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순간 아드넬의 눈동자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게 지금껏 필립이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곰처럼 덩치가 우람하긴 해도 오히려 그게 매력이라며 따라다니는 여자도 종종 있긴 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마음을 준 적이 없다.
그랬던 필립이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대체 누구기에?
호기심이 잔뜩 동한 아드넬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데? 어디서 만난 사람이야?”
“그게……. 별궁에서 본 사람…….”
“그러니까 누구?”
“……모나 양…….”
필립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은 이름은 아드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모나는 아드넬이 별궁에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모시는 하녀였고, 그렇다 보니 다른 하녀들에 비해 자주 마주치기도 했다.
아드넬이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리자, 필립은 부끄럽다는 듯 볼을 살짝 긁으면서도 덧붙였다.
“다른 하녀들에 비해 훨씬 조신하고……. 목소리도 예쁘시고……. 얼굴도……귀엽고…….”
인제 보니 필립은 천생 여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모나가 조신한 여성상이긴 하지, 아드넬은 격하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모나 양 정도면 진작 결혼하고도 남았을 텐데.”
“전에 한번 슬쩍 물어보니까 집안에 빚이 좀 있어서 아직까지 일을 계속하는 거래. 다만……. 이젠 거의 다 갚아서, 자기도 슬슬 좋은 사람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런 사적인 대화까지 나눌 정도면 필립이 꽤 들이대 본 듯한데, 모나가 한 얘기에선 딱히 그를 향한 감정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필립도 아는지 말하면서도 퍽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모나 양이랑 필립이라…….’
반면 아드넬은 그의 깜짝 고백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해 보니 꽤 잘 어울렸다.
필립은 섬세하긴 하나 다소 둔한 면이 있고, 용병 일을 오래 했다 보니 욱하는 성정도 있었다.
그런 그를 모나 양이라면 아주 제대로 길들일 것 같았다.
나긋나긋하게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필립이 넙죽 엎드릴 것 같달까.
‘전형적인 대형견 스타일이니까.’
아드넬은 생각을 마치고 필립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을 위한 아주 좋은 계획이 떠오른 것이다.
“필립, 오늘 저녁에 삼겹살 먹기로 한 거 기억나지?”
“응, 그래서 시장까지 온 거잖아. 그건 왜?”
“그 자리에 모나 양도 초대하면 어때?”
순간 필립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사실 오늘 삼겹살 파티엔 아드넬과 제이든, 필립, 그리고 저번에 약속했던 리들리만 참석할 예정이었다.
여기에 모나 한 명 정도 추가하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정말 그래도 돼?”
“모나 양이 필립 같은 대식가도 아니고, 사람 한 명 더 부른다고 자리가 아주 모자란 것도 아냐. 의자 하나만 더 가져오면 되는걸.”
“……난 좋아!”
그 말마따나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듯, 필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콧김을 내뿜었다.
잔뜩 흥분한 얼굴엔 신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 참, 황태자는……. 안 불러도 되겠지?’
다만 삼겹살 파티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바스토르도 생각났다.
이 음식을 먹을 땐 자기도 꼭 불러 달라 했는데.
아드넬은 잠깐 고민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와의 식사라니, 다들 부담스러워서 체하고 말 거야. 모나 양이랑 필립을 제대로 밀어주지도 못할 테고.’
어차피 그 사람은 안 부르면 하는지도 모르니까.
아드넬은 필립을 올려다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면 마저 먹고 사서 돌아가자. 모나 양은 필립이 직접 초대해.”
“알았어!”
잠시 후 아드넬은 필립과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재료를 샀다.
쌈장이나 고추장 등의 양념은 모두 별궁에 있어 주재료인 삼겹살과 여기에 곁들일 채소만 사면 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삼겹살 외에 한 가지 음식을 더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다름 아닌 된장찌개였다.
‘냄새는 조금 낯설지 몰라도 맛은 괜찮을 거야.’
삼겹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구수한 된장찌개!
리들리가 술을 좋아하니 술안주로도 딱 제격일 듯싶었다.
다만 애호박은 따로 파는 곳이 없어 아드넬은 찌개에 들어갈 양파와 감자, 무, 고추 정도만 구매해 별궁으로 돌아갔다.
식재료가 잔뜩 담긴 장바구니는 필립이 들어주었는데 그는 주방에 장바구니를 내려놓기 무섭게 모나를 찾으러 쌩하니 자리를 떴다.
그렇게 주방에는 아드넬과 리들리만이 남게 되었다.
“이번에도 2황자 전하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시는 건가요?”
그때 리들리가 묵직한 장바구니를 쳐다보며 묻자, 아드넬이 싱긋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손님이 있어요.”
“다른 손님이라면…….”
“일전에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꼭 한 번 맛보여드리겠다고요.”
“……아!”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리들리가 탄성을 내뱉으며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만족하실 겁니다. 이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거든요.”
“그런 음식이라니 무척 기대되는군요,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주방에 자리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리들리 님께선 2황자 전하의 식사를 준비하셔야 하니 오늘은 저 혼자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오늘만큼은 속도를 내 보지요!”
아직 저녁때까진 한참 멀었는데도 벌써 설레는지 리들리는 씩씩하게 말하며 소매를 걷어 보였다.
한편 그 시각, 필립은 모나를 찾아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침구류를 들고 세탁실로 향하는 모나를 발견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흠흠.”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힘차게 외쳤다.
“모나 양……!”
“……필립?”
우렁찬 목소리에 모나가 고개를 돌리자, 필립이 쿵쿵 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원체 덩치가 커 필립이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햇빛이 완전히 가려졌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 혹시 오늘 저녁에 달리 약속이 있으십니까?”
어떻게든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주먹을 움켜쥐었는데도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다행히 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뇨, 오늘은 특별한 약속이 없어요.”
“그러시면……! 그, 저와 함께 저녁을 드시는 건 어떠십니까?”
“제가……. 필립 님과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모나가 조금 당황하자 필립이 황급히 덧붙였다.
“실은 오늘 아드넬……. 아니, 아드넬 님이 특별한 식사 자리를 준비하셔서요. 전에 주방장님께 맛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한 음식인데, 아주아주 맛있습니다. 모나 양도 함께하시면 어떨까 싶어…….”
그제야 모나도 “아아.” 하며 이해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제가 가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이미 아드넬 님께 허락도 받았습니다……! 얼마든지 오셔도 괜찮습니다.”
혹여 거절당할까 필립이 다급하게 말하자 모나는 “그렇다면…….” 하고 나지막하게 덧붙이더니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을 것 같아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녁쯤, 아드넬 님의 침실로 오시면 됩니다!”
“침실이요? 거기서 식사를 한단 말인가요?”
“정확히는 테라스에서 먹을 겁니다.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되실 테니 꼭, 참석해 주십시오!”
필립이 히죽 웃어 보이자 모나도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좋아요. 그럼 저녁 때 뵈어요.”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리들리가 한창 테시우스의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드넬은 주방 한쪽에서 삼겹살 파티를 위한 음식을 준비했다.
‘먼저 채소부터.’
삼겹살을 싸 먹을 오크 리프부터 시작해서 치커리와 케일, 곁들여 먹을 마늘과 찌개에 넣을 다양한 채소들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다음엔 쌀을 씻어 불리고, 불리는 동안엔 육수를 우려내고, 우러나는 동안엔 양파와 감자 등의 채소를 한 입 크기로 잘랐다.
조금의 시간 낭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이젠 양념을 만들어 볼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삼겹살과 곁들일 양념은 기름장과 쌈장, 고추장이었다.
원체 자주 만들던 것이라 이 또한 금세 끝났다.
먹음직스러운 선홍빛 삼겹살은 넓은 접시에 보기 좋게 올려두고, 양념장과 함께 트레이로 옮겨 두었다.
불린 쌀도 불 위로 올리고, 육수가 어느 정도 우러났을 땐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본격적인 찌개 만들기에 돌입했다.
곱게 빻은 고춧가루며 미리 잘라 둔 채소들도 모두 넣었는데, 찌개가 완성될 즈음 아드넬은 새 냄비를 하나 꺼내 찌개를 덜어 담았다.
사실 오늘 된장찌개 말고도 다른 음식을 더 만들려던 것이다.
‘나는 찌개보단 이게 더 좋더라.’
아드넬의 취향이 잔뜩 반영된 음식은 다름 아닌 된장 죽이었다.
찌개에 밥을 말아 먹는 것도 좋지만, 아드넬은 찌개에 밥을 넣고 팔팔 끓여 먹는 구수한 된장 죽을 더 좋아했다.
완성된 찌개와 쌀밥은 곧장 트레이 위로 올라갔지만, 새 냄비에 덜어 담은 찌개엔 밥을 넣어 팔팔 끓인 뒤에야 트레이로 옮겨졌다.
“다 끝나셨나요, 아드넬 님?”
“네. 거의 다 마쳤습니다.”
그동안 2황자의 식사 준비를 마친 리들리가 아드넬에게 다가왔다.
그는 미처 끝내지 못한 뒷정리를 도와준 뒤 자처해서 트레이를 맡았다.
“이대로 가져가기만 하면 될까요?”
“예, 자리는 제 조수들이 모두 준비했을 겁니다.”
지난번 제육을 먹었을 때는 완성된 요리를 쌈에 싸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테이블을 그대로 두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삼겹살을 굽다 보면 기름도 튀고 냄새도 많이 나서 테라스의 테이블과 의자들을 모두 치워 달라 부탁한 것이다.
대신 시장에 나가면서 사 온 신문을 바닥에 깔아 두었다.
아마 지금 가면 이동식 화구까지 세팅되어 있을 터였다.
“그럼 가시죠!”
리들리가 씩씩하게 말하며 트레이를 달달 끌고 나섰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 즐거운 삼겹살 파티에 불청객이 찾아올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