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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80)화 (80/141)

80화

황후는 끝내 뭐라 말하지 못했고,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데리고 유유히 본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드넬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속이 다 시원하네.’

아드넬은 황후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없는 위치였다.

그건 황태자 바스토르도, 테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 테시우스가 보여 준 태도는 그야말로 사이다 그 자체였다.

네가 직접 해라, 값은 제대로 치렀느냐, 황실을 낮잡아 볼까 걱정이다, 이런 말을 누가 대놓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그 언사 때문에 분노한 황후가 테시우스에게 해를 입히진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드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저어, 전하.”

“응? 왜 그러지?”

“혹 황후 폐하께서 너무 진노하시어 전하께 무슨 해코지라도 하진 않을지 염려됩니다. 정말…… 괜찮을까요?”

제 말마따나 염려하는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에 테시우스가 피식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나는 원래 황후 폐하께는 저리 행동했다.”

“예전부터요?”

“그럼. 그러하니 이다지도 날 싫어하시지, 아주 건방지다 생각하신다.”

테시우스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바스토르와 나는 줄곧 비교의 대상이었다. 둘 다 황자로 태어난 이상 당연한 수순이었지. 그런데 내가 총명하고 현명하게 행동한다면 황후 폐하의 시선이 어떠셨겠나.”

“아…….”

“후계자 수업은 진작 포기했지만 황후 폐하께선 내가 황좌에 위협이 될까 걱정하시지. 내가 그럴 마음이 없어도, 내 외숙이 한때 거세게 반대했던 것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신다. 하지만 난 정말로 황좌에 관심이 없어. 이제 와 바스토르를 따라잡을 수도 없지만 난 그가 나보다 더 나은 황제가 되리라 생각해.”

그리 말하는 담담한 얼굴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테시우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은 바는 전혀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듣기로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독살당했다던가.

‘그리고 황제의 진정한 정인이 리아누 황비 전하셨다고 들었어.’

허무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황제는 독살범의 가문은 물론, 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다면 갓난아기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처형했다고 한다.

그걸로도 모자라 역사서에 기록된 가문의 이름까지 완전히 지워 버렸다지.

아드넬이 아는 건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전하는 어떻게 버티셨을까.’

정인을 잃고 분노에 눈이 먼 황제는 곧 마음의 병을 얻어 앓아누웠다.

자연히 공석이 된 자리에 누구를 추대하느냐는 말이 높아질 수밖에 없을 터.

황후는 황비 소생인 테시우스에게 황좌를 빼앗겨선 안 된다며 바스토르를 몰아붙였을 것이고, 어머니의 따듯한 손길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갓난아기는 그 차가운 시선 아래 홀로 컸을 것이다.

지금 바스토르와의 사이를 생각해 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테시우스를 챙겨 준 듯하지만.

‘부모님이 줄 수 있는 사랑의 빈자리를 메울 수는 없었을 거야.’

그리 생각하니 테시우스에 대한 안쓰러움이 물씬 솟았다.

그리고 문득 엄마가 제게 주었던 사랑도 떠올랐다.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가슴을 따듯하게 품어 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하지만 테시우스는 그런 기억 한 조각도 갖지 못했을 테지.

‘그러고 보니 라이칸 후작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

보통 황족들은 어릴 때부터 친분을 다지기 위해 비슷한 신분과 지위에 있는 가문의 자제들을 놀이 친구로 두어 어울리곤 하지만, 2황자는 그마저도 편히 둘 수 없었다고 했다.

비슷한 신분과 지위라면 최소한 후작가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놀이 친구를 두었을 나이라면 테시우스가 후계자 수업을 포기하기 전일 테고, 그때 황후가 그런 가문과 연을 맺게 둘 리가 없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어머니와 아들을 방치한 아버지.

쉬이 만나기도 어려운 이복형과 차가운 황후의 견제.

여기에 친구조차 갖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선 원인 모를 병과 저주까지 얻었다.

이를 생각하니 처음 만났을 때 테시우스가 보인, 다소 포악하고 제멋대로이던 태도가 충분히 이해 갔다.

“……아드넬?”

어느새 아드넬은 걷다 말고 우뚝 멈춰 서 있었다.

옆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멀어지자 테시우스 또한 멈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드넬은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전하의 서재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 * *

테시우스는 안쓰럽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아드넬이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다.

‘손을……. 잡아 주고 싶었어.’

이미 여러 차례, 그가 주었던 따듯한 온기는 위로가 되었다.

그가 그랬듯이 아드넬 또한 테시우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손을 뻗을 용기가 있음에도 그러지 못한 이유는 지금 그녀가 그에게 보여 준 모든 모습이 다 거짓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서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어.’

그건 테시우스를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짓된 모습으로 들은 서툰 고백을 마냥 기뻐할 수 없던 것처럼, 거짓된 모습으로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드넬은 오늘 밤, 그가 일전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내가 지은 이름들도, 화장품을 만드는 것도, 마녀에 대한 것도. 전부 다.’

그 사람이라면 날 믿어 줄 거야.

엄마가 그랬듯이, 그 사람도 믿어 줄 거야.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드넬은 그동안 테시우스가 자신에게 보여 준 모습들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굳게 다짐한 채 약속한 시각이 되자 그녀는 곧장 테시우스의 서재로 향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세레나는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아드넬은 홀로 복도를 지나 서재 문을 두드렸다.

테시우스가 바스토르와 독대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인 만큼 방음이 출중해 따로 누구라 말을 하진 않았다.

방문을 약속한 건 당연하지만 아드넬뿐이라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테시우스가 먼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와.”

“감사합니다, 전하.”

서재에는 편히 앉아 책을 볼 수 있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처음으로 함께 술을 마셨는데.

아드넬은 문득 생각하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테시우스가 앉자 그녀는 오래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예전에 제게 하신 질문을 기억하시지요.”

“물론이다마다.”

“오늘……. 그 질문들의 답을 돌려드릴까 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조금 놀란 듯, 테시우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드넬은 가까스로 결심한 다짐이 흔들리지 않도록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먼저……. 아렌, 아드넬, 아실라. 이 세 가지 이름이 흡사한 이유는 모두 제가 지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지었다는 말은…….”

“아실라라는 사람은 가상의 인물입니다. 어릴 적, 델리움의 동굴에서 제가 연고를 만들던 걸 기억하십니까?”

“응, 기억나. 그때 어떻게 저리 어린아이가 마도구를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품었었어.”

“당시 저는 12살에 불과했고, 보호자도 없었습니다. 저 자신을 지키려면 가상의 인물 뒤에 숨어 있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지요. 그래서 대리인 행세를 하며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아드넬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제 원래 이름은 아실라, 아렌이라는 이름은 남장을 시작하고서부터 제가 지은 이름입니다.”

“……뭐?”

그 순간, 테시우스의 금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그만큼 아드넬이 내뱉은 말은 그가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드넬이 사실은…… 여자였다고?’

그동안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

그는 남자고 나 또한 남자인데 어떻게 이런 감정을 품을 수 있냐며 괴로워했다.

어리디어린 아렌을 보며 그가 여자였다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고, 하다못해 화첩까지 찾아보았는데.

‘그런데 사실은 여자였다니?’

어딘가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하면서 왠지 모를 배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테시우스가 안쪽 입술을 짓이겼다.

하지만 이어진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 감정은 거짓말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제 어머니께선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어딜 가나 사내들의 시선과 희롱이 끊이질 않았고, 코르티잔으로 일할 것을 권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선 저를 지키고자, 그리고……. 저를 위해 주점에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드리아나는 취객과 몸싸움을 벌이다 식탁 모서리에 관자놀이를 찧어 허무하게 떠났다.

취객이 그녀를 희롱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테시우스가 충격으로 입을 살짝 벌렸으나, 고개를 숙인 아드넬은 미처 보지 못한 채, 마저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저는 도저히 여자의 모습으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에 감사하기에는 홀로 남은 현실이 두려웠습니다. 그때 ‘아렌’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카리아 상회의 상단주와 대리인의 자격으로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럼……. 화장품은 어떻게 만들 수 있던 거지?”

지금부터는 듣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 않고서는 그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엄마는 날 믿어 줬어. 이 사람도 어쩌면…….’

아드넬은 주먹을 꽉 쥔 채, 일말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진실된 눈으로 테시우스를 직시했다.

“전생이라는 걸 믿으십니까, 전하?”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저는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신의 장난인지 뭔진 몰라도, 태어난 순간부터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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