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무슨 이유에선지 제이든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지만, 바람을 쐬고 오겠다던 필립이 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리들리와 필립이야 원체 술을 좋아하다 보니 진탕 마시기 시작했고, 모나는 술이 약해 한 잔을 몇 번에 나누어 홀짝홀짝 마셨는데도 볼이 발갛게 익었다.
여기에 아드넬은 테시우스도 있는 만큼 되도록 조절해서 마시려 했는데, 걱정한 것과 달리 그는 이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금세 스며들었다.
그렇게 다 같이 편안히 대화하다 보니 잔이 채워지면 마시고 모자라면 따르면서 빠르게 취해 갔다.
자기는 마시면서 전하는 마시면 안 된다는 아드넬의 제재 때문에 테시우스만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은 무르익어 어느덧 늦은 밤, 아드넬은 모나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드넬.”
“……예에?”
“이만 침대에 가서 자야지.”
“저…… 아직 안 졸립니다아.”
나름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자꾸만 발음이 뭉개졌다.
아드넬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테시우스를 바라보았다.
“……헤헤.”
“왜 웃지?”
“그게에…….”
아드넬은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들리와 필립은 진작 뻗었고, 모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곤히 잠에 빠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아드넬은 테시우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확 하며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니 테시우스는 순간 무척 당황했지만, 그런 그의 귓가에 아드넬이 대고 속삭였다.
“잘생겨서어.”
“…….”
“세상에서 제에일 잘생겼어. 전하도 알아요?”
잔뜩 취했군, 테시우스는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아드넬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이 정도 거리에서, 귓가에 숨결을 불어 넣다니.
‘위험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잖아도 얼굴만 보면 심장이 쿵쾅거려 미칠 것 같은데 자꾸 이리 가까이 다가오면 언제고 한계가 올 터였다.
테시우스는 “후우.” 하며 잠시 숨을 고른 뒤 침착하게 말했다.
“이만 가서 자자. 내가 데려다주지.”
“그럼 전하는……?”
“난 당연히 내 침실에서…….”
“왜애? 2차 안 가요오? 노오래방! 나 노래방 좋아하는데!”
2차가 뭐지, 노래방은 또 뭐고?
취해도 단단히 취한 듯해 테시우스는 결국 아드넬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 눕히지 않으면 뭐라도 하나 엎거나 할듯싶었다.
“나중에 가면 되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시러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짐짓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수그린 머리통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엔 애정이 듬뿍 어려 있었다.
이리 만취한 것도 귀여울 지경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중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드넬은 다리에 제대로 힘을 주지 못했다.
한 걸음만 떼어도 휘청휘청, 결국 테시우스는 몸을 아래로 낮출 수밖에 없었다.
“잠시 실례하지.”
“……어어?”
테시우스는 한쪽 팔로 아드넬의 어깨와 등을 단단히 감싸 안자마자 반대쪽 손을 무릎 뒤에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위로 불쑥 올라가며 테시우스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인 그때였다.
“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겨써어.”
“…….”
그리 말하며 얼굴을 만지작거리는데, 덕분에 테시우스는 거의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뺨만 만지면 덜할 텐데 볼은 물론이고 콧대며 입술까지 얇은 손가락으로 당겨 보고 쓸어 보고 눌러 보니 미칠 지경인 것이다.
테시우스는 안쪽 입술을 세게 깨물며 얼굴을 지분거리는 손길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그가 침대 위에 내려놓으려던 순간, 다리가 이불 위에 닿자마자 아드넬은 두 팔로 테시우스의 목을 감싸 안았다.
“놓지 마요, 더 있을래.”
“…….”
“얼굴 보는 게 힘들어, 싫어요. 가지 마…….”
하지만 가지 말라는 대목에 뚝 하고 실이 끊기는 것처럼 테시우스의 인내심도 마침내 바닥을 보였다.
그는 안아 든 팔에 도로 힘을 주어 그녀를 들어 올렸다.
“가지 않아. 나랑 함께 있자, 아드넬.”
물론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긴 했지만 그는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언제 깰지도 모르는 판국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테시우스는 자신의 침실로 건너가 아드넬을 침대에 눕혔다.
물론 이때도 가지 말라 땡깡을 부리긴 했으나 가지 않겠다고 달래며 간신히 눕힌 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주곤 의자를 끌고 와 침대 가에 앉았다.
“어서 자, 시간이 많이 늦었다.”
“으응……. 전하는요?”
“네가 잠들고 나면.”
“피곤할 텐데에…….”
“너만 할까, 그러니 어서.”
테시우스는 팔을 뻗어 아드넬의 손을 감싸 쥐듯 잡았다.
제 손의 반은 될까 싶을 만큼 작은 손이었다.
그 가녀린 손가락도,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는 하얀 손등도, 짧게 잘랐지만 그마저도 예쁜 손톱까지, 테시우스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지금 보지 않으면 다시 보기 어려우니까. 보고 싶을 때마다 떠올리려고.”
이 작은 손으로 저를 위한 화장품과 연고를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그의 병은 느리지만 꾸준히 치료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드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건조한 피부로 고통받던 하녀들을 위한 화장수부터 더욱 아름다워지길 바라던 공녀들을 위한 화장품까지, 그리고 지금은 제국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보다 편안하게, 불편하지 않게, 누구든 누릴 수 있게끔.
그러하니 이 손이 어찌 예쁘지 않을 것이며, 또 어찌 값지지 않을 것인가.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손등을 그러쥐며 말했다.
“네 손만큼 달리 귀한 것이 없는데 이렇게라도 눈에 담아두어야지.”
“……완전 여우…….”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작게 중얼거리는 음성에 테시우스가 고개를 들자 아드넬은 팩 하고 손을 빼며 이불을 머리 위로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술에 취해 이리 심장이 뛰는가 보다며 콩콩 뛰는 가슴 위로 두 손을 모아 올렸다.
하지만 침묵이 흐르며 사방이 조용해지자 계속 미뤄두었던 졸음도 차츰 밀려왔다.
아드넬은 이불 속에서 꾸벅꾸벅 눈을 감았다 뜨다가 끝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머지않아 색색 대는 숨소리가 들려오자 테시우스는 얼굴을 가린 이불을 살짝 잡아 내렸다.
혹 숨이 막히진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곤히 잠든 듯했다.
‘……이 정도는 조금 욕심을 부려도 되겠지.’
아까 나를 퍽 괴롭혔으니까.
테시우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미소 짓는가 싶더니 곧 몸을 낮추었다.
짙은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오며 완전히 눈가에 닿았을 즈음.
새하얀 이마 위로 나비처럼 가볍게, 그러나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조금은 무겁게, 그가 입을 맞추었다.
“……잘 자라, 아드넬.”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하는 입맞춤임을 아마 너는 꿈에도 모를 테지만.
다음엔 얼굴을 보며 말해 줄 수 있기를.
테시우스는 생각하며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사이 여러 가지 일도 있었다.
우선 테시우스가 합류한 술자리는 만취로 끝났고, 아드넬은 그의 침대에서 눈을 떴으며, 테시우스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테라스에 어지럽게 놓여 있던 그릇 등은 깨끗이 치워진 채였고 리들리는 저가 한 일이 아니라며, 다만 주방에 가 보니 사용한 식기들이 모두 놓여 있었다고 했다.
그날 제정신이었던 건 테시우스뿐이었으니 아마도 모두가 잠들었을 때 그가 치운 듯했다.
이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찾아보았지만, 바셀린 생산과 관련해 일거리가 밀려와 작업실에 틀어박혀야 했다.
그동안 세레나는 전처럼 아드넬과 꼭 붙어 다녔다.
테시우스에게 박대받은 것치곤 지나치게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였다.
언제 그런 냉대를 받았냐는 듯 밝은 햇살처럼 화사하게 웃고 아드넬을 성심껏 모셨다.
침구를 가는 등의 허드렛일은 늘 모나가 했는데 본인이 자처해서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품으신 분께서 선물을 기쁘게 받으셨나 봐.’
일전에 향초 만드는 법을 알려 주었으니까, 그것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싸늘한 태도보다는 살가운 태도가 나았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가을의 대표 행사인 추수제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름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늘한 가을바람에 진한 주홍빛으로 물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더구나 올해는 비도 꼬박꼬박 내려 풍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덕분에 농부들은 풍성한 수확을 만끽하며 배부른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저 평화로워 보였다. 호르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어디서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쾅 하며 책상이 크게 요동쳤다.
바스토르는 쉬이 진정하기 어렵다는 듯 이를 까득 물었다.
그가 조사를 맡겼던 호르세는 아드넬에 대한 내용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름 아닌 황후와 자신이 결탁해 테시우스를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무려, 마녀의 주술을 사용해.
“소문의 근원지는?”
“아직 찾아보는 중입니다만,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 사이에서도 간간이 말이 나오고 있어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기가 막혔다.
누구든 테시우스와 저의 모습을 본다면 그런 소리는 결코 못 할 터였다.
따듯한 어머니의 품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안쓰러운 동생을 지금껏 보살핀 게 누구던가, 두 사람의 우애는 이미 소문이 자자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이제 와 황후와 결탁해 제거하려 한다니?
그것도 제국에서 금지된 마녀의 주술을 사용해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소문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황후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나?”
“아직 모르십니다.”
“일단 내가 가 봐야겠다.”
알라니아가 움직일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이미 한 차례, 테시우스가 어머니의 속을 긁고 갔다는 보고를 듣긴 했다.
아직까지도 그를 탐탁잖게 보는 만큼 확인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바스토르는 곧장 집무실을 벗어나 알라니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