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3)화 (93/141)

93화

“세상에는 수많은 연이 있다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게 인연이라지. 나의 님은 어디 있을까 하염없이 찾아 헤매고, 때론 눈물지어도, 언제고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연이라지. 그리 찾은 나의 사람, 나의 소중한 사람. 나는 그대를 만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 숨 쉬었나 보오. 어렵게 찾은 나의 사람, 나의 소중한 사람. 신이 주신 목소리를 빌어 그대를 사랑하노라 수줍게 내뱉어 보오…….”

“아…….”

“아드……. 아실라?”

그런데 노래를 듣는 중 아드넬의 눈가에 뜨듯한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그 모습에 테시우스가 놀라 부르자 그녀는 냉큼 눈물을 훔쳤지만 눈시울은 감동으로 이미 붉어진 후였다.

“이런 노래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응? 제국에선 꽤 유명한 사랑 노래인데…….”

테시우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지만 아드넬은 감동에 젖어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마따나 제국에선 꽤 유명해 아드넬도 이미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노래였다.

문장 자체는 간결하고 가사도 퍽 단조로운, 그리 거창하진 않은 노래.

그러나 어딘가 달랐다.

정확히는 분수가에 앉은 사내의 목소리가 달랐다.

청량한 칼림바 연주와 정말이지 완벽하게 들어맞는 음색, 그러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진심이 가사 하나하나에 새겨진 듯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듯 부르는 목소리는 애절하고 아름다웠으며 한 소절을 내뱉을 때마다 바뀌는 미세한 표정 변화가 감동을 더했다.

누군가의 영혼이 담긴 공연을 본 적이 있느냐 묻는다면 단연 지금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 느낀 건 비단 그녀만이 아닌 듯 웅성거리는 인파 속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은 금방 찾아볼 수 있었다.

아드넬은 진심으로 감격해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구보다도 열심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런 노래를 들었는데 아까 낸 팁이 터무니없이 적게 느껴져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 더 넣고 돌아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공연히 완전히 끝나기 전까진 자리를 뜰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귓가에 대고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하며 속삭인 뒤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디 가실 곳이 있느냐 되묻고 싶었지만 다시금 칼림바 연주가 시작되고 나니 저도 모르게 분수대 쪽을 바라보게 되어 테시우스의 부재는 금세 잊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두 곡이 끝나갈 즈음 다시 돌아왔다.

“잠깐 여기 좀 봐 봐.”

“네?”

테시우스는 등 뒤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아드넬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어서 눈을 감아 보라며 채근한 탓에 얌전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머리 위에 닿은 가벼운 손길.

잠깐 닿았다가 떨어진 탓에 뭘 한 건지 알 수 없어 아드넬은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손끝에 싱그럽고 촉촉한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다름 아닌 화관으로, 거리에서 여자들이 흔히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테시우스도 이를 하나 사 온 것이다.

“아, 예쁘다.”

저가 씌워 주고서도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는 듯 테시우스는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웃어 보였다.

덕분에 아드넬의 얼굴은 화악 달아오르고 말았다.

“뭐, 뭐예요, 갑자기.”

“갑자기라니. 항상 이렇게 예뻤는걸.”

“그, 그만 해요. 여기 사람도 많은데 자꾸 그런 남부끄러운 말…….”

“부끄럽기는? 매일 해 줘도 모자란 말인데. 예뻐. 예뻐 죽겠어, 아주.”

테시우스는 달아오른 뺨을 손가락으로 쿡 누르며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한창 좋을 때라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드넬의 얼굴은 전보다 더 붉게 변하고 말았다.

“이만 가요……!”

결국 남은 공연은 더 감상하지도 못한 채, 아드넬은 황급히 테시우스의 손을 잡아끌고 도망치듯 인파 속에서 빠져나왔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인데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 더 놀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화를 낼 것 같아 테시우스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오늘 수도 거리에 나와 무얼 했냐 묻는다면 대답할 건 딱히 없었다.

그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가판대를 구경하고, 즉석 공연을 감상하는 것 정도로 이렇다 할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시우스는 행복했다.

아드넬과 무슨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는 웃는 낯으로 그녀를 따라가면서도 행여나 놓칠까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나 둥실둥실한 기분은 잠깐 새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테시우스가 아드넬을 따라가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춰선 때였다.

‘……뭐지?’

짐승적인 본능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테시우스는 순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곤두선 전신의 감각이 명백한 살기를 감지했다.

누군가, 그들을 뒤따라오고 있었다.

‘인기척을 알아내기는 어려워. 하지만 분명 우리의 뒤를 밟고 있다.’

반면 테시우스가 갑자기 멈춰서자 아드넬은 그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웃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표정 또한 심상치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 무슨 일이라도…….”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어서 가자.”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어깨를 마치 감싸듯 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그녀가 “어어.” 하며 황급히 따라갔지만 조금 버거울 정도의 속도였다.

‘갑자기 왜 그러시지?’

아드넬은 덩달아 불안해지고 말았다.

살짝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크게 이상한 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표정이 원체 심상치 않아 아드넬은 잠자코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공공 마차 보관소에 도착하자 테시우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곧장 별궁으로 출발했다.

뒤따라오던 인기척은 근위병이 지키고 선 성문을 통과하고서야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홀연히 사라졌다.

* * *

늦은 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이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엔 중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대체 누구지?’

남자는 초조한 듯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오늘 전혀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긴 했으나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였다.

그러니까 대략 이십여 년 전, 그가 ‘비기’와 함께 받아 낸 목걸이는 가짜였다.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날뛰었는지, 그러나 목걸이를 준 사람은 이미 죽었고 타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길은 없었다.

그동안 계획은 뒤로 미뤄지고, 또 미뤄지며 종래에는 예정에도 없던 계집애를 데려와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목걸이는 찾을 수 없었다.

반역자의 딸이 도망쳐 봐야 어디까지 가겠나 했지만 정말이지 꼭꼭 숨어 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원체 외모가 화려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찾아내면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린 이후라 또다시 찾아 헤매야 했다.

그렇게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허비했는데 이제 황태자는 황태자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황제도 곧 숨을 거둘 테니 바스토르가 황제가 될 날도 머지않았다.

때문에 목걸이를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그땐 손꼽아 기다린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날려 버릴 테니까.

그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오늘, 그의 심복이 목걸이를 찬 여자를 발견했다.

수하가 가지고 있는 마도구로 본 목걸이는 그가 받았던 모조품과 똑같이 생겼으나 영롱한 사파이어만큼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분명 그 목걸이가 진짜일 거야!’

더는 지체할 수 없어 곧장 따라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오래 가지 못했다.

누가 봐도 평민 차림인 두 남녀가 짐마차를 타고 황성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원래는 조용히 뒤를 밟아 처리하고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설마하니 황성에 들어갈 줄은 몰랐기에 그대로 보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평민 차림의 남녀, 그리고 황성 소유의 마차. 일개 마부인가? 아니면 사용인 중 하나?’

추리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속이 갑갑했다.

사용인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개중에는 출퇴근하는 이들도 무척 많은데, 일일이 쥐잡듯 처소를 뒤질 수도 없을뿐더러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은 흔하디흔했다.

외모도 평범하기 그지없어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기억에서 흐려질 터다.

사내는 책상 위에 올려진 가짜 목걸이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곧 “제기랄!” 하는 욕지기와 함께 벽난로 속으로 집어 던졌다.

일순 화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거세게 피어오르며, 꼴도 보기 싫은 모조품을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남자는 연신 씨근덕댔다.

‘어떻게 찾아내야 하지? 일단 본성엔 몇 명 있고, 별궁에는…….’

세레나.

틈만 나면 머리 위로 올라가려는 오만한 것.

그러잖아도 요즈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과연 믿어도 될까.

그는 잠시간 고민했으나 별궁에 있는 제 사람이라곤 세레나뿐이었다.

‘저도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설마 허튼짓을 하지는 않겠지.’

2황자에게 저주를 거는 방법은 알려 주었으나 푸는 방법은 지금까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목걸이가 없으면 어차피 못하는데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있을 리가.

하지만 목걸이를 발견했다 말하면 저보다 더 발 벗고 나서 열심히 찾아 헤맬 것이다.

어떻게든 테시우스를 제 것으로 만들려 안달복달하는 계집이니.

사내는 생각을 마치자마자 곧장 수하를 불러 세레나에게 지령을 전달할 것을 명령했다.

그가 보낸 서신이 세레나에게 도착한 건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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