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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82)화 (82/141)

82화

그래서일까.

어딘가 울컥하며 감정이 차올랐다.

테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을 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도 압니다……! 마녀란 존재가 제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아요! 하지만 제가 왜 그 길을 선택했는데, 전하께선 제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지?”

“제가 왜 능력을 개방하고, 그 힘을 썼는데…….”

아드넬은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지만 울음은 쉬이 그치질 않았다.

그만큼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전하께서 너무도 힘들어하시니까, 능력을 써서 치료제도 만들고, 혹여나 들킬까 근육통 연고라 둘러대고, 저는 전하를 위해 그런 건데,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기나 하고…….”

연신 훌쩍여서인지 말하면서도 중간중간 말이 멈추었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벙한 얼굴로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아차.” 하며 황급히 아드넬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아니, 화내려던 것이 아니야. 네가 한 말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사실이 알려지면 네가 위험할까 봐…….”

“그리 걱정되시면 위로를 해 주셔야지, 왜 무섭게 눈을 치켜뜨시는데요……! 난 정말 목숨을 걸고 말한 건데, 내 마음도 모르면서…….”

“미, 미안하다, 아드넬. 그러니까 울지 말고, 응? 얼른 뚝 그쳐, 내가 미안하다.”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며 서럽게 훌쩍이니 테시우스는 무척 당황한 듯 아드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였다.

아까 보여 준 태도와 상반되는 다정한 손길에 서러움은 배가 되어 아드넬은 결국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말았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미안하다, 아드넬. 내가 다 잘못했다, 다 내 잘못이야.”

“당연히 전하 탓이지요……! 다짜고짜 잡아 와서 치료하라 명하더니, 치료해드리고 나니까 차갑게 말하기나 하고!”

“으응, 맞아. 내 탓이고 말고. 그러니 그만 눈물을 그쳐, 눈시울이 발갛다.”

우는 사람을 달래 본 적이 여태 한 번도 없다 보니 등을 토닥이는 것이며 말하는 것이며 모두 서툴기 그지없었다.

이 와중에 그 서툰 태도가 귀엽게 느껴질 줄이야, 아드넬은 밉다는 듯 테시우스를 향해 눈을 흘기면서도 훌쩍였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서야 아드넬은 가까스로 눈물을 그치고 진정했다.

그제야 테시우스도 안도하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무튼……. 제가 말씀드린 것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말씀드렸어요. 믿고 안 믿고는 전하의 몫입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제이든과 필립도 모르는 비밀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테시우스는 떨리는 눈동자를 잠시간 응시하는 듯하더니 발간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슥 훑으며 말했다.

“모두 믿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한 말이니.”

“…….”

“다만 마녀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노라 약속해 줘.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그것만은 안 돼.”

그건 아드넬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녀라는 게 밝혀지기만 해도 즉결 처형당하는 제국에서 비밀을 아는 사람을 한 명 더 만들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드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요.”

“그래…….”

한편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대뜸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스토르가 그에게 장난칠 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따듯한 손길이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아무리 전생의 기억이 있다 한들 너는 어렸고, 혼자였는데. 험한 세상을 참으로 잘 버텨 왔어.”

“……그건 전하도 마찬가지…….”

“나는 그래도 윤택한 삶을 살았지. 너에 비하면 내가 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 말하며 미약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물론 나도 엄마를 잃고 슬프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와의 기억은 갖고 있는데.

그조차도 갖지 못한 이가 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니 마음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동안 위로의 눈빛을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면 이제는, 할 수 있었다.

아드넬은 처음으로 손을 올려 그의 뺨을 감싸듯 덮었다.

그 손길에 테시우스가 눈을 크게 뜬 순간 그녀가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잘 버티셨어요. 이리 멋진 사내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때 테시우스는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 눈에, 멋진 사내인가?”

“물론이지요.”

하지만 이리 대번에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가 해 준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박동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드넬이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제 눈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지신 분이 바로 전하이십니다. 그러니 더는 자신을 깎아내리지도, 몰아세우지도 마십시오.”

“그 말은…….”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마음속에 성큼 들어와서는, 마주하는 매 순간 혼란스럽게도 절 뒤흔들고 가십니다.”

한때 테시우스가 그녀에게 내뱉은 고백이었다.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던 그 날의 진심을, 아드넬은 진실된 눈으로 마침내 드러냈다.

“그러니 제가 전하를 이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모두 전하 때문입니다.”

“……아드넬!”

그 순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테시우스가 아드넬을 덥석 껴안았다.

그의 가슴께에 귀가 닿자마자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드넬은 그런 테시우스의 등을 마찬가지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곁에 있겠습니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제게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 * *

‘또, 둘이 같이…….’

어두운 복도에 선 검은 인영, 다름 아닌 세레나였다.

아드넬이 테시우스와 함께 본성으로 향한 뒤 홀로 방에서 얼마나 울었던가.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갔다가 돌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또다시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황자가 저 맹한 남자애를 좋아할 리는 없으니 아무래도 화장품이나 치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인데, 세레나가 안쪽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이대로는 안 돼.’

아드넬이 테시우스와 엮일 때마다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와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인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옆에 딱 붙어선 꼴이라니.

그게 얼마나 거슬리는지 이젠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초조함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어차피 곧 가을이야. 그때가 되면…….’

후작의 계획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밑 작업을 해 둬야 하니, 조만간 제게 찾아올 테지.

‘시일이 조금 앞당겨지는 것 정도는 괜찮아.’

세레나는 섬광처럼 번뜩이는 눈빛으로 닫힌 서재 문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곧 팩하고 몸을 돌렸다.

이미 시간도 늦어 펠릭스는 자신의 방에 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2황자의 침실은 비어 있단 소리다.

‘술을 좋아하시니 들키지 않을 거야.’

오죽하면 서재에도 술을 진열해 놓은 진열장이 따로 있다 들었다.

세레나는 약병을 든 손에 힘을 준 채 테시우스의 침실로 향했다.

잠시간 주변을 살펴본 그녀는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 없는 빈방이나 조명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

그런데 침실 안을 두루 살펴도 술병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열장 비슷한 것이 있긴 했지만 텅 비어 있었고, 테라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세레나가 가져온 약은 그녀가 건 주술을 더욱 강화하는 약이었다.

이미 한 차례 변했다가 사람으로 돌아왔으니 가을이 끝나갈 무렵 또 한 번 변하게 될 텐데, 후작의 계획을 위해선 짐승의 모습으로 있는 시간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힘이 부족해 목걸이가 없으면 주술을 풀 수 없지만…….

‘뭐, 그거야 후작이 찾아낼 테니 내 알 바는 아니지.’

모자란 힘이야 목걸이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거니까.

다만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 것이라 2황자가 즐겨 마시는 술에 타 두려던 건데, 낭패였다.

세레나는 황급히 다른 대체품을 찾았다.

몸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몸에 닿기라도 해야 했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한 가지 물건이 들어왔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로션 통으로, 살짝 들어보니 자주 사용한 듯 그리 무겁지 않았다.

‘이거면 되겠어.’

세레나는 씨익 웃으며 용기의 뚜껑을 열고 자신이 가져온 약을 쪼르륵 따라 넣었다.

그리곤 거세게 흔들어 섞고 다시금 뚜껑을 돌려 닫았다.

복용은 어려우니 추수제가 시작될 즈음 한 번 더 약을 타면 얼추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할 일을 마치고 몸을 막 돌린 참이었다.

‘……잠깐만, 저게 왜…….’

그러나 돌아가려던 세레나의 걸음을 붙잡은 건 또 있었다.

다름 아닌 샛노란 빛깔의 향초로, 그녀가 얼마 전 2황자에게 만들어 선물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번에 거절당했지. 그런데 저게 있다는 건…….’

제가 만들어 준 건 그대로 들고 돌아가라 해서 아직도 방에 있었다.

그러니까 저 향초는, 분명 아드넬이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수모를……!’

그 맹한 남자애가 준 건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만들어 준 건 거절하다니!

일순 세레나의 눈동자에 독기가 한가득 차오르며 절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세레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향초를 집자마자 바닥에 내려치려는 듯 팔을 높게 들었다.

당장이라도 집어 던져 완전히 깨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던 물건이 산산조각이 나면 불청객을 찾아내려 대대적으로 수색을 벌일 터, 치켜든 팔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진심으로 망가트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욕지기가 나왔다.

결국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가까스로 향초를 내려놓긴 했으나 분노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안 되겠어, 그 남자애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지.’

어차피 2황자의 저주는 자신만이 풀어 줄 수 있고, 비기만 사용하게 된다면 그가 앓는 병 또한 씻은 듯이 사라질 터다.

그러니 아드넬의 존재 따위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다.

세레나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약 배합을 곰곰이 생각하며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테시우스의 침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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