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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8)화 (98/141)

98화

한편 수도 평민 지구, 여관을 겸하는 선술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식 맛이 좋고 가격이 저렴해 추수제라는 큰 행사가 끝났음에도 사람이 많았다.

1층을 한가득 채운 테이블마다 옹기종기 모인 이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엔 아드넬도 있었다.

“카리아 상회에서 무슨 화장품을 새로 팔기 시작했다며?”

“이곳저곳 다 쓸 수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아드넬이 워낙 바쁜 탓에 근육통 연고 다음으로 선보이는 천연 바셀린은 클리프가 도맡기로 했다.

그녀가 화장품을 만들고 연회에 참석하는 동안 정식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추수제 동안 거리에선 천연 바셀린을 파는 가게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홍보 문구는 터무니없었다.

[거친 피부, 건조한 피부! 튼살과 갈라진 입술! 몸에 난 상처부터 작은 화상까지, 이것 하나면 모두 해결! 몸에 좋은 천연 재료로 만든 ‘바셀린’ 하나 어떠세요?]

화장품의 일종이라 하니 건조한 피부에 좋다는 건 납득이 가지만, 상처는 물론이고 화상에까지 두루 효과가 좋다 하니 그런 만병통치약이 어디 있냐는 반응도 당연히 나왔다.

하지만 일찍이 근육통 연고로 효과를 본 사람들은 이번에도 좋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하나씩 구매했다.

카리아 상회에서 선보이는 ‘마르타’라는 브랜드의 신뢰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렇게 처음 사용해 본 천연 바셀린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정말 신기한 게 매일 입술에 각질이 일었는데 싹 사라졌어.”

“우리 애는 허구한 날 다쳐서 오는데 발라 주고 나니까 흉도 잘 안 지지 뭐야?”

“나는 뒤꿈치가 갈라져서 발라 봤는데 이젠 이거 없으면 못 살겠어. 발이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피부에 발라도, 입술에 발라도, 상처에 발라도 좋은 천연 바셀린은 근육통 연고와 같은 가격인 2크라운 9페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평민도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했지만 용량도 꽤 넉넉했다.

이러하니 일찍이 써 본 사람이 안 써 본 사람에게 효과가 어떻느냔 질문을 받으면 열변을 토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일단 사! 그리고 써 봐!”

“그리고 이건 나도 들은 건데, 여럿이 모여 사면 더 싸게 살 수 있다더군. 대량으로 구매하면 수량에 따라 할인까지 해준다지 뭔가!”

“그렇게 좋은 물건을 3크라운도 안 되는 가격에 팔아 주는데 이 정도면 고맙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야.”

비싼 가격 탓에 피부 관리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평민에게 있어 천연 바셀린은 최고의 화장품이었다.

그렇게 한창 마르타와 천연 바셀린 이야기가 나오고, 시간이 흘러선 자연스레 화제가 넘어갔다.

근래 수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무슨 이상한 소문도 들리던데.”

“황태자 전하께서 2황자 전하를…….”

“이 사람, 말조심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까딱하다간 혀가 잘려 나갈 수도 있어.”

“하지만 말이야,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두 황자 전하의 우애가 얼마나 좋으신데 인제 와서 그러신단 말인가? 난 도저히 믿기지 않아.”

“……나도 처음엔 그랬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하나 걸리는 게 있더라고. 왜, 2황자 전하께서 후계자 수업을 포기하시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셨잖아.”

“그렇지?”

“이미 계승권을 포기하셨는데 왜 별궁으로 거처까지 옮기셨겠어? 우리들은 모르는 어떤 압박이 있던 것 아닐까?”

“어……. 그러고 보니…….”

“그리고 말이야, 내가 똑똑히 봤거든.”

둘러앉은 무리 중 한 남자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말했다.

“지난 무투회에서 2황자 전하가 얼마나 건재하신지는 다들 봤을 거야. 하지만 나는 운 좋게 황후 폐하가 앉은 자리 근처에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글쎄 황후 폐하께서 2황자 전하를 뭔가 탐탁잖은 눈으로 보시더군. 뭐랄까……. 굳이 표현하자면 굉장히 거슬려 한다는 느낌?”

“그야 계승권을 포기했어도 아직은 황태자 전하의 유일한 경쟁자이기도 하시니 그런 거겠지.”

“더구나 제 자식도 아닌데, 난 그건 이해가 가.”

“물론 나도 알지. 하지만 지금 소문이 돌잖아, 과연 그게 우연일까? 아무런 여지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소문이 돌겠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악의적으로 낸 소문일 수도 있잖아. 난 황태자 전하를 믿어.”

반응은 양방향으로 나누어져, 차기 황제로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황태자가 왜 인제 와서 2황자를 견제하느냔 쪽과 소문이 그냥 나는 건 아니니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확연히 갈렸다.

그리고 그 옆 테이블, 자리가 없어 합석한 남자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어, 형씨는 이제 가나?”

“예. 배가 불러서요.”

“조심히 들어가라고! 우리 같은 취객 조심하고 말이야.”

킥킥대는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남자는 그대로 선술집을 나왔다.

그리곤 마구간에 묶어 놓은 말고삐를 풀고 올라탔다.

그제야 사내는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어 넘겼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밀빛 머리와 호수같이 푸른 눈동자, 호르세였다.

‘이래서는…….’

그의 주름진 얼굴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이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으나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어 호르세는 착잡한 심정으로 말을 몰았다.

황성에 도착한 그는 곧장 황태자 집무실로 향했는데, 시각이 늦었음에도 바스토르는 여전히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황태자 전하, 로란트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바스토르의 보좌관인 파비오가 방문을 고하자 호르세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내디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나 다소 좋지 못한 표정에 바스토르의 미간 또한 덩달아 찌푸려졌다.

“소문의 근원지는?”

“그게……. 이미 다 죽었습니다.”

순간 바스토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동요로 일렁였다.

다 죽었다니, 그가 되묻자 호르세가 말했다.

“처음으로 말을 퍼트린 자를 찾았으나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소문, 처음 입 밖으로 내뱉은 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 두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트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져……. 손 쓰기가 어려울 정도로 소문이 불거진 상황입니다.”

제국 전역에서 동시에 시작된 헛소문을 잠재울 방도는 없었다.

황실 기사단이 주둔하는 수도 주점에서도 으레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니 어떻게 조치를 취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도 없고, 호르세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금언령을 내리심이 어떠할까요?”

“……그건 안 된다, 오히려 입 밖에 내지 말라 명했다가는 반발심만 일 거야. 되레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숨기려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바스토르는 “후우…….” 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곧 사냥 대회가 있으니, 그때 테시우스와의 우애가 돈독함을 보여 주면 돼.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 * *

그로부터 이틀 뒤, 아드넬은 펠릭스를 찾아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겠다는 말을 전했다.

대량 생산 사업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러 일주일간 다녀오겠다는 것이었는데 펠릭스는 테시우스의 허락만 받았다 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서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제이든과 필립이었다.

아드넬이 조만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을 하자마자 필립은 잔뜩 울상이 되고 말았다.

“꼭 가야 해? 아니, 그냥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미안. 그래도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클리프랑 동행할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냥 휴가다 생각하고 편히 쉬고 있어.”

그녀 혼자 먼 길을 보내는 게 못내 걱정된다는 듯 필립은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양심이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제이든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들을 뿐이었다.

필립이 따로 눈치를 주진 않았으나, 저 또한 전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만 놓아주어야 해.’

아드넬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완전히 마음을 접어야 했다.

필립의 말마따나 제 마음과 같길 강요하고, 저를 신경 써 줬으면 하는 생각에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큼 이기적인 행동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머리로 생각한 것과 감정은 달랐다.

이성적으로만 행동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드넬을 보노라면 자꾸만 욕심이 고개를 치켜들고 2황자를 보면 투기가 일었다.

결국 제이든은 결심하고 말았다.

‘그만 아드넬을……. 떠나야겠어.’

더는 고용주가 아닌 가족으로서 지냈으면 한다고, 그 진심 어린 말에 지금까지 함께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정말 가족인 건 아니었다.

이제는 용병이었던 시절로 돌아가 제이든이라는 사람으로서 새 인생을 살 때가 찾아온 것이다.

다만 아드넬에게 따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다고 하면 무척이나 섭섭해할 테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끝내 아드넬이 그의 의사를 받아들이고 보내 주면 되레 상처받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떠나면, 적어도 제 빈자리를 슬퍼하진 않을까 하는 상상의 여지 정도는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마지막 이기심이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어……? 으, 으응.”

한편 제이든이 필립처럼 걱정하는 것이 아닌, 순순히 다녀오라는 말을 하자 아드넬은 조금 당황했다.

평소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말을 얹었을 테니.

‘제이든도 이젠……. 조금 달라진 걸까?’

아드넬은 진심으로 그가 편해지길 바랐다.

언제까지고 응원하겠다는 그처럼, 그녀 또한 제이든이 이어질 수 없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하길 바랐다.

그렇기에 이러한 제이든의 모습이 조금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이젠 그도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딘 것 같아서.

“그럼 다녀올게. 일주일 뒤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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