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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5)화 (95/141)

95화

일순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심장이 쿵쿵거렸다.

묘한 위화감이 전신을 휘감더니 손끝으로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가 테시우스의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능력을 개방했을 때 느꼈던 압도적인 힘, 그것이 주던 압박감과 비슷했다.

그러나 동시에, 달랐다.

‘이게 뭐지?’

눈으로 봐선 알 수 없다.

그냥 일반적인 샴페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잔과 맞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분명 ‘위험’을 외치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라 하면 결코 할 수 없을, 어떤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본능은 아드넬의 의사와 상관없이 샴페인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쳤다.

잔과 맞닿은 손에서 흘러나온,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와 같은 힘이 노란 액체 속으로 스며들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식물과 그것들의 효능이 책장을 빠르게 넘기듯 차르륵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원하던 목차를 찾아 딱 멈춘 것처럼 생생한 이미지가 하나 떠올랐다.

‘……엘루디아의 즙?’

남부에서만 자라는 엘루디아는 진통제로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재스민차와 함께 복용하면 느리지만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점이었다.

두 가지 식물의 상성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아 실제로 모르고 먹었다가 사인도 밝히지 못한 채 죽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왜 진통제로 쓰는 엘루디아의 즙이 샴페인에 들어가 있지?

‘때마침 나는 오기 전에 재스민차를 마셨어.’

여느 때와 같이, 세레나와 함께.

특히 최근 들어서 자주.

아드넬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올라갔다.

이보다 더 빠르게 뛸 수 없을 만큼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하며, 어제 테시우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누군가 뒤쫓아왔고, 살기를 품고 있었고, 그리고 지금.

이 샴페인을 마셨다면 나는, 죽는다.

모든 상황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쨍한 이명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찬가지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세레나가 대뜸 아드넬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안 드시나요, 아드넬 님? 전 아드넬 님을 생각해서 가져온 건데…….”

“아……. 그게…….”

“……이렇게나 맛이 좋은데, 어서 드셔보세요.”

그리 말하며 세레나는 마치 시범을 보이듯 샴페인을 한 모금 넘겼다.

그 모습에 아드넬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세레나가 아닌 건가?’

조금 전 저도 모르게 사용한 능력은 세레나의 잔 또한 마찬가지로 엘루디아의 즙이 들어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와 함께 재스민차를 마셨다.

두 식물의 상성을 모른다는 소리였다.

자기가 죽을 걸 알고도 마실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세레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내게 원한을 품고 즙을 섞어 놓았을지도 몰라. 세레나는 내 시녀로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이용했을지도.’

다만 상황이 어떻든 간에 이 샴페인을 마실 수는 없었다.

해독제를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몸에 독이 퍼진 걸 치료하는 것보다 백배 좋은 건 애초에 독을 먹지 않는 것이다.

아드넬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감사하나 지금은 그닥 생각이 없군요. 나중에 목이 타면 그때 마시겠습니다.”

“……이런, 제가 때를 잘못 맞추었나 봐요.”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드넬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지만 아직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것이 독을 먹을 뻔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모습에 세레나는 가볍게 목례해 보인 다음 미련 없이 뒤돌아섰으나, 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한겨울 빙하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 * *

한편, 연회홀 중심부.

율리시아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아드넬이 있는 쪽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 율리시아는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까워서 쓰지 못할 만큼 고이 간직하던 아드넬의 향수를 쓰기로 일찍이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추수제를 준비하면서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책정된 예산 내에서만 사용해야 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디아나와 상의한 뒤 황후에게 최종 결재를 받아야 했다.

테마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장식품은 어떤 걸 사용할 것인지, 음식은 무엇을 준비할 것이며 그와 어울리는 디저트는 어떤 걸로 할 건지 등 연회 하나만 생각해도 할 일이 수십 개였다.

추수제가 시작되면 제공하는 무료 음식과 사탕을 위해 황실에서 국고를 풀면 어디서 나눠주고 인력은 어떻게 배치하고, 또 이에 따른 예산은 얼마나 배정할 것인지도 그녀와 디아나의 일이었다.

모두 처음 겪어 보는 일들이니만큼 율리시아는 지금도 많이 지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드넬이 만들어 준 향수는 사용법대로 그냥 한 번 슥 문지르기만 했을 뿐인데 시중에 나온 향수보다 훨씬 향이 연하면서 오래도록 지속됐다.

생화의 향기도 계속 맡으면 질리기 마련이건만 이 고체 형태의 향수는 맡으면 맡을수록 익숙해지고, 체취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덕분에 용기도 생겼다.

‘내가 찾아가면 분명 싫어하실 테지만…….’

미움받는 일은 익숙했다.

아버지에 비하면야 황태자가 보내는 서늘한 시선 정도는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 하나도 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드넬은 다른 영애와 계속 대화를 나누는 듯해 나중에 찾아가기로 하고, 율리시아는 바스토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는 잠시 오는 사람들을 물리고 앉아 쉬는 중이었는데 율리시아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하르트 공녀?”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산책을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전하?”

“산책이라…….”

바스토르는 잠시간 눈을 돌려 연회홀 내부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한 번 보는 순간 절로 지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작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황제 대리로서, 또한 황태자로서 이런 행사를 맡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진한 향수 냄새만큼은 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오죽하면 음식 냄새까지 묻힐 지경일까.

한 사람에게서 나는 향수만도 독한데 수십 명이 모이면 정말이지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코끝이 찡했다.

이런 때에 시원한 밤공기도 나쁘지 않겠지, 바스토르는 율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 함께 가지.”

“감사합니다, 전하.”

바스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율리시아는 그런 그의 손끝을 살짝 맞잡고 함께 연회홀을 나섰다.

들어오는 정문이 아닌, 홀 뒤편에 난 문으로 나가면 곧장 후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닫힌 문이 열리고 후원에 들어서자 서늘한 가을바람이 훙 불어오며 바스토르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에선 지금까지 코를 괴롭히던 향수 냄새가 아닌 완연한 가을의 냄새가 났다.

바스토르는 잠시간 눈을 감으며 상쾌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제야 어지럽던 모든 향이 말끔히 씻겨 사라진 듯했다.

‘편안하다.’

테라스에 난 창으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가, 걷노라면 사박사박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또 수풀과 가까워지면 찌르르 풀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별다른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바스토르는 알라니아의 간섭 때문에 아예 신경도 쓰고 싶지 않을 만큼 두 공녀의 존재 자체가 귀찮아서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으나 율리시아는 원래도 잔잔한 호수같이 조용한 사람이었다.

돌멩이를 던져도 잠깐 파동이 일 뿐, 금세 가라앉는 호수같이 고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둘 사이의 적막은 소슬했으나 동시에 편안했다.

어색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침묵이 아닌, 지친 심신을 달래는 침묵이었다.

“……좋군.”

한참을 그렇게 걷고서야 첫 마디가 나왔다.

바스토르였다.

연회홀에서 앉아서 쉬는 것보다 밖에 나와 산책하는 것이 훨씬 휴식에 가까웠다.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율리시아가 미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편안하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홀에 있다 보면 향이 원체 진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라. 마침 이런 시간이 필요했어.”

그러던 그때, 바스토르가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깜박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문득 떠오른 것이다.

‘왜 지금은 향수 냄새가 나질 않지?’

아무리 바람에 씻겨나간들 옆에 향수 범벅이 된 사람이 있으면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율리시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후로도 늘 향수를 뿌렸다.

그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실 모든 여자가 그랬다.

분명 그럴 터인데…….

‘생화같이 은은하고, 편안한 체취 같은 향기…….’

옆에 선 율리시아에게선 언젠가 한 번 맡아 본 것처럼 낯설지 않은 친숙한 꽃내음이 났다.

바스토르는 조금 놀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반대로 올려다보는 율리시아의 얼굴 위로 달빛이 어리며, 호수에 비친 초승달같이 부드럽게 휘어진 미소가 떠올랐다.

“저 또한 종종 그리 느끼곤 했습니다. 제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군.”

찬란한 달빛이 어려서일까, 아니면 보기 좋게 휘어진 아름다운 미소 때문일까.

바스토르는 일순 멍해져 단번에 답하지 못했다.

뭔가 기분도 조금 이상해졌다.

결국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보다 느리게, 구두를 신은 율리시아의 보폭에 맞춘 속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하고 편안한 가을 산책을 꽤 오래도록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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