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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9)화 (79/141)

79화

처음 황후를 독대하러 갔을 때만 하더라도 심장이 벌렁거려 자꾸만 손에 식은땀이 쥐어졌다.

하지만 테시우스가 옆에 있는 지금은, 떨리긴커녕 차분하게 가라앉아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선 갑자기 왜 부르신 거지?”

“아무래도 제 짐작으로는……. 일전에 말씀드린 대량 생산 사업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었다.

아드넬도 클리프를 통해 현재 반응이 어떤지 전해 들었는데, 간간이 황후도 언급되다 보니 아무래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지금까지 화장품은 귀족의 전유물이자 사치품이었는데, 앞으로 평민들도 부담 없이 사서 쓸 수 있게 만들겠다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만큼 자기가 쓰는 물건을 누구든 다 쓸 수 있다면 격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 테니까.

‘물건이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아닌데.’

당연하지만 깨닫긴 어려운 이치였다.

평생을 떠받듦을 받고 산 사람이니만큼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사업만큼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삶을 보다 편히 만들어 주고 싶다는 원대한 목표를 품은 건 아니었다.

그저, 전생에서 아토피라는 질병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그녀가 천연 화장품을 만들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병원 치료도 물론 동반했지만 내 피부에 제일 잘 맞는 화장품을 쓰면서 차츰 차도를 보이고 끝내 완치되었다.

그러한 노력이 있어도 치료될까 말까 한 병인데 이 세상에선 치료제도 없을뿐더러 건조한 피부를 그대로 내버려 둬야만 한다.

아드넬이 도와줬던 빈민가의 아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더러운 환경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다 보니 쉽게 병에 걸리고, 가라앉지 않는 간지럼증에 자지러지게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꽃을 뜨거운 물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화장수 대용으로 쓸 수 있는 플로럴 워터를 만들 수 있는데, 방법을 몰라 쓰지 못하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그 방법을 아는 내가 조금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어차피 공짜로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대가를 받고 파는걸.’

누군가를 구제하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황후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데 칭찬받아 마땅하지, 아드넬은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더구나 테시우스도 옆에 있으니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곧 황후가 있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다만 시녀장은 아드넬의 옆에 선 테시우스를 보고 매우 놀란 듯, 황급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고귀한 검이자 방패이시며, 제국의 땅을 비추는 지고한 별이신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후 폐하를 뵈러 왔네. 방문을 고하도록.”

그리 말하는 목소리엔 황자로서의 위엄이 가득했다.

시녀장도 물론 높은 위치이긴 하나 황자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조금 당황한 시녀장이 방문을 고하자,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뒤늦게 들어올 것을 허락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시녀장은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어 주었다.

먼저 테시우스가, 뒤따라 아드넬이 들어갔다.

“……테시우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지?”

내뱉는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테시우스가 세레나에게 보여 준 태도와 판박이였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한 낯으로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고는 한쪽 다리를 꼬았다.

태만함이 다분한 행동에 알라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리 와서 앉아라, 아드넬.”

“……아, 예!”

당황하기로는 아드넬도 마찬가지였다.

황후 앞에서 이토록 거만한 태도를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그러나 알라니아는 아드넬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테시우스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앉자 테시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안히 지내신다 말만 전해 듣고 존안은 통 뵙질 못해서 말입니다. 해서 오랜만에 찾아왔지요.”

“……네가 내 평안을 궁금해하기라도 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황후 폐하의 평안이 곧 제국민의 평안이나 다름없는 것을요. 저 또한 이 나라의 황자로서 아랫사람을 두루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알라니아는 치켜뜬 눈으로 테시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네가 할 일이 아니다. 이미 바스토르가 충분히 잘해 주고 있어.”

“그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제 형님의 일인 걸요. 저는 그저 조금이나마 형님이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유려한 언변에 알라니아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팩하고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쾌함이 가득한 시선에 아드넬이 깜짝 놀란 그때였다.

“내 이리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너와 그 상단주가 하는 사업 때문이다. 듣자 하니 내 이름을 대놓고 판다지?”

“송구합니다만 황후 폐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저 제 주인님께서 황후 폐하께도 화장품을 납품한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나온 말일 뿐입니다.”

“결국은 말이 나온다는 소리군.”

“…….”

“내 일찍이 말했을 텐데. 아랫사람이 사사로이 윗사람의 이름을 팔게 둘 순 없다고.”

그러면 화장품을 받아 쓰지 말던가!

아드넬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한 마디를 간신히 억눌렀다.

“하지만 황후 폐하, 말씀하신 대로 공녀님들을 모델로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황실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엄이 떨어지는 일이야! 진정 그 저의를 몰랐단 말인가?”

알라니아는 저가 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곧 냉랭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 아랫것이 주인의 뜻을 알 리 없지. 하니 내 지금 명하겠다, 오늘 당장 네 주인에게 서신을 보내 날 만나러 오라 전하도록.”

황후는 끝내 아드넬이 제일 염려하던 부분을 꺼냈다.

그것도 ‘명령’이라는 단어까지 운운하며.

황명인 이상 아드넬은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 돼……!’

아실라는 아드넬이 만든 가상의 인물일 뿐이었다.

존재치 않는 사람에게 서신을 보내 황후를 만나러 오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품을 만들어 바치라는 명도 순순히 따랐다.

어떻게든 아실라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게끔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드넬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

한편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의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보는가 싶더니 곧 싱긋 웃으며 알라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뭐?”

“제국민이 황후 폐하께서 쓰시는 화장품을 쓰는 것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오히려 그들도 좋은 물건을 좋은 가격에 사서 쓸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지요?”

“…….”

“아랫사람을 두루 살피는 것은 황실의 일이나 황후 폐하께서 바쁘시니 다른 이가 대신해 주는 것인데, 되레 황실의 위엄이 떨어진다며 질책하시니 저로서는 통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황실의 일을 다른 이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대신 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가 되지 않겠니? 나야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하면 황후 폐하께서 하십시오.”

그때 테시우스가 웃는 낯을 지우고 무표정하게 말하자 알라니아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황후 폐하께서 직접 나서서 하시란 말입니다. 형님의 일이긴 하나 원체 바쁘신 분이니 자연히 형님의 부담도 덜어질 것이고, 그러면 황실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테시우스……!”

“상을 내리셔도 모자랄 판에 질책을 하시니, 원. 어느 누가 황후 폐하를 진정으로 존경하며 따를까 걱정입니다.”

과감한 언사에 놀란 건 테시우스를 제외한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알라니아가 분노로 몸을 떠는 것을 보고도 테시우스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이젠 상회가 아닌 아드넬을 통해 화장품을 납품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결제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요?”

“…….”

“설마, 값을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다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스레 놀랐다는 듯, 테시우스가 놀란 척을 해 보이자 알라니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당연하지만 명만 해 놓고 잊고 있던 것인데 아드넬도 돈을 받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그저 황후 폐하께서 쓰실 것도 만들고 있노라며 언젠가 테시우스에게 한 번 말했을 뿐.

“어떻게 황후 폐하처럼 지고하신 분께서 응당 지불해야 할 대가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으셨는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민이 황실을 참으로 낮잡아 볼까 두렵군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아, 그 말이 그렇게 들렸습니까? 그저 값을 치르시면 되는 것인데, 너무 앞서 나가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이 건방진……!”

알라니아가 끝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서자, 아드넬이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황후 폐하, 노기를 가라앉히시지요. 그러잖아도 상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얼마 전에 드린 화장품에 들어가는 귀한 재료를 납품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희가 지금 만들고 있는 근육통 연고를 대량으로 공급한다는 조건 하에요.”

“…….”

“재료가 도착하는 대로 만들어 보내드리겠습니다. 물론 두 공녀님께서 쓰실 것도 마찬가지로요.”

얼핏 보면 화제를 돌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아드넬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이제 대량 생산 사업을 막을 수는 없다는 소리야.’

황후가 계속 데오드란트를 사용하고 싶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를 납품받는 조건으로 대량 생산을 해야만 한다.

자연히 공방을 없앨 수도 없을뿐더러, 애당초 황후에겐 사업을 무산시킬 권한도 없었다.

황실의 위엄과 명예를 핑계로 압박을 줄 수는 있으나 법적 권리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다.

황후의 위치가 있는 만큼 어떤 누명을 씌우고 사업을 무산시키는 게 두려웠던 거지, 그녀에게 사업을 강제로 중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건 아드넬도 진작 알고 있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부디 강녕하시길.”

“…….”

“……아 참, 그리고 하나 더.”

와중에 테시우스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마지막까지도 알라니아에게 물을 먹였다.

“정산서는 별궁으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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