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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0)화 (90/141)

90화

“아까는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

“이렇게 좋아서 어떡하지? 내가 어쩌면 좋을까, 아드넬.”

그리 말하며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어깨 위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어쩐지 커다란 강아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땐 꼭 테오가 된 것 같네.’

흑표범의 모습으로 있을 때 뺨에 얼굴을 비비고 어깨에 머리통을 기대기도 했는데.

아드넬은 낮게 웃으며 테시우스의 칠흑 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저도 좋습니다. 정말로요.”

“얼마나 좋은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하와 저를 만나게 해 준 저주가 이따금 감사히 느껴질 정도로요.”

“……그런가.”

그래, 생각해 보니 그렇다.

만약 저주인지 모를 것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델리움의 산속에서 만날 일도, 이렇게 별궁에서 재회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니 지난날 느꼈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변할 때의 통증쯤이야 아드넬을 만난 것에 비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테시우스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는가 싶더니 곧 “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건 진짜 왜 물은 거야? 바스토르가 좋아하는 향이 뭐냐니?”

잠깐 딴 데로 새긴 했지만 본론은 그것이었다.

아드넬도 그제야 아까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하르트 공녀님께서 제게 긴히 부탁하셨습니다.”

일전에 황후를 만났다 돌아오며 마주친 율리시아가 화장품을 만들어 달란 부탁을 했고, 무척이나 애절해 보였으나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러나 그 모습에 못내 마음에 걸려 외면할 수도 없었다고.

아드넬은 그녀와의 대화와 자신이 고심했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응응.” 하며 경청하더니 향수를 만들어 드리려 한다는 대목에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눈썹 사이를 좁혔다.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 줄 수 없어. 음식 취향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향 같은 부분은 암살의 기초 정보가 되니까.”

“아…….”

“이번만큼은 내가 돕기 어려울 것 같다, 아드넬.”

아드넬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엔 수많은 식물이 있고 수많은 향이 있다.

개중에선 오래 맡을수록 몸에 안 좋은 성분이 쌓여 곧 독이 되는 것들도 있다.

두 가지의 향이 겹쳐졌을 때 비로소 독이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럴 경우엔 사인을 찾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황성엔 식물은 물론이고 원목 가구의 재료 등 모두 철저히 검증된, 인체에 무해한 것만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전생만큼 과학이 많이 발달하진 않아 검증된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다만 아드넬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테시우스는 그게 마음에 걸리는 듯 그녀와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겼다.

아드넬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건 다른 문제였다.

일종의 금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바스토르가 좋아하는 향을 알려 줄 순 없어도, 그와 비슷한 건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 해가 가지 않을 만한 어떤 단서 정도라면…….

“……아드넬.”

“예, 말씀하십시오.”

“왜 향수를 만들려던 거지?”

“그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향이 너무 강해서라고.”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는 거지?

아드넬이 눈을 끔벅거리자 테시우스가 마주 보며 말했다.

“지나친 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그래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 향수를 만들려던 거잖나.”

“……아!”

그제야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저의를 알아챘다.

어떤 특유의 향을 넣지 않아도, 은은하게 향기가 나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시선을 잡아끌 수 있다는 것.

아드넬도 그럴 생각으로 만들려 했으나 되도록 황태자의 취향에 부합하는 향을 고르려던 건데, 그럴 수 없게 되니 다른 방향으로 본질을 꿰뚫어 보고 방법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러고 보면 테시우스는 이전에도 그랬다.

공녀들을 모델로 세우려 했을 때도 이런 식으로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그에겐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아드넬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테시우스를 응시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요.”

“별것도 아닌걸.”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리 말하는 테시우스의 눈매는 부드러운 반달꼴로 보기 좋게 휘어 있었다.

아드넬 또한 화사한 미소로 화답하며, 다음날 곧장 고체 향수를 만들어 율리시아에게 보냈다.

그녀에게 향수가 도착한 건 추수제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였다.

* * *

아드넬이 만든 고체 향수는 아로마 스틱이라고도 부르는, 전생에서 공방을 운영할 때 초보 회원에게 가르쳐 주던 레시피였다.

스틱형으로 되어 있어 외출할 때 휴대하기가 편하고, 간편하게 슥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향이 오래 지속된다.

물론 스프레이 용기와 마찬가지로 제국엔 스틱형 용기 또한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입술을 바르기가 무척 번거로웠다.

얇은 붓으로 붉은 염료를 발라야 하는데 연회 같은 행사에 참석해 입술이 지워지면 파우더 룸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파우더 룸에서 치장하는 게 기본 예의라지만 시중에 나온 염료는 착색이 오래가지 않아 번거로웠다.

저 멀리 있는 파우더 룸까지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높은 구두에 시달린 발도 통증을 호소한다.

하지만 연회홀에는 테라스가 있고 저택에는 화장실이 있다.

그런 곳에서 얼마든지, 또 간단하게 화장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드넬은 예전부터 스틱형 용기를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주문을 넣었다.

결을 매끄럽게 다듬은 나무로 용기를 만들되 크기는 작게, 아랫부분을 돌리면 스프링 모양으로 휜 얇은 철사가 위쪽을 올려 립스틱이 나오고, 립스틱이 들어간 용기 안쪽은 칠을 해서 매끄럽게 나올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스틱형 용기는 완성이 되었으나 용기 자체를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하다 보니 대량 생산엔 부적합했다.

하지만 아드넬에겐 나중을 기약하며 가지고 있던 완성된 시제품이 몇 개 있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고체 향수는 만들기도 쉬웠다.

호호바 씨앗에서 추출한 오일과 밀랍을 가열해 녹이고, 라벤더와 페퍼민트 등의 에센셜 오일을 넣어 섞은 뒤 용기에 부어 굳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특히 호호바 오일은 사람의 피지와 유사한 형태의 오일이라 흡수도 빠를뿐더러 피부 타입에 따른 트러블 걱정이 없어 민감한 사람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만드는 난이도를 생각해 보면 화장품보다 용기를 만드는 게 더 어려웠다.

아드넬은 포장하지 않은 상자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편지지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곧 펜을 들었다.

[양 손목 안쪽과 귀 뒤에 바르면 향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고체 형태의 향수입니다. 이렇게밖에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더는 아파 눈물 흘리시는 일이 없길 바라며.]

사실 황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건은 선물 또한 예외 없이 사용인들이 확인하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편지와 향수를 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눈속임거리는 있었다.

테시우스와 함께 황후를 만났을 때, 그녀를 비롯한 두 공녀에게 데오드란트를 만들어 보내 주겠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아드넬이 별궁에서 보내는 화장품은 거의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보냈던 만큼 그녀의 이름 석 자만 적어 놓으면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곧장 황후에게 갔다.

아드넬은 황후와 디아나에게 보낼 상자엔 데오드란트만을, 율리시아에게 보낼 상자엔 데오드란트와 고체 향수를 넣었다.

다만 율리시아는 당시 황후와 함께 있지 않았다 보니 데오드란트의 사용법을 모를 수도 있을 듯싶어, 그 밑엔 간략한 설명과 사용법을 적은 종이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아까 쓴 편지지는 용기 위에 올리고 뚜껑을 닫아 포장했다.

완성된 화장품들은 곧장 본성으로 보냈고, 받는 사람과 아드넬의 이름을 적은 종이가 달린 상자들은 각각 황후와 디아나, 그리고 율리시아에게 도착했다.

이날 오후,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방 안.

창가 옆 테이블에 앉아 한창 자수를 하던 율리시아에게 상자를 든 시녀가 다가왔다.

“공녀님, 아드넬이란 분이 화장품을 보내셨어요.”

“……어? 화장품을?”

화장품이란 단어에 율리시아는 조금 복잡한 얼굴로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 분명 확답을 해 주지 않았는데 하고 생각하던 찰나, 이를 읽기라도 한 듯 시녀가 덧붙였다.

“공녀님께만 보내신 건 아니래요. 황후 폐하와 체스터 공녀님께도 보내셨다고 들고 온 시종이 전해 줬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제 부탁을 들어준 건 아니란 소리였다.

율리시아의 얼굴에 실망과 절망이 잠깐 어렸으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표정을 지우곤 시녀를 내보냈다.

저가 원하던 화장품이 아니다 보니 시녀가 곁에 있으면 끝내 들킬 것 같았다.

이내 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율리시아는 자수틀을 내려놓고 천천히 상자를 열었는데, 실망하리라 생각한 것과 달리 그녀는 되레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각기 다른 모양새의 화장품 용기가 두 개, 그 위에는 정갈한 글씨가 쓰인 편지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에 불과했다.

문구는 그리 길지 않으나 율리시아의 눈동자는 그 짧은 문구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밖에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더는 아파 눈물 흘리시는 일이 없길 바라며.]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것이 남자라면 더더욱.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드넬은 처음 봤을 때부터 무척이나 편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그녀가 여태 봐 온 남자들은 특유의 거만함이 있었는데, 아드넬을 마주하노라면 그런 거만함은 찾아볼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배려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친하지도 않은 그를 우연히 만난 순간, 저도 모르게 붙잡고 부탁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리한 부탁을 강요하며 종래에는 눈물까지 보이고 말았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아드넬은 끝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편지지에 적힌 짧은 글귀 하나.

‘더는 아파 눈물 흘리시는 일이 없길 바라며…….’

율리시아는 그 문장을 연신 곱씹었다.

이 짧은 글귀가 뭐라고 이토록 위로받는 느낌을 주는 건지.

율리시아는 손을 뻗어 작은 종잇조각을 마치 끌어안듯 가슴께에 가져다 대며 소리 없이 눈물 흘렸다.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그 편지를 내려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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