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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7)화 (77/141)

77화

‘좋아하셨으면 좋겠는데.’

늦은 밤, 아드넬은 조금 긴장한 채 숨을 고르고는 테시우스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향초 선물의 의미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제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서.

“2황자 전하, 아드넬입니다.”

혹시 자고 있을까?

뭐라고 말하면서 줘야 할까 생각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는데, 너무 늦어 버린 거면…….

“……아드넬.”

그러나 잠시간의 침묵 후에 들려온 것은 들어오란 목소리가 아닌, 문을 직접 열고 반겨 주는 목소리였다.

테시우스는 어딘가 조금 기뻐 보이는 듯하면서도 애써 억누른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 주무시던 중이었다면…….”

“아냐, 마침 잠이 오지 않던 참이었어.”

“다행입니다. 저, 그러면……. 잠깐만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테시우스는 살짝 웃는 낯으로 몸을 비켜섰다.

그 사이로 아드넬이 들어가자 탁하며 문이 닫혔다.

“일단 앉지.”

“아, 예.”

찾아온 본론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테시우스는 자리부터 권했다.

이에 아드넬이 응접용 소파에 앉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저, 전하……?”

“저쪽 자리는 빛을 등지고 있어서 싫어. 신경 쓰지 말고 말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조명을 등지고 있는 자리는 아드넬이 앉은 쪽이었으니까.

그런데 테시우스는 대놓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고는 팔짱을 꼈다.

아드넬은 잠시 당황했으나, 2황자더러 저쪽 가서 앉으십시오 할 위치는 못되었기에 하는 수 없이 선물부터 꺼내 보였다.

“……이걸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응?”

테시우스의 금안이 아드넬이 꺼낸 작은 상자를 향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반달꼴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건 내게 주는 선물인가?”

“그……. 이, 일단 열어보십시오.”

왜인지 자꾸만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드넬은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까 고개를 잔뜩 수그렸다.

그러면서도 포장을 푸는 소리가 들려오니 가슴이 연신 쿵쾅거렸다.

“……아.”

이내 탄식 같기도,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아드넬이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끔 살핀 그때였다.

‘뭐지? 뭔가 표정이…….’

그녀가 생각한 것만큼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뭔가 불편해 보이는 것도 같고, 심기에 거슬린 것도 같고.

그래서인지 어딘가 마음이 섭섭해지며 절로 실망한 목소리가 나왔다.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목소리에 어린 서운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테시우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보란 듯이 고개를 휘휘 크게 저어 보이며 반박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무척 마음에 들어.”

“…….”

“네가 만든 것이라면 분명 효과가 좋은 화장품일 테지. 보아하니 초로 보이는데, 이 노란 색감도 마음에 들어.”

테시우스가 황급히 변명하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려, 아드넬도 살짝 웃어 보였다.

“불을 붙이면 향이 나는 향초입니다. 독하지 않고 은은한 향기가 나, 밤중에 켜시면 숙면에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런 것이라면.”

그때 테시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어디선가 성냥갑을 하나 가져오더니, 책하고 향초에 불을 붙였다.

노란 향초에 붙은 작은 촛불이 일렁였다.

“……정말이군. 향이 아주 은은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응,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그리 말하며 테시우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아드넬의 손등 위였다.

테시우스가 대뜸 손을 그러쥐자 아드넬은 깜짝 놀랐는데, 손을 빼 보려 해도 아귀힘이 어찌나 강한지 도통 뺄 수가 없었다.

“왜, 불편한가?”

“아, 아무래도…….”

“나는 본래 제멋대로에 포악한 황자였으니 지금도 내 뜻대로 할 거야.”

퍽 능글맞은 얼굴이었다.

테시우스는 싱긋 웃으며 아드넬을 바라보며 그러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당황한 아드넬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깊게 숙이자 이번엔 감춘 얼굴을 보려는 듯 몸을 숙였다.

“계속 이리 숨길 거야?”

“…….”

“내 목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너 때문이다, 아드넬. 감히 이런 고생을 자처하게 만들다니, 예전에 해 준 것처럼 안마해 달라 벌을 내릴 거야.”

“아, 알겠습니다……!”

차마 훌러덩 벗은 몸을 볼 자신은 없어 아드넬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번쩍 얼굴을 들자마자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뺨이 들켰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오히려 좋다는 듯 그녀의 옆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예뻐.”

“…….”

“어디 하나 모나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어. 이 빛바랜 흑발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바닷빛 눈동자도, 그리고 여기…….”

머리에 한 번, 눈가에 한 번, 그렇게 한 번씩 머물러 내려오던 테시우스의 엄지손가락이 아드넬의 입술 가까이에서 멈췄다.

그리곤 말랑한 아랫입술을 살짝 누르는가 싶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만큼 붉은 입술도. 전부 다.”

이젠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대놓고 예쁘단 소리를 하며 얼굴을 만지니, 아드넬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뻥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몸을 뒤로 빼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손을 빼려 하면 힘을 주어 잡으니 도무지 도망치려야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테시우스가 말했다.

“내게서 도망치지 마.”

“전하…….”

“떠나지 말고, 그저 곁에 머물러 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도 좋으니 내 눈에서 멀어지지만 말아 줘. 그렇게라도 널 눈에 담아야 내가 숨 쉴 수 있어.”

심장이 요동쳤다.

이 정도 거리라면 거칠게 박동하는 소리가 그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워,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다면서 하는 말은 여우가 따로 없었다.

예전에 황태자를 처음 봤을 때 그가 했던 느끼한 말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달콤했다.

어딘가 애절한 듯싶으면서도 짙은 소유욕이 느껴지고, 그럼에도 답답하게 죄는 느낌이 들지 않는.

누구도 그의 고백을 들으면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아드넬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리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직시하며 말했다.

“잊지 마, 아드넬.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 * *

그 시각, 서쪽에 있는 세레나의 침실.

촛불 하나만이 일렁이는 어두운 방에서 세레나는 딱딱 소리를 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대체 왜지? 내가 드리면 분명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엔하시아 제국의 2황자이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제 짝이 될 남자였다.

모든 상황이 이를 증명했다.

홀로 길거리를 방황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그녀는 사실 자작가의 영애일뿐더러 ‘마녀’의 피가 흐르는 진귀한 존재였다.

그런 자신만이 2황자에게 걸린 끔찍한 저주를 풀 수 있었다.

이 세상엔 더는 마녀가 없으니까.

오직 세레나, 자신뿐이었다.

‘그 사실을 전하께서 아시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날 곁에 두실 텐데.’

후작은 때를 기다리라 했지만 세레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테시우스의 짝이 될 날만을 기다리며 능력을 갈고닦았지만 후작이 알려 줄 ‘비기’를 시전하기엔 아직 힘이 모자랐다.

어떤 여자가 들고 도망쳤다는, 가문 대대로 이어져 힘이 축적된 그 목걸이만 있다면 2황자의 저주도 얼마든지 풀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거는 것보다 푸는 게 더 어려울 건 뭐람.’

그런 줄 알았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8년 전, 세레나는 산티노로 향하는 일행에 시녀로 합류해 테시우스에게 짐승으로 바뀌는 주술을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 보란 듯이 풀어 주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저주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고, 이에 다급해진 세레나는 어떻게든 해 보려 몰래 여관 뒷마당에까지 숨어들었지만 그 날 이후로 거의 모든 힘을 소진했다.

하는 방법도 모른 채 일단 힘부터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 순간 테시우스는 사람으로 돌아왔고, 당연히 제 능력 덕에 바뀐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세레나의 착각이었다.

그녀가 마구잡이로 쏟아 넣은 힘 때문에 오히려 부작용만 남고 말았다.

흉측한 상처가 남는 라크란 병에 걸린 것으로도 모자라 매년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다시금 짐승으로 바뀌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게 다 그 후작 놈 때문이야……!’

거는 방법을 알려 줬으면 푸는 방법도 알려 줬어야지, 물론 혼자 조급해 억지로 풀려 하다가 힘만 잃은 건 제 탓이었지만 아무튼 화가 났다.

어차피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 남은 지식을 바탕으로 꾸준히 약을 지어 먹은 탓에 예전만큼 회복되긴 했으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다만 아직 ‘비기’를 실현하기엔 모자랐다.

힘을 개방시켜 줄 뿐만 아니라 증폭까지 해 준다는 그 목걸이만 있으면 되는데, 후작이 백방으로 찾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나 넋 놓고 기다리기엔 테시우스가 보여 준 싸늘함이 못내 섭섭하면서 가슴 아팠다.

‘그리고 그 맹한 남자애도. 정말 꼴 보기 싫어 죽겠어!’

화장품 나부랭이나 만드는 주제에 내 남자 옆에 딱 붙어 꼬리를 살랑거리는 꼴이라니.

어디서 같잖은 걸 배워 와 용케 차도를 보이는 모양인데, 그렇게 느리게 치료해서야 한 방에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2황자는 그를 퍽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 귀한 보검까지 직접 주지 않았던가, 그날만 생각하면 딱 가슴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그걸 내가 받았어야 했는데.

그 자리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생각할수록 답답해 세레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묶은 끈을 빼내어 내팽개쳤다.

‘……아니야, 그래 봤자 잠깐이지. 결국 내 남자가 될 운명인걸. 그렇게 맺어지게끔 우리는 태어났어.’

과거 따위 알게 뭔가, 제 존재는 황좌에 버금갈 만큼 값진 것인데.

어디 지금을 실컷 즐겨 보라지, 전하의 저주만 풀어드리고 나면 그날로 별궁에서 쫓아내 버릴 테니까.

세레나의 진한 갈색 눈동자가 독기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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