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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1)화 (91/141)

91화

가을의 대표 행사인 추수제는 무려 일주일간 이어진다.

황성에서 진행되는 연회는 사흘로 끝나지만, 수도 거리 곳곳에 추수제를 알리는 붉은 깃발이 달리기 시작하면 배곯는 이들을 위한 무료 식사가 제공되고 어느 가게에서나 작은 사탕 주머니를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자, 부유한 자 할 것 없이 모두가 수확의 계절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드넬은 초대받은 추수제 연회보다는 수도에 나가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풍요로운 수확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의 생기와 그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느껴 보고 싶었다.

다만 평소 같았다면 필립과 제이든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연회는 사흘이면 끝나지만 추수제 자체는 일주일이다 보니 하루 정도는 나가서 놀면 어떻겠냐는.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2황자 전하와 함께 가고 싶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또 여지없이 좋아하노라 말하곤 하지만 지금까지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 황성 밖으로 나간 적도, 손을 잡고 돌아다닌 적도, 어디 여행을 가 본 적도 없는 것이다.

원체 보는 눈이 많다 보니 다른 사람 앞에선 늘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고 거리를 두어야 했다.

대외적으로 남자라 알려져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라 이번만큼은 여느 연인들처럼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문제는 외모인데.’

아드넬도 물론 예쁜 외모를 가졌지만 테리우스는 압도적으로 눈에 띄었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끄는 거대한 체구며, 보는 것만으로도 고귀함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목구비며, 눈에 띄지 않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기는 싫었다.

예쁜 얼굴을 편히 감상하기에도 모자란데 큰 후드에 가려지면 하관만 실컷 보고 끝날 테니까.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아드넬이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던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세레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찻잔과 티 포트가 올라간 트레이를 든 채였다.

“아드넬 님,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예? 아……. 예, 괜찮습니다.”

아드넬이 엉거주춤 몸을 바로 하자, 세레나는 트레이를 든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으며 생긋 웃어 보였다.

“어딘가 고민이 있으신 듯해서요.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가져왔답니다.”

“너무 티가 났나 보네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인걸요.”

그리 말하며 세레나는 세상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드넬 또한 미소로 화답하며 그녀가 따라 준 찻잔을 들었다.

은은하지만 따듯하고 또 온화한 향기가 코끝에 어렸다.

‘재스민차인가.’

딱 알맞은 차를 가져온 듯싶었다.

아드넬은 세레나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티 타임을 즐겼다.

그렇게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즈음이었다.

“……아드넬.”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닫힌 문 너머로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이젠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또 듣노라면 설레는 목소리, 테시우스의 것이었다.

“전하……!”

“앉아 계세요, 아드넬 님. 제가 갈게요.”

그 목소리에 아드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세레나가 냉큼 선수를 치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직접 반겨 주고 싶은데,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렸으나 세레나는 그런 아드넬을 뒤로하고 대신 문을 열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

설레는 마음으로 기껏 찾아왔더니 보기 싫은 얼굴만 떡하니 앞에 있었다.

미미한 미소가 어린 얼굴이 와그작 구겨지는 데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테시우스는 대답 없이 세레나를 쳐다보더니 그녀가 몸을 비켜서기가 무섭게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세레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축객령부터 내렸다.

“나가라.”

“예……?”

“나가라고. 아드넬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 정도면 맹한 게 아니라 지능이 모자란 게 아닌가?

무슨 말만 할라치면 꼭 되물어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게 하니, 테시우스의 얼굴에 짜증기가 가득 올라왔다.

세레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이기는가 싶더니 곧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렇게 문이 닫히자 테시우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드넬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할 말이 있어서. 아, 혹시 내가 방해한 건가?”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오시는 건 언제든 환영입니다.”

이젠 아드넬도 꽤 스스럼없이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 변화가 퍽 기분 좋아 테시우스가 웃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있지, 곧 추수제가 열리잖아. 그래서 말인데…….”

테시우스는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 덧붙였다.

“나랑 같이 수도에 나가면 어떻겠어? 여느 연인들처럼 손도 잡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길거리 공연도 보면서 말이야.”

놀랍게도 그는 조금 전까지 아드넬이 한창 고민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에 아드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닷빛 눈동자에 금세 실망이 어렸다.

저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나 그러기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아무리 황성 밖이래도 보는 눈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될 것 같…….”

“아드넬.”

그때 테시우스가 말을 끊으며 반지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리곤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봐.”

그는 왼손 검지에 반지를 꼈다.

별것 없어 보이는 반지였으나 테시우스가 손가락에 끼는 순간 화한 빛이 대뜸 뿜어져 나왔다.

손가락에서 번지듯 뿜어져 나온 강한 빛에 아드넬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전하?”

“응, 나 맞아.”

“이게 어떻게 된…….”

“바스토르가 신분을 바꿀 일이 있을 때 종종 쓰는 마도구야. 암행을 가거나 다른 사람으로 둔갑할 때 사용하지. 이렇게 손가락에 끼는 것만으로도 외모가 바뀌어.”

그리 말하며 테시우스는 비슷한 모양새의 반지를 하나 더 꺼내 아드넬의 손을 들고 직접 끼워 주었다.

곧 그녀 또한 강한 빛과 함께 외모가 바뀌었다.

하지만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 아까는 분명…….”

“같은 반지를 낀 사람은 서로의 본래 얼굴을 볼 수 있어. 그리고 오직 이 반지만이 서로에게 반응해.”

아까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아드넬이 반지를 끼고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 테시우스는 본래 그의 얼굴대로 돌아와 있었다.

실로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는 반지의 능력에 아드넬은 그만 벙찌고 말았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누구도 우릴 알아보지 못해. 그리고 그때만큼은, 조금 편해졌으면 해.”

“편해진다니…….”

“매 순간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들킬까 염려하고, 아드넬 또래의 여자처럼 옷도 입어 보지 못했잖아.”

테시우스가 말하는 건 명백했다.

그 순간만큼은 남자로 있지 않아도 된다는, 본래 너의 모습으로 돌아와도 괜찮다는 이야기였다.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있을 수 있다면…….’

매일같이 답답한 복대를 가슴에 차고 지내서인지, 아니면 상황 때문인지 몰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딱 하루만이라도, 남장을 관두고 싶었다.

13년이란 세월을 남자로 살았다 보니 익숙하기도 했지만 그녀도 점차 지쳐갔고,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 대체 언제쯤 편해질 수 있을까 하며 한숨만 연신 내쉬었다.

하지만 이 반지만 있다면 간절히 바랐던 하루의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찬란한 바닷빛 눈동자에 기쁨이 차오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아요……! 꼭 전하와 함께 나가고 싶습니다!”

“응, 나도 꼭 함께 가고 싶어.”

그간 얼마나 간절히 바랐을까.

이리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빛바랜 흑발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조만간 옷을 보낼게. 그날 입고 나와 줘.”

* * *

기다림의 시간은 느리게도 흘러갔다.

급한 일도 진작 다 처리했다 보니 일에 전념하래도 할 수가 없어 아드넬 자신을 비롯한 제이든이나 필립이 쓸 세정 화장품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다가도, 아직 며칠이나 남은 추수제가 너무 멀게 느껴져 폭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너무 지루해질 때면 세레나가 귀신같이 알고 재스민차를 가져왔다.

대화는 대부분 그녀가 좋아한다는 누군가의 찬양이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지만 그거라도 듣지 않으면 멍하니 있을 뿐이라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느리지만 동시에 꾸준히 흘러, 어느덧 약속한 당일이 되었다.

추수제가 시작되는 첫 번째 날이었다.

‘와아…….’

이른 새벽,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끔 일찌감치 일어난 아드넬은 얼마 전 테시우스가 보내 준 옷을 꺼냈다.

아름답게 물든 붉은 원단의 원피스였는데 가슴과 짧은 반소매 끝엔 새하얀 프릴이 달려 있었고, 어깨부터 가슴선을 따라선 꽃무늬가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난한 디자인의 원피스였지만 아드넬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나도 꼭 한 번 이런 옷을 입어 보고 싶었는데.’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제 또래 여자들을 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화려하고 무거운 드레스보다는 저들이 입는 가볍고 편안한 원피스를 입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저가 딱 원하던 옷을 보내 준 것이다.

저번에 먼저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렇고,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딱딱 잘 알아채는지.

아드넬은 헤실 웃으며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만큼은 답답한 복대도 하지 않았다.

머리는 좀 짧지만 어느 정도 자라 어깨 위에서 부드럽게 찰랑였다.

그렇게 거울로 마주한 자신은 정말로, 길거리의 여느 여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보니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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