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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85)화 (85/141)

85화

아드넬이 리들리와 함께 도착했을 땐, 예상한 대로 모든 준비가 끝마쳐진 상태였다.

필립은 잔뜩 신난 얼굴로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아드넬!” 하고 외쳤다.

“말한 대로 치워 뒀지?”

“물론이지, 예전에 먹었을 때처럼 해 놨어.”

테라스는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테이블과 의자를 싹 치워 두고 나니 퍽 넓어 보였다.

다만 신문지가 바닥에 쫙 깔려 있자 리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신문을 바닥에 깔아 두셨습니까?”

“아, 이게 기름이 많이 튀는 음식이라서요. 이렇게 깔아 두면 청소가 간편해서 종종 하는 방법입니다.”

그제야 리들리도 “아아.” 하며 납득했다.

확실히, 신문을 저리 깔아 두면 치우기가 무척 편할 듯싶었다.

“자, 그럼 준비부터 하죠.”

이동식 화구는 테라스 바깥쪽에 놓여 있었다.

아드넬은 트레이 아래 칸에 넣어 둔 팬을 꺼내 화구 위로 올리고, 필립과 함께 가져온 음식들을 신문지 위에 착착 올렸다.

하지만 자연스레 아드넬이 화구 앞에 앉으려 하자 제이든이 앞을 막아섰다.

“제이든……?”

“내가 구울게,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편히 먹어.”

“아냐,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니 나한테 맡겨.”

그리 말하며 제이든은 싱긋 웃어 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임에도 그게 못내 마음이 쓰였다.

결국 아드넬은 마지못해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한편 필립은 그런 제이든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는데, 리들리가 어서 먹자며 부추긴 탓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음식입니까? 냄새가 아주 독특한데…….”

그때 리들리가 가장 중심에 놓여 있는 된장찌개와 된장 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이든과 필립은 이미 익숙해지고도 남은 음식이지만 그에게는 퍽 낯선 냄새일 터다.

아드넬은 냉큼 대답했다.

“콩을 숙성시켜 만든 ‘된장’이라는 소스를 베이스로 끓인, 일종의 스튜라고 보시면 됩니다. 냄새가 좀 독특하긴 하지만 맛이 아주 구수하고, 속을 따듯하게 덥혀 주지요. 이 쌀밥과 함께 드셔보십시오.”

그 말에 리들리는 주저 없이 수저를 들었다.

일찍이 제육볶음을 먹어 본 이후로 그는 아드넬이 만든 음식이라면 아무리 처음 보는 것이라도 일절 거리끼지 않았다.

그렇게 밥을 한 술, 이윽고 찌개 국물을 한 모금 넘긴 리들리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한가득 떠올랐다.

“……정말 그렇군요! 살짝 매콤하긴 하지만 아주 깊은 맛이 납니다. 간도 적절하고, 추운 겨울날 먹기엔 이만한 음식이 없을 것 같아요.”

“그 옆에 있는 음식은 쌀밥을 넣어 푹 끓인 ‘죽’이라는 것인데, 식감이 훨씬 부드럽습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이번에도 리들리는 주저 없이 수저를 들어 죽을 크게 한술 떴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죽을 몇 번 후후 불어 식히던 그는 금세 된장 죽도 맛보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매우 놀라며 극찬했다.

“이렇게 부드러운 식감이라니! 이 음식이라면 어린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제국에선 아픈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고 하면 우유를 부어 만든 오트밀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죽은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도 천차만별이거니와 먹기도 편하고 부드럽다.

아플 때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음식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삼겹살을 맛보여드리겠습니다. 시범은 저번처럼 여기, 필립이 보여 줄 겁니다.”

리들리가 찌개와 죽을 맛보는 사이, 옆에선 제이든이 열심히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먹어 본 음식인지라 그는 능숙하게도 삼겹살 옆에 잘 익은 김치와 얇게 자른 마늘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삼겹살이 익어갈수록 필립과 리들리는 연신 군침을 삼켰다.

소리나 비주얼도 그렇지만 단순히 고기를 굽는 것뿐인데도 여기서 나는 냄새가 정말이지 미친 듯이 허기를 자극했다.

다 구워진 삼겹살은 넓은 접시에 담겨 자리의 중간에 놓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필립이 오크 리프와 치커리를 집어 들었다.

“먼저 이 채소 위에 하얀 쌀밥을 적당량, 그리고 삼겹살을 두 점, 구운 김치랑 마늘을 올립니다. 그리고 소스는……. 쌈장!”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이미 한 차례 쌈 싸 먹는 법을 배웠다 보니 리들리는 금세 잘 따라 했다.

필립은 만족스럽다는 듯 그가 만든 쌈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지요? 쌈은 무조건 한입에!”

“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신들이 만든 쌈을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와그작 하며 채소가 씹히는 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리들리의 눈동자가 감격으로 물들어갔다.

“……아드넬 님…….”

“왜 그러십니까?”

“자꾸만 제 입맛을 이리 고급스럽게 바꿔 가시면 전 어떡합니까, 벌써 아드넬 님이 가실 날이 원망스럽습니다.”

리들리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지으면서도 열심히 삼겹살 쌈을 씹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리들리 님을 부르지 않으면…….”

“그건 절대 안 되지요!”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퍽 귀여운 그를 보며 아드넬이 싱긋 웃어 보였다.

“언제까지고 별궁에 있을 수는 없지만 원하신다면 카르카스에 돌아가서도 종종 소스와 요리법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제가 만든 음식을 이렇게나 좋아해 주시는데 당연히 보내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아드넬 님!”

리들리는 진심으로 기뻤는지 거의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물론 와중에 손은 열심히 쌈을 싸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닫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필립……!”

“우, 우웅!”

이미 두 번째 쌈이 입 한가득 들어있는데, 하필 이때 모나가 도착한 것이다.

필립은 다급하게 쌈을 와작와작 씹어 삼키고는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아내고 숨을 골랐다.

“……모나 양.”

“어마, 제가 식사를 방해한 건가요?”

“아, 아닙니다. 제가 급하게 먹어서 그런 겁니다.”

하지만 묻은 줄도 몰랐던, 입가에 살짝 묻은 쌈장의 흔적에 모나가 자기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필립이 황급히 손등으로 닦아 내었다.

그리곤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냉큼 몸을 비켜섰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잔한지, 쩔쩔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아드넬의 눈동자가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이 도와줘야 할 것 같았다.

“이쪽입니다, 모나 양.”

“불러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드넬 님. 이건 제 작은 선물이랍니다.”

식사도 먼저 시작한 데다 그리 대단한 자리도 아닌데, 모나는 상냥하게도 자그마한 향주머니를 선물로 챙겨 내밀었다.

고급 화장품에 속하는 향수는 도저히 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평민들은 향수 대용으로 말린 꽃잎 같은 것을 주머니에 넣어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모나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던 것이다.

향수도 만들 줄 아는 아드넬에겐 크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지만 준비한 마음이 고마워 아드넬은 감사히 받았다.

“뭐가……. 굉장히 많네요?”

한편 모나는 아드넬의 옆에 앉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접시 개수에 무척 놀랐는데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동식 화구에 굽는 생고기며 빨간 채소며, 소스가 담긴 종지만 무려 3개에 온갖 다양한 채소와 뭘 넣었는지 의심스러운 갈색 스튜까지.

그야말로 한가득이었던 것이다.

“어떤 음식인지는 금방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제이든, 이만 필립이랑 바꿔 줘.”

“아냐,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잠깐이라도 바꿔, 제이든도 편하게 먹어야지.”

말은 그렇게 하는데 속내는 따로 있었다.

‘필립이 바로 내 맞은편이니까, 구우면서 계속 모나 양한테 주게 하는 거야. 그러다 분위기가 좀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모나 양이랑 자리도 바꾸고.’

뻣뻣하기 그지없는 필립을 보노라니 안쓰러워 이렇게라도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이든은 계속 버티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필립이 아드넬의 저의를 눈치채고 먼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그래, 제이든. 가서 좀 먹고 있어.”

“…….”

상당한 아픔이 느껴지는 악력에 제이든은 조용히 일어서 자리를 바꾸었다.

모르긴 몰라도 뭔가 속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시금 식사가 시작되고, 아드넬과 필립은 번갈아 가며 리들리에게 해 준 것처럼 음식을 설명해 주었다.

중간중간 리들리도 맛이 어떤지에 대해 거의 찬양하듯 설명해 주어 낯선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모나는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반응은 리들리와 비슷했다.

“세상에나……!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그녀의 입에도 무척 잘 맞는 듯, 모나는 거리낌 없이 오크 리프를 들어 쌈을 싸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런 모나를 보면서 대놓고 흐뭇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나 양이 정말 마음에 드나 봐. 저런 얼굴은 또 처음 보네.’

오늘따라 필립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하는 것 같았다.

술도 진작 챙겨왔는데 살짝 취기가 돌 즈음 이성에 관련된 주제를 꺼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차츰 무르익고, 음식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다섯 명은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정말이지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불청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드넬.”

묵직한 음성에 한창 웃고 떠들던 아드넬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모두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는데, 다름 아닌 2황자의 침실과 연결된 문으로 그곳엔 당연하다는 듯 테시우스가 서 있었다.

“……2황자 전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드넬은 깜짝 놀란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가다시피 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실은…….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리기에, 조금 심심하기도 해서.”

사실 테시우스는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드넬이랑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반, 내가 가면 모두가 불편해진다는 생각 반으로 고뇌한 것이다.

그래서 나름 참는다고 참아 보았는데, 아드넬의 맑은 웃음소리를 들은 순간 인내심을 잃고 문부터 열어 버렸다.

테시우스는 멋쩍은 듯 볼을 살짝 긁으며 허락을 구했다.

“많이 불편하지 않다면, 나도 끼워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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