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른 아침, 후작이 보낸 서신을 받은 세레나의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드디어 목걸이를 찾았어! 드디어 내 자리를 찾는 거야……!’
물론 지금 제 손에 있는 건 아니지만 이 황성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목걸이를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 얼마던가, 그런데 그게 무려 황성이 있다니!
목걸이는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외모의 여자가 차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별궁에서 일하는 사용인 중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이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본성은 후작의 사람이 따로 알아볼 테니 저는 별궁만 맡으면 되었다.
목걸이의 실물도 한 번 본 적이 있어 찾아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매듭도 조악하고 모양새도 볼품없으니 조금만 값을 쳐줘도 금방 넘길 거야.’
시장 바닥에서나 팔 법한 싸구려 목걸이를 소중하게 간직할 이유는 없으니까.
게다가 제국에 있는 마녀라곤 저뿐인데 목걸이의 진정한 힘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찾다가 들키더라도 값만 제대로 쳐주면 순순히 넘길 게 분명했다.
당장 오늘 밤, 아니.
사용인들이 교대로 식사하는 시간에 천천히 뒤져보면 될 것 같았다.
세레나는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아드넬의 침실로 향했다.
추수제도 코앞으로 다가와서인지 유독 기분이 좋았다.
‘추수제만 지나면 못 볼 얼굴이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참지.’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얼굴이래도 곧 죽을 사람이라면 참아 줄 수 있었다.
이윽고 침실에 도착한 세레나는 아드넬을 보고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뭔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어딘가 죽상이 되어 앉아 있던 것이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아드넬 님?”
물론 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순 없어, 세레나가 사뭇 걱정된단 얼굴로 묻자 아드넬은 그녀를 잠시간 쳐다보는 듯하더니 곧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니라는 의사 표현과 달리 표정은 근심스러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던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보지?
세레나는 눈치 없이 치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자제하며 말했다.
“따듯한 차를 드시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실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간 손수 차를 내리며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수고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세레나는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금세 침실을 나섰다.
그렇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아드넬은 기다렸다는 듯 “후우…….” 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레나가 짐작한 대로, 아드넬은 무척 근심스러웠다.
‘대체 누굴까…….’
행복하고 즐겁던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가져 본 여인으로서의 하루,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대뜸 테시우스가 이만 돌아가야겠다며 끌고 가더니 그대로 별궁에 돌아오고 말았다.
너무도 갑자기 데이트가 끝나 버린 것이다.
상황 자체도 이해하기 어려워, 별궁에 도착해 이유를 묻자 그는 예상치도 못한 답변을 돌려주었다.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어.’
그 말을 듣고 아드넬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저들은 마도구로 외모를 바꾼 상태였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었다.
누군가의 뒤를 쫓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외모가 바뀐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많아 보이는 차림도 아니었다.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커플이었다.
그럼 무엇을 보았기에 저들의 뒤를 밟는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목걸이 때문인가 하고 문득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제국에서 현존하는 마녀는 저뿐인 만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테시우스는 저들을 뒤따라오는 누군가에게서 미약한 살기가 느껴졌노라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편히 잠들 수 있을 리가, 결국 아드넬은 밤을 꼬박 새울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겠어.’
반지는 어제 테시우스에게 돌려주었고, 목걸이는 가방 깊은 곳에 도로 숨겨 넣었다.
이공간 마법이 걸려 있어 작정하고 뒤지지 않는 이상 찾기는 어려웠다.
마도구 덕에 얼굴은 알아보지 못할 테니 그냥 평소처럼만 행동할 생각이었다.
물론 긴장은 늦추지 말아야겠지만.
머지않아 세레나는 향긋한 재스민차를 들고 돌아왔다.
그래도 뜨듯한 차가 배 속에 들어가니 그녀의 말대로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대망의 추수제 연회 날이 되었다.
* * *
사실 아드넬은 연회 같은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세습되지 않는 남작위더라도 작위가 있어야지만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데, 작위가 없어도 참석할 수 있는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바로 초대장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드넬은 테시우스에게 초대장을 받았다.
‘이렇게나마 함께 있고 싶으신 거겠지.’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상황 자체가 사적인 만남을 갖기엔 어렵다 보니 이런 행사라도 있어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새로 맞춘 연회복을 입고 머리를 곱게 빗는 것으로 준비는 금세 끝나 아드넬은 곧장 본성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화려한 마차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아름답게 치장한 귀부인과 영애들이 하나둘씩 에스코트를 받아 내렸다.
그들처럼 높은 계단을 오르고, 입구 앞에서 초대장을 보여 주고, 연회홀에 들어가는 건 지난 연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아드넬이 홀에 들어선 순간 변화는 확연하게 다가왔다.
“요즘도 많이 바쁘신가요, 아드넬 님?”
“제가 주최하는 티 파티에 꼭 와 주셨으면 했는데. 못 오신다는 답변에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혹 언제쯤 시간이 나실까요?”
벨리페 후작 부인이 주최한 티 파티 참석 이후로 아드넬에겐 온갖 초대장이 쏟아졌다.
성의를 표현할 용도로 준비한 화장품 선물을 보고 난 뒤, 기약 없는 살롱 오픈을 기다리기 힘들었던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티 파티를 주최하며 초대한 것이다.
오죽 갖고 싶었으면 지금도 존칭까지 써 주며 얘기할까.
황태자와 황후, 그리고 테시우스가 도착했을 땐 잠시간 뿔뿔이 흩어지긴 했으나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고선 다시 우르르 몰려왔다.
인파 속에 갇힌 아드넬은 비질 진땀을 흘리며 사정을 설명했지만 화장품에 대한 얘기가 길어질수록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정말이지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제발 누구든 날 좀 구해 줬으면, 아드넬이 간절히 바라던 그때.
“아드넬,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도록.”
“……예!”
이번에도 테시우스가 혜성같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 주었다.
그는 줄곧 상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드넬을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부러 내려온 것이다.
계속 날 보고 있었구나, 아드넬은 조금 감동해 기쁜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자리로 이동하고서야 아드넬은 대놓고 “후우…….” 하며 참았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덕분에 살 것 같아요.”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오늘은 초대받아 온 손님이니만큼 편히 있어도 돼. 아, 먹을 걸 좀 가져다줄까?”
“예? 아,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어떻게 전하께서 제 걸…….”
“별일도 아닌 걸, 금방 다녀올게.”
마음 같아선 이마에 가볍게나마 입 맞추고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테시우스는 편히 앉아 쉬라며 소파를 가리키고는 냉큼 음식이 한가득 올라간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그럼 나도 조금 쉬어 볼까, 아드넬은 푹신한 소파에 털썩 몸을 맡겼다.
“……아드넬 님!”
이제 막 앉은 참인데 하이 톤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오늘 무슨 날인가, 왜 다들 날 가만히 두질 않지?’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무척 피로해졌다.
평소였다면 어떻게든 감췄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정말 그러기가 싫었다.
아드넬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 님.”
“다른 영애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에 아드넬 님이 여기 계신 게 보이지 뭐예요. 아, 여기 한 잔 받으세요. 아까 마셔 보았는데 맛이 아주 좋아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귀찮기 그지없는 세레나였다.
그녀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런 대연회에 초대받긴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초대를 받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치장도 평소와는 남달랐다.
일부러 머리 색과 맞춘 것인지 분홍색 드레스는 풍성하기 그지없었고 프릴도 잔뜩 달려 있었다.
귀에는 루비로 만든 귀걸이를, 목에는 진주를 알알이 꿴 목걸이를, 손가락엔 백금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치스럽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차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돌아가라 할 수도 없고, 샴페인 한 잔 정도는 받아 줄 수 있어 아드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샴페인은 꿀과 황금을 섞은 것처럼 은은하고 영롱한 노란색이었는데 보글보글한 작은 기포들이 연신 올라오고 있었다.
아드넬이 팔을 뻗어 세레나가 내민 잔을 받아 든 순간이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