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희끄무레한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새벽녘, 아드넬은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쓴 채 연신 주변을 살피며 후원으로 향했다.
늦은 밤도 이른 아침도 아닌 어중간한 시각이라 지금 깨어 있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방이 고요해서인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사박대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뭔가 무섭기도 하고…….’
안개로 자욱한 탓에 시야도 그리 밝지 않아, 아드넬은 행여나 넘어져 소리라도 칠까 발만 보고 걸어야 했다.
그러다 정자를 발견했을 즈음엔 후다닥 달려가 뒤편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엔 꽤 무성해서 길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나,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니 테시우스의 말대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인위적으로 낸 길이 아닌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생긴 길이었는데, 초입부는 큼직한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수히 찍힌 짐승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아드넬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안고 조심스레 길을 따라 들어갔다.
분명 미리 나와 있겠다고 했는데, 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크릉…….”
낮은 짐승의 목 울림은 테시우스의 본래 목소리만큼이나 귀에 익은 것이었다.
아드넬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리자 나무 사이로 크고 검은 체구가 드러났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도 일렁이는 금안만큼은 확연하게 보였다.
“전하……!”
지금은 테오의 모습이지만 이젠 그가 테시우스라는 걸 알아서인지 익숙한 호칭이 튀어나왔다.
아드넬은 냉큼 달려가 목부터 끌어안았다.
보드라운 털의 감촉과 맞닿은 피부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그르렁거림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테시우스는 뭐가 불만인 건지 그르렁거리면서도 콧등을 씰룩이며 외쳤다.
“컹!”
“어……. 왜 그러세요?”
도리도리.
테시우스는 격하게 고개를 젓더니 발톱을 들어 흙바닥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테오’였다.
“테오로 불러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크릉……!”
그게 아니라는 듯 테시우스는 이름 옆에 ‘반말’ 또한 적었다.
그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현실을 잊었으면.’
8년 전 오롯이 둘만 함께하던 그때처럼, 일주일밖에 안 되는 시간이더라도 그동안만큼은 아드넬이 편안했으면 했다.
적어도 그가 테오의 모습일 때는 친근하기 그지없으니.
하지만 아드넬은 퍽 난감했다.
예전에 후원에서 짐승의 모습이던 테시우스를 마주했을 땐 그저 ‘테오’라고만 생각해서 반말부터 튀어나왔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아는지라, 그때처럼 편하게 말을 놓기가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지금은 2황자 전하시란 걸 아는데…….”
“크앙!”
테시우스는 아드넬이 존댓말을 쓸 때마다 앙칼지게 외치며 계속 고집을 부렸다.
작은 실랑이는 계속 이어져, 이대로는 날이 새도록 못 갈 것 같아 결국 아드넬이 먼저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 비밀 거처라는 곳은 어떻게 생겼습……. 아니, 어떻게 생겼……어?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그간 원체 깍듯이 대하다 보니 반말이 퍽 어색했지만, 테시우스는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아드넬의 옆에 찰싹 붙고는 꼬리로 허리를 감쌌다.
딱 붙어서 따라오라는 의미가 다분한 몸짓에 아드넬은 풋 하고 작게 웃으며 그의 등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럼 가요. 아니, 가자.”
“크릉!”
테시우스가 앞장서 성큼성큼 익숙한 길을 따라 들어갔다.
이따금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얼핏 미로를 탐험하는 기분도 들었다.
홀로 들어왔더라면 여지없이 길을 잃었을 테지만 테시우스가 옆에 있다 보니 무섭긴커녕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드넬은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꽤 번듯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높이가 무척 낮았는데, 땅굴을 파서 만든 것처럼 입구가 지하에 있었고 건물 자체는 지면 위로 반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뭔가 반지하를 보는 기분인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더라도 퍽 작았다.
새어 나오는 불빛이 없었더라면 쉬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테시우스가 문손잡이를 앞발로 내리고 들어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은 내부는 마력으로 유지되는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그의 커다란 체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큰 침대와 번듯한 소파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는 프리지까지 구비되어 있었는데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테오의 모습으로 발톱만 세우면 얼마든지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욕실까지 있잖아?’
설마 하긴 했는데 닫혀 있는 문을 열어 보니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와 세면대까지 없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건 테오가 쓰기엔 불편할 높이인데, 아드넬이 테시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세면대도 전하……. 테오가 사용하는 거야?”
도리도리.
“그럼 소파는?”
테시우스는 고개를 돌려 황성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사실 그쪽이 어느 쪽인지 아드넬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작게 난 창문 쪽을 바라보는 모습에 ‘혹시 다른 사람이 온다는 건가?’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여기에 올 만한 사람이라면……. 역시 황태자 전하뿐인가?”
끄덕끄덕.
“아하, 어쩐지. 테오가 쓰기엔 너무 높다 싶었어. 테이블에 책까지 있어서 뭔가 했지 뭐야.”
하기야 아무리 일주일이래도 잘 지내고 있는지 저라도 한 번쯤은 와서 들여다볼 것 같았다.
한편 아드넬이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테시우스는 침대 아래 매트에 연신 발을 문질렀다.
발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욕조에 달린 수도꼭지를 눌러 물을 틀고는 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씻은 뒤 “크릉!” 하며 아드넬을 불렀다.
“응? 왜 그러……. 어, 발이 젖었네.”
보송보송해야 할 털은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테시우스는 얌전히 앉은 채 한쪽 앞발을 보여 주듯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너무 귀여워서, 아드넬은 그만 저도 모르게 “착하다, 혼자 발도 닦고.” 하며 테시우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컹?”
“어……. 그러니까, 그, 의도한 건 아니고 그냥 귀여워서…….”
“…….”
아드넬은 당황해 변명하며 말을 더듬었다.
‘역시 테오의 모습일 때는 평소 전하의 모습과 잘 겹쳐 보이지가 않는단 말이지.’
바뀐 모습에 적응하려 억지로 반말을 사용하다 보니 어느새 그가 8년 전 테오처럼 잘 훈련된 대형견처럼 보인 것이다.
덕분에 칭찬해 주듯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아드넬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아 주곤 욕실을 나왔다.
‘이제 뭘 해야 되지……?’
일단 오긴 했는데 막상 오고 나니 일주일간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조금 막막해졌다.
델리움에서야 원체 할 일이 많았다 보니 이것저것 하다 보면 금세 시간이 갔지만 여기선 그럴 수 없었다.
아드넬이 난감한 얼굴로 서 있자 테시우스는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침대 위로 훌쩍 올라갔다.
“크릉!”
“어? 왜 그래?”
툭툭.
테시우스는 어서 올라오라는 듯 자신의 옆 빈자리를 꼬리로 가볍게 내리쳤다.
그 모습에 아드넬은 잠시 흠칫했으나, 지금은 사람의 모습도 아니고 몰래 오느라 밤도 꼬박 새운 탓에 꽤 피곤했다.
일단 눈부터 붙이고 생각하지 뭐.
아드넬은 순순히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리를 쭉 펴고 앉자, 테시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허벅지 위로 얼굴을 내려놓으며 누웠다.
‘……그래, 둘이 뭘 하느냐가 뭐가 중요하겠어.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아드넬은 살짝 웃으며 테시우스의 보드라운 털을 쓸어내렸다.
금세 그릉그릉하는 목 울림이 들려왔다.
밤을 새운 건 그 또한 마찬가지라,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잠이 솔솔 몰려왔다.
머지않아 아드넬도 꾸벅꾸벅 졸면서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 편안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별궁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드넬의 침실이었다.
* * *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은 비단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제이든은 몇 개 없는 짐을 챙겨 넣은 배낭을 멘 채, 주인 없는 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손에 들린 새하얀 편지를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떠나는 게 맞아.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아드넬을 위해서도…….’
아드넬은 새로 세운 공방들을 둘러보러 별궁을 나갔고, 필립은 곯아떨어졌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나 모두 제이든이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너는 내 편지를 읽고 과연 울까, 혹은 찾아 헤맬까.’
어느 쪽이든 간에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줬으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이기심을 이해해줬으면.
그리고…….
그와 함께 행복했으면.
제이든은 진심을 담아 아드넬의 침대 옆 협탁 위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씁쓸한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는 침실을 둘러보았다.
이것으로 모든 정리가 끝났다.
제이든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한 그때였다.
‘……살기!’
일순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전신이 경직되었다.
아드넬을 만나기 전부터 용병으로 있던 그다.
그동안 아무리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들 사람을 죽이려는 흉흉한 기운만큼은 잊을 수 없었다.
제이든은 황급히, 그러나 침착하게 몸을 숨겼다.
그가 침대 근처의 두꺼운 커튼 뒤로 들어가고 머지않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테라스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아까 느낀 것보다 훨씬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암살자인가?’
몸으로 느껴질 만큼 흉흉한 기운은 일개 시정 잡배에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사람을 수십 명은 죽였을, 살인에 최적화된 훈련을 받은 암살자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그런데 그런 자가 왜 아드넬의 침실을?
제이든은 최대한 숨을 죽이며 커튼을 조심스레, 그리고 아주 조금 걷었다.
그러자 정확히 침대 앞에 서 있는 전신이 새카만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엔 실로 날카롭고 예리한 단도가 들려 있었다.
정확하게 급소만을 노릴 수 있게끔 만들어진 얇은 칼이었다.
저걸로 목이라도 찔렸다간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터다.
제이든은 소리 없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예고 없던 불청객은 침대의 이불을 확 들추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등을 지고 있어 무엇을 꺼냈는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들려왔다.
차갑고 예리한 칼만큼이나 서늘한 음성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내뱉은 말을 들은 순간, 제이든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벌어졌다.
“……송구합니다, 황제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