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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8)화 (78/141)

78화

시간은 꾸준히 흘러갔다.

그동안 아드넬은 조금 바빠졌는데, 다름 아닌 근육통 연고를 정식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도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 있는 카리아 상회 분점에 물량을 공급할 수 있을 만큼 하루 생산량이 받쳐 주어, 연고를 홍보하는 광고지가 곳곳에 붙었다.

작은 잡화점부터 시작해서 대형 상점까지 카리아 상회와 거래를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사실 정식 판매만 시작한 것이라면 아드넬이 바쁠 이유는 없지만, 근육통 연고의 뒤를 이을 ‘천연 바셀린’ 생산에 박차를 가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교육 지침을 만들고 공정 과정을 살피는 것 말고도 나중에 만들 고급 화장품에 대해 클리프와 논의도 해야 했다.

이렇듯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아드넬은 피치 못하게 테시우스를 뒷전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진한 애정 표현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일부러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근육통 연고가 정식 판매를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연고에 대한 소문은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드넬이 한때 새로운 거처로 삼았던 카르카스는 물론이고 작은 마을 수준에 불과한 델리움도 예외는 없었다.

“근육통에 효과가 좋은 연고라고?”

“그런 연고가 세상에 어딨나? 더구나 맨살에 바르는 연고라니, 순 사기꾼 같은 물건을 다 파는군.”

“카리아 상단주가 미친 게 틀림없어, 이런 물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설 줄이야.”

처음엔 부정적인 반응이 크게 돌아왔다.

무투회 때 한정 수량을 풀긴 했지만 그만큼 써 본 사람이 적었기에 연고의 효과를 본 사람도 거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연고는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는데, 처음 물량을 받았을 때 반신반의하던 건 가게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저들이 팔아야 하는 물건의 효능도 모른 채 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한 번 써 보기나 할 생각으로 근육이 단단하게 뭉친 곳에 발랐고, 금세 효과를 보자 매우 놀라며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일단 한 번 써 보시면 효과를 체감하실 겁니다.”

“글쎄 근육통엔 이만한 게 없다니까요? 저도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로 사서 쓰는 게 정 부담되신다면 여기, 한번 발라 보십시오.”

가게 주인들은 무투회 때처럼 연고를 시제품으로 내밀며 써 보라 권했고, 개중 몇몇은 효과가 없으면 무조건 환불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효과가 없으면 환불도 해 준다는데 굳이 안 쓸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한 번 발라 본 사람은 백이면 백,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이거 하나 주쇼! 아니, 두 개! 두 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2크라운 9페논이라고? 생각보다 안 비싸잖아?”

“대량 주문도 가능합니까? 우리 길드에 비치해 둘 생각인데.”

근육통 연고는 판매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폭발적인 매출을 거두었다.

여기엔 클리프의 입김도 작용했다.

평민에게도 저렴하게 화장품을 공급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바탕으로, 귀부인들이 환장하는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과 협업했다는 것!

앞으로는 연고 외에도 얼굴에 바르는 기초 화장품까지 합리적인 가격에 팔 계획이라는 것!

이를 들은 가게 주인들이 크게 만족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 대부분은 평민일뿐더러, 시중에 나온 화장수 하나 사기 어려울 만큼 화장품은 비싼 품목이었다.

그런데 평민도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금액으로 화장품을 공급해 준다니 그것만큼 매출을 크게 올릴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이에 가게 주인들은 일부러 전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클리프가 한 이야기들을 손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글쎄 알아보니 ‘아실라’라는 사람이 만드는 화장품을 황후 폐하께서도 쓰신다더군요.”

“그 사람이 카리아 상회와 협업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제국 전역에 화장품을 공급할 생각이라는데, 이 연고처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일 거라더군요.”

“이제 화장품은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가 쓸 수 있는 물건이 될 겁니다.”

평민들이 쓰는 화장품이라곤 기껏해야 비누 하나뿐이었다.

얼굴과 몸을 씻는 건 비누 하나로 모두 해결, 양치도 굵은 소금으로밖에 하지 못한다.

이러하니 씻은 뒤에 피부가 당기고 건조해지는 건 모든 평민의 고충이었다.

그 때문에 제국에선 화장품이 값비싼 결혼 예물로 취급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 화장품을 저렴한 값에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 있을까.

“참 대단한 사람 같아. 돈이라면 이미 차고 넘치게 벌었을 텐데 일부러 우리 같은 평민을 위해 만들어 팔아 준다니.”

“그 연고도 그래, 난 이제 그게 없으면 못 살 지경인데 3크라운도 안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니까.”

“알고 보니 그분도 평민이시라더군. 그러니까 사리사욕만 챙기는 귀족 부류랑은 전혀 다르신 거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아실라를 찬양했다.

카리아 상회의 평판은 높아지고, 정식 판매를 시작하고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엔 세 집 건너 한 집 정도는 근육통 연고를 구비해 두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따라온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 유명세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후가 직접 아드넬을 부르기 전까지는.

* * *

‘내 이럴 줄 알았지.’

당장 본성으로 오라는 서신에 아드넬의 표정은 썩은 고기라도 씹은 듯 잔뜩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황후를 독대했을 때 말은 번듯했다.

제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은 칭찬받아 마땅하나 아랫것들이 윗사람의 이름을 마음껏 팔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던가.

‘그래서 내가 모델로 세웠냐고.’

두 공녀에게 화장품을 만들어 주는 대가로 요구한 모델 건은 황후의 말 한마디에 물 건너가 버렸다.

물론 아드넬도 조금 염려하던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디아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었는데 시도도 못 하고 끝나 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기가 쓸 화장품도 만들어 바치라 명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공녀를 모델로 세운 것도 아닌데 이번엔 또 뭐가 그리 심기에 거슬리기에 당장 튀어오라는 건지.

아드넬로서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래도 보험은 하나 들어 뒀어. 가서 말만 잘하면 돼.’

황후가 대량 생산 사업에 제재를 걸려는 순간 뇌물로 바치려던 데오드란트.

데오트란트는 만드는 방법도 쉽고 들어가는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황후에겐 반대로 말을 해 두었다.

더구나 데오드란트는 땀이 많이 나거나 악취가 심한 사람이라면 계절을 불문하고 필요한 화장품이었다.

일단 한 번 써 봤으니 써 보기 전으론 다시 돌아가지 못할 터, 아드넬은 여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렇게 갈 준비를 마치고 침실을 막 나선 그때였다.

“작업실에 가시나요, 아드넬 님?”

본성에서 시녀가 왔다 갔을 때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세레나가 냉큼 물었다.

아드넬은 고개를 저으며 시녀가 준 서신을 들어 보였다.

“황후 폐하께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께요?”

세레나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묻자 아드넬은 애써 한숨을 감추며 답했다.

“예, 아무래도 화장품과 관련해 하실 말씀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아…….”

“전 잠시 본성에 다녀올 테니 세레나 님께선 별궁에…….”

“저도! 저도 갈게요!”

그때 세레나가 자진하며 크게 외쳤다.

“저는 아드넬 님을 모시는 시녀니까, 따라가도 괜찮을 거예요.”

“어……. 아무래도 그건 좀…….”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드넬도 흔쾌히 알겠노라 할 수 없었다.

황후는 황실의 위엄과 예법에 유독 예민한 사람이었다.

테시우스가 앓는 병이 겉으로 보기에 흉측하다는 이유로 황실의 위엄을 운운하며 밝히지 않을 정도면 말은 다 한 것이다.

그런데 평민인 아드넬이 귀족가 영애를 시녀로 데려가면 얼마나 탐탁잖게 볼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세레나 본인이 구태여 따라가겠다니 아드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저 혼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원래도 자원해서 별궁에 왔고, 충분히 황후 폐하께서도 이해를…….”

“네가 그렇게 황후 폐하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에 아드넬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테시우스였다.

그는 아드넬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네가 그렇게 황후 폐하에 대해 잘 아느냐 물었다.”

“그, 그게…….”

“잘 알고 있다면 그분께서 얼마나 예법을 중히 여기시는지 알 터, 한데 되레 먼저 따라가고 싶다 청해? 네가 모시는 상전에게 망신을 주고 싶은 건가?”

“…….”

“네가 한 말이 있으니 아드넬을 보필하는 건 내 재량으로 넘어갔지만, 부르지도 않았는데 본성까지 따라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이만 가 보도록.”

한겨울 바닷바람처럼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일말의 따듯함도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음성에 아드넬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나한테는 저렇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내뱉는 목소리엔 늘 애정과 온기가 담겨 있었다.

한때는 툴툴대고 버럭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저렇게까지 냉정하게 말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주책맞게도 입꼬리가 꿈틀 움직였다.

‘좋아하면 안 되는데 왜 기분이 좋지.’

난감한 상황을 단박에 해결해 준 것보다는 저와 세레나를 대할 때 전혀 상반되는 태도가 은근히 좋았다.

아드넬은 입술을 꾹 깨물어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나 세레나가 어딘가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테시우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대는 아주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군. 늘 내가 두 번씩 말하게 해.”

“소, 송구합니다……!”

“이만 가라 했다. 더는 내 화를 돋우지 마.”

그제야 세레나는 허리를 깊게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리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잠시 후, 테시우스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바뀌었다.

“함께 가자, 아드넬. 내가 옆에 있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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