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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2)화 (92/141)

92화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모습을 보노라니 그리운 엄마의 얼굴과 문득 겹쳐 보였다.

엄마만큼 화려하게 아름답진 않아도 찬란한 바닷빛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을 고스란히 닮은 얼굴에,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거울 속 얼굴을 슥 매만졌다.

‘엄마,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고, 그 사람도 날 진심으로 좋아해 줘. 앞으로도 이렇게 잘 지내는 모습만 보여 줄게.’

아드넬은 생각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거울 속에 담긴 자신의 미소가 마치 엄마가 그녀를 향해 웃어 주는 것만 같았다.

아드넬은 그리움을 담아 거울을 잠시간 응시하더니 곧 욕실을 나섰다.

이런 날만큼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목걸이도 하고 나가자.’

매듭은 조악하고 볼품없어도 물방울 모양의 사파이어만큼은 영롱하게 빛났다.

엄마가 하루도 빼지 않고 차고 다니던 목걸이는 이제 그녀의 것이 되었지만, 목걸이를 차고 있노라면 엄마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드넬은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 둔 목걸이를 찾아 걸었다.

그제야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로브까지 뒤집어쓴 뒤, 아드넬은 별궁의 마차 보관소로 향했다.

이른 새벽 공기는 퍽 차가웠으나 설레서인지 일말의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찾아간 마차 보관소엔 마찬가지로 로브를 쓴 테시우스가 있었다.

“전하……!”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치자 테시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드넬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해 보였다.

이에 아드넬이 냉큼 달려가자, 그는 잠시간 인기척을 살피는가 싶더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의 손에 반지부터 끼워 주었다.

그리곤 뒤따라 자신도 반지를 낀 뒤, 손수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전하께서는요?”

“난 말을 몰아야지. 오늘은 내가 네 일일 마부야. 그러니 어서 타시지요, 아가씨.”

그의 입에서 나온 ‘아가씨’란 단어에 아드넬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부끄러움에 후다닥 마차에 오르자 테시우스는 그마저도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마부석에 오르자마자 곧장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신선한 식재료를 공수해 오는 짐마차가 나가기 때문에 근위병들은 별 의심 없이 그들을 내보내 주었다.

공공 마차 보관소에 도착해서는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갑갑한 로브를 벗을 수 있었다.

“아…….”

그때 테시우스가 로브를 벗은 아드넬을 멍하니 바라보며 언뜻 탄식 같기도 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만큼 아름답고, 색다른 모습이었다.

원래도 예쁘장한 얼굴이긴 하나 원피스를 입으니 왜 그녀가 말하고서야 여자라는 걸 눈치챘을까 싶을 만큼 아리따웠다.

직접 고르긴 했지만 한 걸음만 내딛어도 찰랑이는 풍성한 치마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역시 긴 걸 고르길 잘했어.’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치맛단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가늘고 새하얀 발목조차 예쁠 지경이니.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 일부러 긴 원피스로 골랐는데 그러길 잘한 것 같았다.

테시우스는 새삼 자신의 안목에 감탄하며 아드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드넬. 아니, 아실라.”

엄마만이 불러 주던 그녀의 원래 이름.

오늘만큼은 그 이름으로 지낼 수 있었다.

아드넬은 기쁜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으며 화답했다.

“가요, 테오. 오늘 하루가 너무 짧아요.”

* * *

그 시각, 세레나는 밝은 아침 햇살도 마다하고 커튼까지 내린 채 자신의 침실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긴 유리병에서 보글보글 끓던 액체는 유리관을 타고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의 약병에 톡톡 하며 한 방울씩 떨어졌다.

‘이제 머지않았어. 그 요망한 남자애가 끝장날 일도!’

무려 일주일간 정성에 정성을 거듭해 만든 약이다.

남부에서만 자라는 엘루디아라는 식물의 즙을 끓여 농축하면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진통제가 되지만, 치명적인 부작용 또한 존재했다.

다름 아닌 재스민차와 함께 복용하면 느리지만 착실하게 내부 장기를 망가트리는 독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차에 타지는 않을 거야. 난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까.’

요즈음 틈만 나면 아드넬을 찾아가 재스민차를 먹였다.

추수제 연회가 시작되는 날, 가기 전에 차를 한 번 더 먹인들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연회에 따라가 아드넬이 마실 술에 약만 타면 되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전하께선 그 맹한 것을 왜 그리도 총애하시는 거야? 당최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데……!’

한편 세레나는 약을 만들다 말고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씩씩댔다.

그간 아드넬 앞에서 제 남자가 보여 준 태도만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다 못해 까맣게 썩어들어갔다.

알고는 있다. 화장품이나 만드는 주제에 용케 병증을 좀 가라앉혔다는 건.

하지만 단순히 그 때문이라고만 보기엔 제게 보이는 태도가 한겨울 바다보다 차가웠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틈만 나면 나가라질 않나, 눈에 띄지 말라질 않나, 정말이지 섭섭하기 그지없던 것이다.

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하려고!

‘……물론 난 전하를 사랑하니까, 용서만 빈다면 얼마든지 봐줄 수 있어.’

문제는 아드넬이었다.

언뜻 보기엔 맹해 보여도 테시우스의 옆에 딱 붙어 꼬리를 살랑대며 아양 떠는 요망한 것.

저깟 것이 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한 자리 차지하려 그러는 것 같은데, 어디 가만히 두고 볼 줄 알고?

세레나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독기 어린 눈으로 약병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거슬리는 남자애부터 치운 다음엔, 차근차근 계획이 진행될 거야.’

이미 후작 쪽에서 입소문을 퍼트리고 있다.

황후와 황태자가 작당해 테시우스를 시해하려 한다는.

얼핏 듣기엔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황실에서 2황자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승산은 충분히 있어.’

후작의 도움으로 세레나는 별궁에 있기 전까지 본성에서 황태자를 모셨다.

그동안 아드넬의 동태를 살피고 보고한 것도 그녀였고, 그는 자신을 신뢰하고 있었다.

아드넬의 수상한 행적에는 의심을 품은 황태자였으나 저에겐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별궁으로 보냈다.

대외적으론 자원했다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아닌 것이다.

나를 자기 사람이라 확신하는 황태자가 과연, 계획이 실현되고 나서 의심을 품을까?

마녀의 능력이 있다는 건 후작 외엔 아무도 모르는데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가 없을 터다.

설령 2황자가 저주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밝힌들, 그때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고.

세레나는 예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약병의 뚜껑을 닫았다.

은은한 노란빛으로 빛나는 액체가 사선으로 기울며 찰랑였다.

이를 가만히 보노라니 찬란한 황금빛 융단이 깔린 앞날이 눈 앞에 펼쳐진 듯했다.

‘황태자가 물러나고 나면 2황자 전하께서 그 자리에 오르실 거야. 그리고 나는 황태자비, 이후엔 황후가 되는 거고!’

그럴 운명이고, 그렇게 될 것이다.

세레나는 음험하게 웃으며 약병을 쥔 손에 까득 힘을 주었다.

* * *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건 정말이지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걸을 때마다 다리를 휘감는 치맛단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내딛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저기! 저기도 가 봐요!”

“그래, 대신 손은 놓지 말고.”

잔뜩 신난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손을 잡은 채 거리 곳곳을 쏘다니며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가판대를 구경하고, 상점 주인이 준 사탕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먹으며 데이트를 만끽했다.

축제 분위기가 만연한 거리만큼 신나는 곳이 또 있을까.

여기에 테시우스는 그녀가 어딜 가서 뭘 먹이든 순순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실 그의 눈엔 아드넬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예쁘지. 걱정되게.’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드넬은 밋밋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외모의 여자로 보일 테지만 제 눈에는 한없이 예쁘다 보니 반지를 낀 걸 알고도 자꾸만 흠칫흠칫하며 사방을 살피게 되었다.

새하얗고 가는 발목은 어쩔 수 없다 보니 지나가는 남자가 조금만 눈동자를 아래로 내릴라치면 곧장 앞으로 나서 시야를 가렸다.

그리곤 어딜 감히 쳐다보냐는 듯 잔뜩 인상을 구기고 노려봐 주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마음이 놓일 만큼, 예뻐도 너무 예뻐서 탈이었다.

물론 이렇게 예뻐서 기분 좋은 것도 있었다.

‘이토록 빛나는 사람이 내 여자야. 그리고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해.’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연하지만은 않은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 깊이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무엇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구름 위를 걷는 듯 둥실둥실 몽글몽글해졌다.

아드넬과 손을 잡고 여느 연인처럼 평범한 거리를 평범하게 돌아다니는 이 순간이 끝나는 게 두려울 만큼 행복했다.

“저기서 공연을 하나 봐요!”

그때 아드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량한 음색에 테시우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오로지 기쁨으로 가득 찬 화사한 미소가 일순 눈이 부셔 그는 잠시간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기도 가 보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손을 잡아끌고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꽤 많은 인파가 몰린 분수대 앞, 그곳에 걸터앉은 남자는 퍽 나이 들어 보였다.

악기라고는 그의 옆에 서 있는 어린 꼬마가 다루는 작은 칼림바가 전부였다.

아드넬이 도착했을 땐 이미 한 곡이 끝나고 박수갈채가 이어질 때였는데,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 낡은 중절모에 동전들을 넣기 시작하자 그녀 또한 팁을 넣고 돌아왔다.

그렇게 더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남자는 아이에게 뭐라 말하고는 곧 숨을 가다듬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지고, 머지않아 사내의 입술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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