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바로 그 순간, 멍하니 향주머니를 바라보던 아드넬의 머릿속에 기적처럼 한 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향수가 있잖아!’
굳이 얼굴에 찍어 바르는 화장품이 아니더라도 향기는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나 체취와 섞인 은은한 향은 언젠가 한 번 맡아 본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들어 주고, 기억에 스민 냄새는 때론 추억을, 때론 상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를 매료시키되 아드넬이 만들어 주어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화장품, 그건 향수뿐이었다.
‘제국에서도 향수는 꽤 번성한 편이지.’
아드넬이 바디 워시 같은 세정 화장품을 만들기 전엔 고급 비누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더운 여름철 심한 땀 냄새는 밖에 나와 있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냄새를 가리기 위한 최선은 또 다른 냄새로 덮는 것이니만큼 향수가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한때는 향수에 도전했다.
하지만 인위적인 향이 강해도 너무 강해 갓 빤 빨래 냄새가 나는 식의 은은한 향수를 만들었는데, 좋지 않은 악취를 덮기엔 모자라다 보니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만두게 되었다.
다만 스프레이 용기는 아직 제국에 없을뿐더러 아드넬도 만드는 법은 몰랐다.
따라서 시중에 나온 향수는 작은 용기에 소량만 넣어 휴대하고 스킨처럼 바르는 식이었는데, 가뜩이나 강한 냄새가 손에도 묻다 보니 끈적거리고 향이 무척 과하게 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지. 고체 향수!’
스틱형으로 만든 고체 향수는 휴대하기도 편할뿐더러 한 번 슥 문질러 주기만 하면 되어 시중에 나온 향수의 단점을 모두 보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천연 화장품의 필수 재료인 에센셜 오일을 넣어 만들면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향이 오래도록, 또 은은하게 지속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화장품을 만들지 정한 것은 그렇다 쳐도 제일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향을 좋아하시는지 알아야 해.’
강하고 인위적인 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있는 게 그것뿐이고 악취가 나는 것보단 백배 나으니 다들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데도 사용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꽃향기도 과하면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처럼, 독한 향수 냄새는 되레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따라서 향을 선택하려면 잔잔한 호수같이 차분하던 율리시아의 첫인상과 부합되면서 황태자가 좋아하는 향을 배합해야 했다.
아드넬은 생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역시 2황자 전하께 여쭤봐야겠어.’
그 사람만큼 황태자를 잘 아는 이는 달리 없을 테니까, 겸사겸사 잘생긴 얼굴도 보고.
상상만 해도 설레어 아드넬은 볼을 발갛게 붉혔다.
때마침 시간도 점심때였다.
원래라면 시녀인 세레나가 아드넬에게 식사를 가져다줘야 하지만, 틈만 나면 바쁜 아드넬이 일에 방해가 되니 가져오지 말라 말한 덕에 지금 그녀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살갑긴 해도 자꾸만 달라붙는 세레나가 불편하고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아드넬은 간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2황자가 식사하는 다이닝 룸은 별궁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식당과 따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역시나 펠릭스가 문 앞에 대기하고 서 있었다.
그가 있다는 건 곧 2황자가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어 아드넬은 평소와 같이 인사해 보이곤 테시우스가 식사를 마치고 나오길 얌전히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는 마침내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테시우스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작은 머리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드넬?”
“오랜만에 뵙습니다, 2황자 전하.”
“여긴 무슨 일로……. 아니, 그보다 왜 방문을 고하지 않았지?”
“식사에 방해가 될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찌릿하고 펠릭스를 노려보고는 재빠르게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난데없이 힐난의 눈총을 받은 펠릭스는 어리둥절한 눈치였으나 테시우스가 “난 서재로 갈 테니 너는 다른 곳에 가 있어라.” 하며 쫓아내기까지 해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를 비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테시우스와 아드넬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
지난번 삼겹살 파티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라 그런지 함께 걷는 것마저 설렘의 연속이었고, 평범하게 오가는 대화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아드넬의 모습에 테시우스는 짐작했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
그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안기기까지 하고,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내뱉은 말들을 아드넬이 기억했더라면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진 못할 테니까.
물론 까맣게 잊은 모습조차도 귀여웠다.
사실 아드넬이 뭘 하든 다 그랬다.
그래서일까, 테시우스는 서재에 들어서 문을 닫자마자 더는 참기 어렵다는 듯 덥석 그녀를 껴안았다.
“저, 전하?”
“너무 오랜만에 봐서.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어.”
툭 하면 작업실에 틀어박히니 우연을 가장한 만남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바쁜 사람을 방해할 수도 없으니 마냥 기다리는 것인데, 그만큼 인내했으면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테시우스의 두근거리는 가슴 박동은 맞닿은 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서 있던 그는 이제 다 충전됐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드넬을 풀어 주었다.
“그럼 이만 앉지.”
“예, 예.”
새빨개진 얼굴로 아드넬이 허둥대며 자리에 앉았다.
이따금 그가 이런 식으로 훅 치고 들어올 때면 심장이 벌렁거려 제 표정 하나도 관리할 수가 없었다.
테시우스 몰래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고르던 아드넬은 잠시 후 본론 먼저 꺼냈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그게 뭐지?”
“혹 황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향이 따로 있으신지요?”
그러나 별것 아닌 질문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테시우스는 대뜸 미간을 팍 찌푸리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예?”
“왜 바스토르가 좋아하는 향 따위를 묻느냔 말이야.”
그녀가 황태자를 언급한 순간, 예전에 이 방 안에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얼굴을 붉히던 아드넬이 떠오른 것이다.
그날 바스토르는 손이 오그라들 정도로 기름진 말을 내뱉으며, 무려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기까지 했다!
나중에 물어봤을 때 왜 그랬는지 이유를 듣긴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좀 심기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아드넬이 그를 퍽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아 투기가 차올랐다.
“역시 바스토르의 외모가 더 취향인 거지?”
“…….”
“그럴 줄 알았어, 언제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더니. 순 거짓말이었군.”
그리 말하는 얼굴은 잔뜩 토라져 있었다.
한편 아드넬은 벙한 얼굴로 테시우스가 말하는 걸 듣고 있다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더니.’ 하는 대목에서 눈을 크게 떴다.
“제가 그런……. 말을 했단 말씀이십니까?”
“어디 그뿐인 줄 알아? 갑자기 2차를 가고 싶다질 않나, 노래방을 좋아한다질 않나, 난생처음 듣는 단어들을 늘어놓더니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다고 가지 말라고 붙잡질…….”
“그, 그만……!”
아드넬은 황급히 테시우스의 말을 끊었다.
처음엔 그저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듣다 보니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세상에서 제에일 잘생겼어. 전하도 알아요?’
‘왜애? 2차 안 가요오? 노오래방! 나 노래방 좋아하는데!’
‘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겨써어.’
완전히 잊고 있던, 만취한 상태로 내뱉은 말들이 차츰 선명해졌다.
그럴수록 아드넬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달아오르고 동공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인생의 흑역사로 남을 만한 일이었다.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볼 수도 없어 아드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수그렸다.
조절해서 마시겠다 다짐해 놓고 잔뜩 풀어져 버리다니,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익었을 지금 얼굴도 부끄러웠다.
그제야 조금 만족한 듯 테시우스는 사뭇 거만한 태도로 한쪽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진짜야?”
“…….”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 아니면 방금 내가 물어본 게 사실인가?”
은근히 찔러보는 투, 하지만 내심 아니길 바라며 묻는 말.
아드넬은 손을 슬쩍 내리며 그를 매섭게 흘겼다.
“난 두 번 묻는 걸 싫어해, 그러니 빨리 답해 줘. 응?”
“……저는…… 전…….”
“듣고 있어.”
“……전하가 더 취향입니다.”
“응? 무슨 전하를 말하는 거지?”
이젠 놀리는 기색마저 다분한 목소리에 아드넬이 손을 완전히 내리며 다소 크게 말했다.
“2황자 전하요! 전하가 더 제 취향에 가까우신……!”
“테시우스.”
“…….”
“테시우스라고 말해 줘. 너에게만큼은 2황자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일렁이는 황금빛 눈동자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그리 내뱉는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나 감히 부를 수도 없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서도 선뜻 내뱉지 못한 아름다운 이름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아드넬이 쉬이 입을 떼지 못하자 테시우스는 그녀의 옆으로 옮겨 앉고는 모아쥔 손을 덮듯이 그러쥐었다.
“어서, 이름으로 불러 줘. 한 번만 그리해 주면 실수한 건 다 잊을게.”
“……정말로요?”
“응. 놀리지도 않고, 아예 듣지도 않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지울게. 그러니까.”
아드넬은 고개를 들어 테시우스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머무른 미미한 미소가 아름다웠다.
더는 장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이가 이름을 불러 주길 간절히 기다리는 한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아드넬은 잠시 머뭇거린 끝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심 저도 한 번쯤 불러 보고 싶었던, 그의 이름 네 글자를 내뱉었다.
“……테시우스.”
“……하아.”
그때 아드넬이 간신히 내뱉은 한 마디에 테시우스가 고개를 푹 수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하고 조금 당황하자, 그가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