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어느덧 여름이 끝나가며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공기는 조금 뜨거울지 몰라도 바람만큼은 선선한 계절에 아드넬은 한 가지를 기획했다.
‘예전에 약속한 것도 지킬 겸.’
요즈음 제이든과 필립 두 사람을 너무 멀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제이든의 고백이며 2황자의 정체며 여러 가지 일이 겹친 탓에 일부러 피한 것인데 한창 바쁠 때는 필립이 찾아와도 졸리다며 돌려보내기 일쑤였으니 적잖이 서운할 터였다.
그래서 아드넬은 테시우스와의 식사 자리를 준비하며 리들리에게 약속한 삼겹살을 맛보여 주기로 하고 필립과 함께 별궁을 나섰다.
‘아무래도 제이든은 아직 조금 불편해.’
그의 고백을 거절하고 난 뒤 평소 같은 모습으로 대하긴 하지만 살짝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어서인지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아드넬은 필립만 데리고 마차에 올라탔는데, 그때 장바구니를 품에 안고 탄 필립이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아드넬,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뭔데?”
“혹시 제이든이랑 무슨 일 있었어?”
“어……? 갑자기 그건 왜…….”
“요즈음 좀 이상해 보여서.”
필립의 눈에 보일 정도로 티가 났던 걸까, 아드넬이 당황하자 필립은 덤덤하면서도 조금 찌푸려진 얼굴로 말했다.
“전에 들렀던 라그랑 여관에서부터 이상했어.”
“이상하다니? 뭐가?”
“2황자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대뜸 화를 내더라고.”
“……뭐? 제이든이 그랬다고?”
“응.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더니 자기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냐면서 너한테 갔어.”
“…….”
들은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에 아드넬이 눈을 크게 떴다.
‘나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테시우스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을 때, 제이든은 그가 병의 재발이 두려워 더 의지하게 된 것 같노라 답했었다.
그래서 남자 마음은 남자가 더 잘 알겠지 하며 수긍했고.
그런데 필립이 들은 얘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렇구나. 내가 계속 2황자 전하를 신경 쓰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까, 일부러 다르게 말한 게 분명해.’
당시 그는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누군가가 널 좋아한다는 말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하고 싶진 않았겠지.
아드넬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그때 필립이 예의 진중한 얼굴로 아드넬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제이든이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어……?”
순간 말문이 막혀 아드넬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눈치라곤 전혀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저 짧은 대화만 가지고 추리할 거라곤 예상도 못 한 것이다.
하지만 뒤이은 한 마디에 아드넬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여자잖아, 아드넬.”
“……언제부터 알았어?”
“카르카스에서 같이 살 때 눈치챘어.”
제이든도 그때 알았다고 했는데, 혹시 나도 모르는 새에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아드넬이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예전에 한창 여행할 때야 늘 방도 따로 잡고 돌아다니느라 바빴으니 크게 생각을 못 했는데 한 집에 붙어살다 보니 알겠더라. 매달 한 번씩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그렇고, 가끔 새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아…….”
“그냥,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말을 안 한 것뿐이야.”
“……미안.”
혹시 섭섭했을까 싶어 아드넬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필립은 고개를 가볍게 저어 보였다.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다들 말 안 하는 속사정 하나쯤은 있잖아.”
“…….”
“아무튼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네. 일단 알겠어.”
필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나와 제이든이라, 그리 자신했는데 이제 와 보니 전혀 아니었다.
그동안 그가 계속 신경 쓰게끔 행동한 것도 못내 미안했다.
그래서인지 시장으로 향하는 내내 마차 안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마차 보관소에 도착하자 필립은 아무렇지 않은 듯 씨익 웃어 보이며 아드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해서 내려, 아드넬.”
“으응.”
그는 여전히 친절했고,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으레 보여 주던 평소와 같은 모습에 아드넬도 그제야 웃어 보이며 손을 잡고 내려올 수 있었다.
생기로 가득 찬 아침 시장은 일전에 가 봤던 야시장과는 조금 색다른 느낌이었다.
물건을 올려두고 파는 가판대나 호객하는 상인들은 여전하지만 훨씬 생동감이 넘치고, 판매하는 것들도 하나같이 싱싱해 보였다.
만취한 취객 대신 아침 장을 보러온 여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사려는 실랑이도 종종 벌어졌다.
그동안 아드넬은 찬찬히 시장을 둘러보다 어느 가게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맙소사, 이게 뭐야?’
그녀가 멈춰 선 곳은 전생에서 보았던 푸드 트럭과 흡사한 모양새의 마차로, 마차 위엔 여러 가지 요리 기구와 이동식 화구, 식재료들이 한가득이었다.
마차 옆엔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음식을 주문한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식사를 마치고 나면 빠르게 자리를 비워 주었다.
음식이 나오는 속도도 빠를뿐더러 가로로 세워 둔 마차 전면에 달린 조악한 메뉴판엔 음식 그림과 가격이 간략하게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바쁜 아침에 식사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간단하게 배를 채우기 위해 오는 것 같았다.
‘꼭 해외여행이라도 온 것 같네.’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못 가 본 동남아 나라에서 쉬이 볼 수 있는 간이 식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드넬은 신기한 눈으로 마차 가까이 다가갔다.
가게 주인은 나이가 꽤 지긋한 중년 여성이었는데 아드넬이 다가오자마자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오세요! 무엇으로 드릴까요?”
“저, 제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요. 여긴 뭐가 맛있나요?”
아무리 음식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한들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금세 번지는 목탄으로 대충 그린 것이라 무슨 음식인지 알아보기는 영 어려웠다.
아드넬이 묻자 가게 주인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가락을 탁 튕겨 보였다.
“아침을 해결하려는 건가요, 아니면 도시락을 싸 가려는 건가요?”
“음……. 아침이요. 아, 2인분으로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제가 추천 메뉴로 알아서 만들어드리죠. 음식값은 선불, 총 8페논 되겠습니다!”
두 명분이 거진 8천 원이라니, 아드넬은 저렴한 가격에 놀라면서도 주머니에서 1크라운을 꺼내 내밀었다.
가게 주인은 거스름돈을 내어준 뒤 마차 옆 간이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요. 음식 나오면 부를 테니 받으러 오고!”
“아, 네.”
여기도 셀프 문화가 있구나, 아드넬은 새삼스러운 기분에 볼을 살짝 긁으며 필립과 함께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시장 속 유일하게 앉아 쉬어가는 공간이라니.
그동안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했지만 이런 가게는 처음이라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신기하다, 그치?”
“응. 여행하면서 한 번도 못 봤는데, 수도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
필립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아드넬과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응시하며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주문한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가게 주인은 “거기, 예쁘장한 청년!” 하고 버럭 외쳤다.
“와서 주문한 것 받아 가요!”
“네, 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아드넬은 깜짝 놀라 냉큼 마차 앞으로 달려갔다.
식재료가 담긴 재료통 앞, 비죽 튀어나온 나무판자 위엔 희뿌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다만 혼자 들면 자칫 쏟을 것 같았는지 필립이 눈치 빠르게 뒤따라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릇을 하나씩 든 채로 자리에 돌아가 앉았는데, 그제야 무슨 음식인지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깊이가 꽤 되는 나무 그릇엔 진한 크림수프가 거의 넘치도록 담겨 있었고, 어슷하게 자른 빵 두 조각과 나무 수저가 푹 잠겨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냄새가 퍽 고소했다.
아드넬은 수저를 들어 수프를 한 번 저었는데, 무언가 걸리는 느낌에 푹 떠 보니 먹음직스럽게 익은 닭고기 조각이 나왔다.
‘꽤 괜찮은데……?’
닭고기가 들어간 크림수프에 빵까지 곁들였는데 4천 원꼴이라니, 하지만 음식이란 자고로 맛이 중요하다.
아드넬은 수프를 한술 떠 후후 불어 식힌 뒤 입에 넣었다.
“……음!”
하지만 맛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무색하게도, 크림수프는 정말 맛있었다.
크림에 우유를 섞었는지 무척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했다.
여기에 적당히 익은 감자와 당근, 그리고 닭고기가 수프 특유의 부족한 식감은 물론 포만감까지 채워 주었고, 은은한 파슬리 향이 풍미를 더 했다.
반쯤 잠긴 빵의 절반은 포삭포삭하면서 부드럽고, 윗부분은 또 적당히 바삭해서 먹는 재미가 있었다.
‘맛도 좋은데 배도 부르고 가격까지 저렴해!’
만약 출퇴근하는 사람이었더라면 매일 여기서 끼니를 해결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은근히 아쉬웠다.
‘다른 메뉴도 먹어 보고 싶은데 매일 나오기는 어려우니…….’
이런 음식을 다른 사람만 먹는다니 괜스레 억울하기까지 했다.
문득 삼겹살을 먹을 때면 자기도 꼭 부르라던 바스토르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때, 입에 맞아?”
“……완전!”
마찬가지로 수프를 한 입 먹어 본 필립이 엄지를 척 들며 격하게 수긍했다.
원체 대식가이니 이 정도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아 아드넬이 슬그머니 일어나 한 그릇 더 주문하려 하던 그때였다.
“아드넬, 더 주문하지 않아도 돼.”
“응? 모자라지 않아?”
“모자라긴 한데…….”
그런데 말하는 얼굴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답지 않게 두 뺨이 살짝 익었다고나 할까, 아드넬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말했다.
“실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