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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81)화 (81/141)

81화

아드넬이 세상 빛을 막 보았을 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전생의 기억은 당연하지만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갓난아기에 불과한 아드넬이 기댈 곳이라곤 엄마, 아드리아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숨겼다.

말하지 않고,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말한들 믿기도 어렵고, 믿어 주리란 보장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를 돌보고, 사랑하고, 아껴 주고, 감싸 주었다.

그래서일까.

아드넬은 어느 순간부터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정말 어린아이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따금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모습이 나오긴 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조차도 사랑으로 품어 주었다.

오히려 일찍이 글을 가르쳐 주며, 그녀가 낸 문제를 맞힐 때면 기특하다며 뺨에 얼굴을 부비곤 했다.

아드넬은 그런 엄마가 좋았다.

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면서도 늘 환한 미소를 보여 주던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진실을 듣고도 절대 날 버리지 않을 거라 확신을 가질 만큼.

‘그리고 엄마는 정말 그랬어. 날 이상하게 보지 않았어.’

7살이 되던 해, 큰 결심을 하고 마침내 털어놓은 비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혹여나 엄마가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싶어 지금껏 숨겨 왔노라 말했다.

다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데도 가슴 한쪽은 여전히 두려웠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엄마는.

그런 아드넬을 따듯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소중한 내 딸. 네가 무엇을 기억하든, 또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엄마는 언제나 지금보다 더 너를 사랑할 거야.’

오히려 혼자 얼마나 속앓이했겠냐며 다독여 주었다.

그날 아드넬은 태어나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그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아드리아나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했다.

서글픈 마음을 눈물로 모두 쏟아내고 나선 밤새 조잘조잘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것을 만들었고 등등 기억나는 것이라면 별것 아닌 이야기도 모두 말했다.

그 이야기들을 들은 뒤 아드리아나는 말했다.

‘혹시 지금도 화장품을 만들고 싶다면 엄마가 도와줄게. 필요한 재료가 있는지만이라도 알아보는 건 그리 큰돈이 들지 않을 거야.’

당시 아드넬은 한사코 만류하며 거절했다.

화장품은 귀족의 전유물인데 저 같은 평민이 만든다고 팔릴 리도 없고, 사치품이라 평민을 대상으로 팔 수도 없다며 나중에 어른이 되면 자기가 알아서 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드넬의 다짐 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나는 훌륭한 목표라며 밝게 웃어 보이고는 그녀 몰래 주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다 나 때문이야.’

아드리아나는 아름다웠다.

아이까지 딸렸는데도 추파를 던지는 사내들은 차고 넘치게 많았다.

주점에서 일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지만 줄곧 기피하며 삯바느질 같은 돈 안 되는 일만 해 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주점에서 일을 시작할 일도, 잔뜩 취한 손님을 만날 일도, 그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일도.

모두, 없었을 텐데.

‘엄마…….’

아드리아나의 죽음은 아드넬에게 크나큰 죄책감으로 자리 잡았다.

테시우스가 한때 겪었던 것처럼, 그 죄책감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새 과거를 이야기하는 아드넬의 눈가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드넬은 팔을 들어 소매로 눈물을 슥 훔치고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저는 혼자 남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화장품을 만드는 것밖에 없었고, 제대로 된 걸 만들기엔 조건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도구가 없이도 만들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어 당시 신생 상회였던 카리아 상회의 상단주를 찾아갔습니다.”

별궁 하녀들에게 알려 준, 꽃잎에 뜨거운 물을 부어 두었다가 걸러내어 만드는 화장수 대용의 플로럴 워터가 그것이었다.

당시 꼬질꼬질한 거지 행색의 어린아이였던 아드넬을 클리프가 만나 준 이유는, 그녀가 주인이 따로 있으며 대리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평민은 대다수 알지 못하는 글을 땅바닥에 써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플로럴 워터의 효능을 직접 체감한 클리프는 계약서를 쓰고 매출로 갚는 조건으로 아드넬이 필요로 하는 천연 화장품 재료와 마도구들을 제공했다.

“다만 제가 화장품을 만드는 모습을 들키면 대리인 행세를 하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델리움의 산은 짐승의 씨가 말랐다는 소리를 들었고, 버려진 오두막을 찾으러 올라갔다가 천연 요새 같은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럼……. 그때부터 계속 델리움에서 살다가, 날 만나게 된 건가?”

“그렇습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날의 첫 만남.

몽실한 토끼털 한 번 본 적 없는 산에서 흑표범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드넬은 생각하며 덧붙였다.

“그러나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붙잡으라 명하신 후, 저는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12살이던 제가 황후 폐하께서 쓰시는 화장품을 만들 줄 안다는 게 밝혀지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 생각했지요. 세상으로부터 저를 숨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드넬이란 이름을……. 새로이 지은 것이로군.”

“예. 머리도 염색하고, 이름도 바꾸고, 지금 제 조수로 있는 두 용병을 고용해 제국을 계속 떠돌아다녔지요. 그러다 카르카스에 정착해 다시금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행적을 종잡을 수 없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넓디넓은 제국을 하염없이 떠돌아다니는데 그 행적을 좇을 수 있을 리가.

그러나 아직 듣지 않은 대답은 하나 더 있었다.

‘마녀, 그리고 저주.’

이상한 주술을 사용해 사람을 매혹하고 짐승을 부리는 간악한 인간.

세간에 알려진 마녀의 인식이 그러했다.

그 때문에 과거 황실에서 전쟁을 선포했고, 꽤 오래 이어진 전투 끝에 마녀를 모두 숙청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후로 몇 번 도망친 마녀들이 나타나긴 했으나 그들 또한 끝내 처형당했다.

그만큼 제국에서 마녀란 즉결 처분 대상이었다.

‘바스토르도 그래서 염려하는 거겠지.’

아드넬이 만드는 화장품은 마녀가 만드는 것처럼 사람을 매혹한다며, 혹 연관이 있을지 모르니 거리를 두라고.

정말로 그렇다면 저가 큰 상처를 받을 테니 한 말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부디, 이것만큼은 관련이 없어야 해.

지금 들은 이야기들도 물론 혼란스럽지만 마녀와 관련된 것만큼은 절대 없어야만 해.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테시우스가 긴장하며 주먹을 움켜쥔 그때, 아드넬은 떨리는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끝내, 그가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저는, 제국에서 사라진 마녀의 피를 가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드넬이 가까스로 꺼낸 한 마디에 테시우스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를 설명 드리려면 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선…….”

“잠깐, 잠깐만.”

그때 테시우스가 아드넬의 말을 자르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큰 손바닥 아래로 보이는 좁아진 미간이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

“저 또한 마녀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잘못된 것으로 실상은 치료와 무척 연관이 깊은…….”

“이 얘기를 지금껏 누구에게 했지?”

순간 테시우스가 고개를 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드넬을 직시했다.

어딘가 차갑기까지 한 눈빛에 아드넬이 움찔 몸을 떨었다.

“저는……. 지금껏 아무에게도…….”

“오직 나한테만 한 얘기일 테지?”

“……그렇습니다.”

“후…….”

테시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발 아니기를, 그리 간절히 바랐건만.

이젠 바스토르에게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아드넬은 분명 죽게 될 거야.’

당장 테시우스만 하더라도 흑표범으로 변하는 저주만큼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사실 그게 정확히 마녀와 관련이 되어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그들이 아니라면 누가 사람을 짐승으로 변하게 만드는 주술을 쓸 수 있겠는가.

더구나 마녀는 짐승을 제 뜻대로 부릴 수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만큼 비록 추측에 불과하더라도 마녀와 완전히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절대 알려선 안 돼. 그 누구에게도.’

그렇지 않으면 아드넬은 죽을 것이다.

저를 치료해 준 공로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 희망을 걸 수도 없었다.

오히려 테시우스에게 저주를 건 당사자로 몰리고도 남을 테니.

한편 아드넬은 테시우스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차마 그를 바라보기 어렵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확신에 차 있던 눈동자는 어느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진실만을 말하고자 마음먹었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난 정말 목숨을 걸고 말한 건데…….’

당신이라면, 믿어 줄 거라고.

진실을 듣고도 날 해치지 않을 거라고.

그리 믿으면서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테시우스가 듣기엔 그저 담담히 말하는 것 같았겠지만 진실을 토로하는 내내 아드넬의 심장은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연신 박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 준 잠깐의 태도는 어딘가 차갑고, 또 냉정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지 모르나 아드넬은 그게 못내 섭섭하고 또 화가 났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앞으로 단 한 순간도,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돼.”

“…….”

“아드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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