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알라니아는 예전에 아드넬이 갔었던 본성 안에 있는 실내 화원에 있었다.
다행히도 달리 손님은 없어 바스토르는 화원에 들어가자마자 알라니아 주변의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다짜고짜 들어와선 자리를 피해 달라하니 시녀들이 당황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으나, 알라니아가 괜찮으니 나가 보라는 축객령을 내리자 곧 조용히 화원을 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만이 남았다.
“무슨 일이지요, 황태자?”
“여쭤볼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바스토르는 지체할 것 없이 알라니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본론을 꺼냈다.
“혹, 테시우스에 관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는지요?”
“뭐…….”
찻잔을 기울이던 알라니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라니아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격양된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젠 너까지도 날 그리 보는 것이냐? 더구나 황족 시해라니!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지 않을 터, 한데 네가 감히 그걸 내게 물어?”
“답해 주십시오,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테시우스에게 해를 가할 계획을 세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있을 리가! 그러잖아도 그놈의 정산서 때문에 자존심을 잔뜩 구겼는데, 생각하고 싶지도 않건만 무슨 술수를 부린단 말이냐!”
알라니아는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다는 듯,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이 제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큰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제야 바스토르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저의를 토로했다.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 또한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혹 그러셨다면 그들이 눈치채고 어머니께 누명을 씌우진 않을까 염려되어 심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뒤에서 움직이는 자들이라니?”
“……로란트 후작이 가져온 서류입니다.”
바스토르는 품속에 넣어온 호르세의 보고서를 꺼내 내밀었다.
이를 받아든 알라니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머지않아 서류의 끝에 다다르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무슨……! 이제 와 테시우스를 제거하려 한다? 그것도 마녀의 주술로? 정말이지 미친 작자들이로구나.”
“하지만 분명 저희가 모르는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마녀는 제국에선 즉결 처분 대상, 그들의 주술은 금지되었다.
한데 그걸 황후와 황태자가 사용해 2황자를 시해하려 한다니, 그리 대놓고 소문이 나는 게 더 이상한 것이다.
이 소문을 믿는 것도 이상했다.
두 황자의 우애는 익히 소문나 있고, 그 때문에 2황자가 일부러 후계자 수업까지 포기했다는 것 또한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황실 사정에 전무한 평민조차도 쉬이 이해하기 어려울 터였다.
“근원지를 찾는 것 외에도 우선은 소문부터 잠재워야 한다. 제아무리 헛소문이라 한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살이 붙다 보면 감당키 어려울 만큼 몸집이 거대해질 테니.”
“예, 로란트 후작에겐 제가 말해 두겠습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소문을…….”
그 순간 알라니아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커다란 이름 하나.
‘리비엘 라이칸 후작.’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음험한 인간, 그건 그의 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닌 척, 모르는 척, 웃는 낯으로 가리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오래된 욕망까지 온전히 숨길 수는 없다.
알라니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어쩌면 라이칸 후작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 소리십니까?”
테시우스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늘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바스토르는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에게 앙금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머니께선 왜 그리도 후작을 싫어하시는 겁니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호시탐탐 황자를 탐내고 넘본다고 이미 수차례……!”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바스토르는 매번 반복되는 이 지긋지긋한 말다툼에서 정말 간절히 벗어나고 싶다는 듯 단칼에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전엔 그래도 반박이라도 했는데, 듣기도 싫다는 듯 일어나 버리니 알라니아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아니시라면 되었습니다. 조사 또한 제가 진행할 것이니 어머니께선 관여하지 마십시오.”
“이미 나까지도 언급된 일이다, 한데 완전히 손을 떼라고?”
“이번 추수제 또한 두 공녀에게 맡기긴 했으나 어머니의 관할하에 이루어지지요. 그 일에 집중하십시오.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바스토르!”
“언제까지고 어머니 품 안의 자식으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황실이 거론된 이상 저 또한 두루 살피며 조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황태자로서의 저를 존중해 주십시오.”
더는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기색이 다분한 투였다.
냉정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저의에 알라니아는 그만 말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바스토르는 곧장 몸을 돌려 화원을 나갔으나 알라니아는 차마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내가 너를 어찌 키웠는데…….’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남편이었고, 다른 여인을 품은 남편이었다.
그런 그를 안아야 하는 것은 고귀한 핏줄로 태어난 그녀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모욕임과 동시에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었다.
그러나 황후가 된다는 것은 알라니아 평생의 목표이자 삶의 이유였기에 겸허히 받아들이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바스토르를 배 속에 품기 전까지는.
‘제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한들 내 눈엔 그저 세 살배기 어린아이인 것을.’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존재를 자각한 순간 삶의 이유는 완전히 바뀌었다.
지독하리만큼 모진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품에 안은 아이는 너무도 작아서 내가 지켜주어야만 했고, 황실의 정통 후계자이자 고귀한 피를 가진 내 아이는 응당 황좌에 올라야만 했다.
나이 터울이라도 있었더라면 조금은 안심했을 텐데, 고작 한 살 차이로 테시우스가 태어나고 나서부턴 마음이 조급해졌다.
바스토르의 자리를 좀 더 확고히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 아이가 걸어갈 황제의 길을 보다 편안히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것이 완전히 뒤바뀐 알라니아의 목표이자 삶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그 아이는 자라 어엿한 사내가 되었고, 이젠 품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관여치 말라 한다.
나는 그저 너에게 닥칠 위험을 막아 주고자 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건만.
‘너무나 자라 버렸구나. 내가 봐 온 것 이상으로, 너무도 커 버렸어.’
이따금 수업을 잘 마치고 돌아오면 품에 안고 사탕을 먹여 주며 책을 읽어 주었더라지.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일까.
알라니아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그리운 과거를 되새겼다.
* * *
한편 아드넬은 지난번 율리시아와의 만남을 곱씹는 중이었다.
요즈음 한창 화장품 만드는데 몰두하다 보니 깜박 잊고 있던 그녀의 부탁도 떠오른 것이다.
‘새로운 화장품을 만들어 주었으면 해요. 디아나 공녀와 함께가 아닌, 오직 제게만요.’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한눈에 빠지실 수 있는 그런 화장품이 필요해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들어주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저는 정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위태롭던 모습과 애절하기까지 하던 눈물진 목소리.
그 간절한 부탁에도 아드넬은 차마 만들어 드리겠노라 답할 수 없었다.
황후가 디아나를 편애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두 사람 모두가 아닌 율리시아만을 위해 만들어 주었다간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까.
하지만…….
‘뭔가 이상하긴 했어.’
무더운 한여름, 팔꿈치까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는 게 일반적인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율리시아는 손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 보니 목 부분까지 완전히 덮은 드레스 같기도 했다.
물론 소재는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원단이었지만, 누가 봐도 후덥지근한 여름에 입기엔 부적합한 옷이었다.
무언가를 일부러 감추려는 게 아닌 이상.
‘그리곤 왼쪽 손목을 그러쥐며 거의 울 것처럼 부탁했지.’
그날 아드넬은 별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물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는 듯한 기분에 시달려야만 했다.
심란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잊혔는데, 오늘 갑자기 떠올라 곱씹어 보니 좀 이상한 게 아니었다.
‘혹시……. 누구에게 맞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황태자비 경합 중이고, 공녀를 박대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은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더구나 예쁘게 보이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기도 모자란 판국에 어떻게 손찌검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지만, 그것 말고도 공녀의 부탁을 어찌해야 할지가 제일 난감했다.
일단 거절하긴 했는데 계속 모른척하자니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마땅한 화장품도 없어.’
황태자가 한눈에 빠질 수 있는 화장품이라면 외모의 인상을 대번에 바꿔 줄 수 있는 화려한 색조 화장품뿐이다.
하지만 그런 걸 만들어 줬다간 변화가 눈에 띄는 만큼 대번에 들킬 테고, 안 들킬 만한 화장품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한눈에 빠질 수 있는 화장품. 그러면서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에 모두 부합하는 게 있을 리가…….’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난 왜 이렇게 미련한지, 그저 모른척하면 될 것을 왜 꼭 사서 고생하는지 그녀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아드넬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모나가 준 향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이 주머니를 한 번 만질 때마다 사부작거리며 말린 꽃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향주머니에서 나는 미미한 꽃향기도 잠깐이나마 짙어졌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