 그녀가 만들어 준 음식은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8년 전에 먹어 본 계란밥도 그렇고, 삼겹살도 그렇고, 빨갛게 절인 배추를 구운 것도 이젠 퍽 입에 맞았다.
하지만 해초라니!
대체 왜 파도에 떠밀려 오는 해초를 요리해서 먹는단 말인가?
테시우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아드넬을 믿고 싶지만 눈으로 보이는 모양새가 일단 거부감부터 일으켰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 할 자격은 없으니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아드넬은 육수가 끓어오르자 그동안 불린 쌀을 화구 위로 올려 밥부터 지었다.
그사이 육수는 다른 곳에 보관해야 해서 그릇이란 그릇은 다 꺼내 나눠 붓고 빈 냄비에 불린 미역을 볶는 수밖에 없었다.
간장과 참기름, 소금과 후추를 적당량 넣어 함께 볶은 미역의 물기가 거의 사라질 즈음 다시마와 멸치를 걸러 낸 육수를 부었다.
미역국은 이대로 팔팔 끓이기만 하면 되었다.
“난 설거지 좀 하고 올게.”
자고로 요리의 끝은 깔끔한 뒷마무리였다.
아드넬이 사용했던 그릇들을 가지고 욕실로 가자 테시우스는 목을 앞으로 쭉 빼며 탐탁잖은 눈으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진짜……. 이상해.’
녹색 해초 스튜.
테시우스의 머릿속 미역국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정말 먹어야만 하는 걸까, 예전에 진흙 같은 걸 넣은 스튜도 꼭 한번 먹어 보라고 말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았다.
다가올 그때가 두렵기까지 한데 아드넬은 금세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와선 끓고 있는 미역국을 보며 “음, 이제 먹어도 될 것 같아!” 하고 말했다.
짐승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꼼짝없이 들켰을 터다.
아드넬은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움푹한 그릇에 미역국을 적당량을 푸고 여기에 밥을 넣어 말았다.
‘미역국엔 김치를 빼놓을 수 없지!’
김치는 냉장 보관을 해야 해서 가져오지 않을까 했지만 한 끼 정도 먹을 양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챙겨 왔다.
아드넬은 나무로 만든 용기를 단단히 동여맨 끈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김치 특유의 알싸하고 신 냄새가 훅 풍기며, 그와 동시에 테시우스의 콧등 또한 잔뜩 찌푸려졌다.
“후우, 후……. 자, 얼른 먹어 봐.”
움찔.
아드넬은 미역국에 밥을 잘 풀어 만 뒤 김치 한 조각을 올려 후후 불어 식히곤 테시우스에게 내밀었는데, 모양새가 원체 거부감이 들다 보니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고 말았다.
그 모습에 아드넬의 얼굴 위로 서운함이 어렸다.
“정말 안 먹을 거야?”
“…….”
“자는 동안 열심히 만들었는데……. 맛이라도 한 번 봐 주지…….”
비죽 나온 입술, 힘없이 처진 눈썹, 실망 어린 눈동자.
누가 봐도 섭섭해하는 얼굴이었다.
‘……사랑이 뭔지…….’
결국 테시우스는 체념하듯 눈을 감고 입을 쩍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입 안에 녹색 해초 스튜가 들어온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