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누가 봐도 다분히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아드넬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랑 같이 있고 싶으시구나…….’
이미 병증이 크게 차도를 보이는 만큼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같이 있기가 어려웠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지금 그녀는 대외적으로 남자라 알려져 있으니까.
2황자가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에 부채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간절함이 퍽 귀여웠다.
먼저 찾아오기까지 하셨는데 거절할 수도 없잖아, 이를 핑계로 아드넬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불편하긴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지금도 딱 숨 막혀 죽을 것 같은데!
아드넬의 등 뒤로 둘러앉은 사람들 모두 파리하게 얼굴이 질렸지만 아드넬은 모르는 척 테시우스와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음……. 모나 양, 필립의 옆자리로 옮겨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럼요!”
모나는 황급히 일어나 필립의 옆에 앉았다.
와중에도 잊지 않았구나, 필립이 히죽 웃었지만 미처 보지 못한 모나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아무리 지금껏 모신 주인이래도 식사에 동석하는 건 처음인지라 조금이라도 말실수하면 난 끝이다, 하는 얼굴이었다.
이를 모르지 않는 테시우스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황자로서가 아닌 그대들과 같은 사람으로서 자리한 것이니, 그리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예, 예에…….”
알겠다고 대답은 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자 아드넬은 묘한 긴장감을 깰 겸 술병부터 들었다.
“오랜만에 한잔하시겠습니까?”
“응? 그래도 되나?”
“차도도 많이 보이고 계시고, 병증도 거의 사라졌으니 몇 잔 정도는 괜찮습니다.”
한때는 잠에 들기 위해 마셨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술을 꽤 즐기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금주령이 떨어져 이따금 퍽 아쉽던 차였는데.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테시우스가 조금 설레는 얼굴로 리들리에게 빈 잔을 건네받았다.
‘귀여워.’
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뺨 위로 미약하게 올라온 홍조기에 아드넬이 속으로 작게 웃으며 쪼르륵 술을 따라 주었다.
평소 그가 마시는 것에 비하면 다소 질이 떨어지는 위스키였지만 테시우스는 거리낌 없이 받아 마셨다.
꿀꺽하는 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그의 얼굴엔 미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입에는 좀 맞으십니까?”
“……응,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쓰지 않고 달아.”
“다행입니다.”
아드넬도 테시우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를 사랑하는 그가 마찬가지로 웃으며 화답한 건 당연한 일.
그 둘을 바라보는 제이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는 건 오직 필립만이 눈치챘다.
“참, 리들리. 그대도 음식이 입에 맞던가?”
“무, 물론입니다……! 아드넬 님이 직접 해 주신 요리인걸요.”
“음, 확실히. 누구든 한 번 먹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긴 하지. 바스토…….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무척 즐겁게 드셨으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맛보신 음식이란 말입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에 리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테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넬이 만들어 주어 함께 먹어 보았지. 그러고 보니 이건…….”
그때 테시우스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다양한 채소가 들어간 이상한 색의 스튜와 ‘쌀’이 들어가서인지 얼핏 오트밀같이 보이는 것도.
둘 다 처음 보는 음식이었지만 특유의 쿱쿱한 냄새만큼은 익숙했다.
‘다시 맡아 보니 더욱 생생하게 기억나는군.’
8년 전 델리움에서 아렌을 처음 만난 날, 달팽이에 진흙을 넣어 끓여 먹다니, 하고 기겁했던 때가 있었다.
기억에서 흐려진 얼굴만큼이나 그 냄새 또한 흐려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다시금 맡게 되니 되레 8년 전의 기억이 더 생생해졌다.
감상에 젖은 테시우스가 피식 낮게 웃은 그때였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던 제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시우스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아드넬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지금은 아드넬만 보기에도 바빴다.
그 모습에 제이든은 남몰래 주먹을 꽉 쥐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저, 2황자 전하. 저도 잠시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요?”
“음?”
“계속 고기를 구워서 그런지 얼굴이 자꾸만 익어서 말입니다.”
필립은 다소 어색한 투로 변명했다.
그리 말하는 얼굴도 퍽 멋쩍어 보였지만 제이든과 마찬가지로 테시우스의 관심사 밖이었기에 그는 대충 손을 휘저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제이든을 뒤따라 나온 필립은 곧장 그를 찾았다.
제이든은 복도 끝자락에 거의 다다라있었다.
“제이든……!”
필립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제이든에게 달려가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냅다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나랑 얘기 좀 해. 여기 말고 조용한 곳에서.”
“뭐……?”
“일단 따라와.”
필립은 제이든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빈방을 찾더니, 곧 잡동사니를 쌓아 놓은 창고를 발견했다.
그리곤 창고 안에 다짜고짜 그를 밀어 넣고 문부터 닫았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너야말로 뭐 하자는 건데?”
작은 창문 하나 달린 창고는 어두웠지만, 새어 들어오는 달빛 덕에 표정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제이든이 마주한 필립은 어딘가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네가 아드넬을 좋아한다는 거, 그리고 아드넬이 여자라는 거. 다 알고 있어.”
“……아드넬이 말해 준 거야?”
“아니, 내가 먼저 눈치챘어. 말하지 않아도 네가 그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몰라?”
예전에 그가 종종 보여 준 모습이 아닌, 당장 오늘만 보더라도 그랬다.
아침 시장에 나가면서 아드넬에게 말한 건 ‘제이든이 널 좋아하는 것 같아.’였고, 아드넬은 그와 관련해 어떤 확실한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제이든이 고기를 굽겠다 자처했을 때 그는 평소 같은 모습이었지만 아드넬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 말인즉슨 저가 말을 해서 알았든 아니든 간에 아드넬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눈치 빠른 네가 모를 리 없지, 아드넬이 불편해한다는 걸.”
“……그래서?”
“아직도 모르겠어? 나서지 말라고.”
필립은 거의 으르렁대듯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불편해하는 거 뻔히 알면서, 평소처럼 나서고 다정하게 굴고.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 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일부러 그럴 이유가 뭐가 있다고…….”
“그렇게라도 해야 아드넬이 널 신경 쓰니까.”
“…….”
어느덧 제이든의 눈동자는 차가우리만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되레 그런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나서서 사람 마음 불편하게 만들지 마. 네 감정이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같은 감정이길 강요할 권리 따위 없어.”
“누가 보면 그쪽으로 경험이 아주 많은 줄 알겠어? 여태 너한테 속사정 한 번 토로한 적 없는데 내 머릿속이라도 들여보는 양 말을 하니.”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알아.”
모나를 좋아하지만,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
천천히 다가가고 싶지만 그조차도 불편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입장이니만큼 제이든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아노라 자신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식으로 아드넬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
“그게 뭐든 간에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 눈에 띄면 그땐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 나한텐 아드넬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소중한 사람이니까.”
제이든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필립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곧 말없이 몸을 돌려 창고를 나섰다.
이윽고 내려앉은 적막은 깊고, 무겁고, 어두웠다.
‘눈치라곤 진작 밥 말아 먹은 줄 알았는데.’
피식하고 자조하는 웃음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래, 맞다.
일부러 나서서 불편하게 한 것.
그렇게라도 해서 아드넬이 날 신경 썼으면 했다.
필립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심경의 변화가 생겼냐는 그 짐작까지도.
‘……너의 표정들. 얼굴들. 그걸 내가 어떻게 모를까.’
그녀만 바라보고 사랑해 온 나날들이 얼만데, 아드넬의 표정 변화를 모를 리가 있나.
아마도 그녀는 2황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진실을 아는지는 모르지만 그 또한 같은 마음인 듯하고.
물론 한때는 네가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길 앞으로도 계속 진심으로 바라겠노라 말한 적도 있었다.
그 말마따나 그때는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니야. 내가……. 못 견디겠어.’
내가 사랑해 온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건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괴로운 일이었다.
무투회에서 아드넬에게 직접 보검을 선사하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순간엔, 화롯불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너무 뜨거워 심장은 잿더미가 되고 불어오는 바람에 하릴없이 스러져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텅 비었다는 말은 이런 걸 표현하는 걸까.
그 공허함이 나는 너무도 막막한데, 어느 순간부터 아드넬은 2황자를 볼 때면 보기 좋은 복숭앗빛으로 두 뺨을 물들였다.
간절히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을 마주한 건 내가 아니었기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의 그 찬란한 눈동자조차 마주하기 어려워서.
그래서 불편해하는 걸 알고도 나섰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이기심이었다.
“……정말로, 괴롭네.”
언제쯤이면 이 지독하게 아픈 짝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제이든은 어두운 방 안에 우두커니 선 채 오래도록, 나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