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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7)화 (97/141)

97화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벌인 거냐!”

어두운 방,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분노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러나 맞은편에 선 세레나는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긴 손톱을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그냥 의심 사게 둘까요?”

“애초에 네가 그 아드넬이란 청년을 죽이려 들지만 않았어도……!”

“덕분에 제가 뭘 알아냈는지 모르시잖아요. 일단 들어보시면 잘했다고 되레 칭찬하실 텐데?”

세레나는 제 손톱을 마치 다듬듯 만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응접용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분히 권태로운 태도에 남자가 으득 이를 갈았으나, 암만 화내 봤자 제 손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말해 봐라, 만약 아무런 득도 없는 짓거리였다면 이번만큼은 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흐응, 과연 그럴까요?”

분기 어린 목소리에도 세레나는 되레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아드넬이라는 그 맹한 남자애, 사실은 힘을 숨기고 있었어요.”

“힘을 숨기다니?”

“저와 같은 힘이요. 마녀라는 소리예요.”

그 말에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청년이 갑자기 여자라도 됐다는 소리냐? 어디서 그런 씨알도 안 먹힐……!”

“왜 남자라고만 생각하세요? 애초에, 진짜 남자이긴 할까요?”

세레나는 빙빙 둘러 말하며 일부러 사내의 심기를 건드리더니 분노로 달아오른 얼굴이 터지기 직전이 되고서야 본론을 말했다.

“사실은 여자예요. 지금은 남장한 상태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뭐……?”

“제거할 생각이었던 건 맞아요. 그래서 일부러 재스민차를 먹였고, 샴페인에 엘루디아의 즙을 탔죠. 하지만 잔을 건넨 순간에 능력을 사용하는 걸 똑똑히 봤어요.”

원래 계획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저 또한 샴페인을 마시고, 돌아가서 해독제를 먹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몸에 독이 들어가는 이상 해독제를 먹어도 완전히 회복되긴 어렵다 보니 그간 꾸준히 독을 중화시키는 약도 복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샴페인을 건넸을 때 세레나는 아드넬이 사용한 능력을 확실하게 보았다.

육안으로 보이는 힘은 아니어도 같은 마녀끼리는 공기 중에 떠도는 기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세레나는 철저하게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었지만 아드넬은 아니었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즙이 들어간 걸 알고선 먹지 않더군요. 마녀의 능력이 없었다면 백이면 백, 모르고 먹었을 거예요.”

“아드넬, 그 청년이 여자였다니……. 심지어 마녀…….”

사내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벙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세레나는 낮게 코웃음 치며 덧붙였다.

“아직도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세요? 하나 더 있잖아요, 얼마 전 제게 알아보라 하신.”

“……아!”

“보나 마나 아드넬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찾아 헤맨, 그 목걸이 말이에요.”

얼굴을 어떻게 바꿨는지는 몰라도, 아드넬이 정말 마녀라면 목걸이 또한 그녀가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제야 뒤늦게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도 떠올랐다.

‘그 눈동자. 아드리아나의 것과 똑같아.’

유명한 휴양지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고스란히 담아 온 듯한 그 눈을 사내는 일찍이 보았다.

당시 아드리아나는 결혼한 상태도 아니었으니 설마하니 자식이 있을 거라곤 예상을 못한 데다, 아드넬을 만나긴 했으나 남자의 모습이어서 마녀인 아드리아나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드넬이 남장한 상태였고 마녀의 능력을 썼다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아드리아나가 목걸이를 가지고 도망쳤고, 제 딸에게 남장을 시킨 게 분명해. 그리고 목걸이가 그 자식에게 이어졌다는 건…….’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단 소리.

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목걸이를 누가 가지고 있느냐 뿐.

기대도 안 했는데 상상 이상의 정보를 물어 온 세레나가 퍽 기특하게 느껴질 정도라, 사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꽤 괜찮은 성과를 가져왔군. 하지만 네가 일을 그르친 건 변하지 않아, 다음 계획도 분명 있을 테지?”

본래 세레나에게 준 목표는 별궁에서 지내면서 목걸이를 찾아내고, 테시우스에게 건 주술의 지속력을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한 가지는 해결했으나 다른 하나는 하지 못했다.

세레나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니 별궁 어딘가에 있을 목걸이도 찾지 못할 터, 이에 따른 방안도 당연히 있어야 했다.

남자가 묻자 세레나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범한 한 마디를 꺼냈다.

“뭘 그리 고민하세요? 그냥 다 죽이면 되는 것을.”

“뭐?”

“우리의 원래 계획부터가 너무 복잡해요. 사람을 시켜 황후와 황태자가 2황자 전하를 시해하려 한다는 소문을 내고, 사냥 대회에서 2황자 전하가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난 순간 몰아가며 소문에 더욱 살을 붙인다. 마녀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를 내보이며 황태자를 끌어내리고 2황자 전하를 그 자리에 추대한다, 이거잖아요?”

“그런데?”

“목걸이도 누가 갖고 있는지 알아낸 마당에,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황좌를 차지하고 몰아내죠? 그러니까 쉬운 방법으로 가자는 거예요, 정확히는 곧 있을 사냥 대회에서.”

세레나는 요염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사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주름진 얼굴 위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확실히 일리가 있어, 과연 그 방법대로라면…….”

“지지부진한 과정은 모두 건너뛰고 우리가 바라는 걸 단숨에 가질 수 있는 것이죠.”

세레나 또한 씨익 웃어 보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추수제는 끝났고, 곧 사냥 대회가 시작된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올해 안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터다.

“그렇게 하지. 난 아드넬을 처리할 테니 너는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방금 말한 약부터 완성하도록.”

* * *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도 사냥 대회에 참석하시나요?”

며칠 뒤, 아드넬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아무리 죄책감에 시달린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고, 괴롭더라도 제 자리를 찾아가야만 한다는 건 물론 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세레나의 얼굴에 죄책감은 파도처럼 밀려와 홀로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곪아가는 마음은 그녀를 시름시름 앓게 만들었고, 이를 눈치챈 테시우스는 툭하면 아드넬을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참석은 하는데……. 조만간, 자리를 비울 거야.”

“네?”

“알다시피 내가 걸린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았어. 그리고 바뀌는 시기도 사냥 대회와 맞물리지.”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가을이 끝나가는 참이었다.

그 시기가 되면 테시우스는 또다시 흑표범으로 변할 것이고 자연히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걱정 마,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테니.”

“아…….”

“그래서 최근 자주 찾아온 거야. 테오의 모습도 좋다지만 그때는 이렇게 대화하긴 어려우니까.”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상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홀로 눈물 짓진 않을까, 한없이 자책하며 가슴 아파하진 않을까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출입금지령을 내리는데 아드넬만 후원에 들락날락하게 둘 수도 없다 보니 좀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테시우스는 염려를 담아 아드넬의 작은 손을 맞잡았다.

“진짜 싫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버티지?”

“전에는 잘하셨으면서…….”

“그래도,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견디기 힘들어져. 갑자기 보고 싶어 뛰쳐나갈까 봐 그것도 걱정이야.”

“…….”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걱정되는 건 아드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테시우스가 일부러 찾아와 함께 있어 주지만 밤중에 혼자 있노라면 세레나가 자꾸만 떠올라 괴로웠다.

외면할 수 없는 죄책감이란 건 알지만 그가 없으면 어떻게 버텨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테시우스가 문득 “저기, 있잖아…….” 하고 운을 떼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다 하고 같이……. 들어가면 어때?”

“네……? 저도 같이요?”

“뭐, 아드넬은 이것저것 하는 사업도 많고 하니 겸사겸사 둘러본다 말해 두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들어가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아…….”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아드넬은 생각에 잠겼으나 고민은 짧았다.

그만큼 홀로 있을 시간이 두려웠고, 간절하리만큼 누군가 옆에 있어 줬으면 했다.

그녀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테시우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 정말이지?”

“네. 괜찮을 것…… 같아요.”

“아드넬이랑 일주일을……. 단둘이…….”

다만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테시우스는 잠시간 멍해졌다.

그 모습에 아드넬은 어쩐지 민망해져 얼굴을 붉혔고, 테시우스가 그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너무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 아이도 아니고 세상에서 제일 좋을 건 뭐예요.”

“하지만 그게 아니고선 표현할 말이 달리 없는걸.”

정말 진심이라는 듯 그의 금안이 반짝였다.

다만 바뀔 때는 극심한 고통 또한 찾아오는지라, 그 모습까지 보여 주긴 싫었다.

‘괜히 걱정할 거야.’

걱정거리 하나를 더 안겨 주고 싶진 않으니 그건 숨겨야지.

테시우스는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럼 사흘 뒤에 찾아오도록 해. 아무도 깨지 않은 시각에 조용히, 후원 정자 뒤편 수풀 속으로 들어와 보면 작은 길이 나 있을 거야. 그 길을 따라 들어오면 내가 미리 나가 있을게.”

“그럴게요. 아, 펠릭스 님께도 미리 말을 해 두어야겠죠?”

“응, 혹시 모르니 조수들에게도 말해 둬. 행방을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네.”

바뀔 때는 좀 고통스럽겠지만, 그래도 아드넬과 오롯이 보내는 일주일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뭐든 다 참을 수 있었다.

짐승으로 바뀌는 저주조차 기다려질 만큼.

테시우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금 아드넬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작은 손을 맞잡은 채로, 내일 즈음 그녀 몰래 후원에 먼저 가 있을 생각을 하며.

물론 아드넬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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