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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6)화 (76/141)

76화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군들 그 말을 듣고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심장을 이토록 요란하게 뛰게 하는 건 오직 너뿐이다, 아드넬.’

그의 진심을 들은 지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기억은 되레 선명해졌다.

그 말을 내뱉던 목소리도, 표정도, 하다못해 눈빛까지.

그래서인지 아드넬은 도저히 무언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걸까.’

물론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이르지만, 단순히 좋아한다는 단어로 정의하긴 어려운 감정이었다.

떠올릴 때마다 기분은 몽글몽글해져 구름 위를 걷는 듯했고, 자꾸만 그가 보고 싶었다.

일하다가도 틈만 나면 생각나서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지고, 저도 모르는 새에 핑계를 대서라도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 설레고, 간질거리고, 붕 뜨는 느낌이었다.

‘제이든에게 들었을 땐 하나도 기쁘지 않았는데.’

오히려 미안하기만 했지, 상처받을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받아 줄 수 없는 마음이기에 거절했고, 제이든이 지어 보인 쓴웃음과 위로에 홀로 훌쩍이기도 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은 고백은 전혀 달랐다.

내가 연모하는 사람이 마찬가지로 나를 좋아한다는 건 상상한 것보다 훨씬 기쁘고, 벅차오르는 감정이었다.

세레나가 옆에 붙어 졸졸 따라다니는데도 그 존재가 크게 거슬리지 않을 만큼.

“오늘은 무슨 화장품을 만드실 건가요?”

“……아, 별것 아닙니다. 그냥…….”

그때 작업실까지 따라온 세레나가 말을 걸자 생각에 잠겨 있던 아드넬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손엔 투명한 유리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넓적한 찻잔 같은 모양새로 손잡이가 달리지 않은 병이었는데, 세레나가 쳐다보자 아드넬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향초를……. 만들어 볼까 해서요.”

“향초요? 그런 것도 만들 줄 아세요?”

“예, 뭐…….”

그리 말하는 볼이 발갛게 익었다.

아드넬은 테시우스에게 아로마 향초를 만들어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향초 선물의 의미는, ‘당신을 생각합니다.’였다.

‘아직은 이렇게나마 내 마음을 말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얼굴을 보고 답해 주고 싶어.’

나 또한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당신이 날 보며 느낀 것들처럼, 스며들듯 당신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향초의 은은한 향기를 맡았을 때 날 떠올려 줬으면.

그런 말 못 할 바람을 담아 아드넬은 물기가 없는 용기에 천연 밀랍을 계량해 넣었다.

핫플레이트가 점점 달아오르며 밀랍이 녹자 에센셜 오일을 넣어 가볍게 섞고, 심지를 고정한 채 녹인 밀랍을 부었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천연 재료로 만들어 불을 붙여도 연기가 나지 않고, 에센셜 오일의 향이 은은하게 퍼져 선물용으로는 제격이었다.

게다가 천연 밀랍을 사용한 탓에 인공 색소를 넣지 않고도 샛노란 색감이 나왔는데, 노란색 향초를 보노라니 자연스레 2황자의 황금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향초가 완전히 굳길 기다렸다.

“생각보다 만드는 방법이 아주 쉽네요?”

“아, 예. 계량만 정확하면 초보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아드넬 님! 혹시 저도 한번 만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때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세레나가 대뜸 큰 목소리로 부탁하며 아드넬에게 가까이 붙었다.

갑자기 다가오니 아드넬은 당황했지만, 세레나는 예의 거절하기 힘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향이 나는 초라니 선물용으로 아주 적합한 것 같아서요, 꼭 드리고픈 분이 있는데…….”

“아……. 마음에 품은 분이 계십니까?”

아드넬이 묻자 세레나는 수줍은 듯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정말이지 아름다운 분이셔요, 언제 어디서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분이시라고나 할까요.”

“세레나 양이 마음을 품으실 정도면 정말 멋진 분이신가 봅니다.”

요 며칠 사이 세레나가 말을 놓으라고 계속 얘기한 탓에 아드넬이 호칭을 편히 하며 답했다.

세레나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두 손을 모으며 찬양했다.

“세상에 그분만큼 멋진 분은 없어요! 물론 황태자 전하도 아름다우시지만, 남성적인 아름다움에는 조금 못 미친달까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분은 그것까지 모두 갖추셨답니다. 그야말로 부족한 게 없으셔요!”

“아…….”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사랑에 빠져도 단단히 빠진 듯했다.

‘그러고 보니 2황자 전하도 모두 갖추셨지.’

바스토르도 아름답긴 하지만 남성미로는 테시우스가 압도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와 빛나는 금안, 우뚝 솟은 콧날과 다부진 턱선, 셔츠가 터질 것 같은 상체와 큰 키까지.

그는 아드넬의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성격도 좋으면서 이런 몸 가진 사람 없나 하고 생각하기까지 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알았겠나, 그런 그를 좋아하게 되고 그가 저를 좋아하게 될 줄.

정말이지 미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라며 아드넬은 생각함과 동시에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용량부터 알려드리죠.”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고 향초 레피시 정도는 알려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드넬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나에게 향초 만드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아드넬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세레나가, 저와 같은 날 테시우스에게 향초를 선물할 줄은.

* * *

‘뭐 이딴…….’

테시우스는 못마땅한 눈으로 세레나가 가져온 향초를 응시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며 찾아온 시녀는 난데없이 초를 하나 가져와 내밀었는데, 사실 향초가 못마땅하다기보다는 아드넬과 붙어 있는 그녀가 마음에 안 들었다.

“밤중에 켜시면 은은한 향기가 퍼지면서 잠도 잘 오실 거예요. 제가 직접 만든 향초인데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네?”

“나한테 왜 이딴 선물을 가져오느냔 말이다.”

선물을 받고 싶다면 아드넬이 주는 걸 받고 싶었다.

향수 냄새로 무장한 지독한 시녀가 아닌.

테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묻자 세레나는 일순 하얗게 질리더니 곧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그저……. 전하께서 평소 잠을 잘 이루시지 못한다기에 염려가 되어…….”

“그런 염려는 네가 할 것이 아니다.”

한다면야 아드넬이 해 줘야지.

누가 저가 주는 것 따위 받고 싶은 줄 아나.

테시우스는 책상 위에 올라간 향초를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받은 것으로 할 테니 도로 가지고 돌아가도록.”

“전하…….”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 건가?”

세레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테시우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작태가 건방지기 짝이 없군. 긴히 할 말이 있다더니 대뜸 바라지도 않은 선물을 내밀지 않나, 감히 날 염려하노라 말하질 않나. 바얄란 자작가에선 그 정도 예의 교육도 하지 않는 건가?”

“……송구합니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 나가라. 그리고 되도록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군.”

결국 세레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향초를 든 채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가고서도 집무실에 남은 독한 향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앞으로는 아예 못 들어오게 해야겠어.’

테시우스는 콧등을 잔뜩 찌푸리며 큰 목소리로 “펠릭스!” 하고 외쳤다.

버럭 하는 외침에 펠릭스가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가 불만 어린 얼굴로 명했다.

“앞으로 저 시녀와의 독대는 받지 않겠다. 그런 줄 알고 절대 들여보내지 마.”

“예,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아드넬한테 완전히 떼어 놓고 싶은데 이미 허락받았다니 어쩌지도 못하고, 빌어먹을.”

“……예?”

그때 테시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펠릭스가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테시우스가 “흠흠.”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곧 손을 저어 보였다.

“아무튼 그런 줄 알고 나가 봐.”

“아……. 예, 그럼.”

펠릭스는 어딘가 미심쩍은 얼굴로 뒷걸음질 쳐 집무실을 나갔다.

그제야 혼자가 된 테시우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다.’

오히려 말하기 전이 더 견딜 만했다.

혼란스럽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보고 싶진 않았는데, 마음을 자각하고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매 순간 보고 싶고 뭘 하나 궁금해졌다.

원체 바쁜 사람이니 방해하고 싶지 않아 간신히 참는 것뿐이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으면 벌써 열 번은 족히 찾아갔을 터였다.

‘……병증이 오래가길 바라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아드넬이 준 근육통 연고를 바르기 시작하면서 라크란 병은 크게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매일같이 검을 휘두르는 탓도 있지만 바르고 나서 느껴지는 시원한 느낌이 좋아 틈만 나면 결리는 곳과 가려움증이 이는 곳에 발랐는데, 그러고서부터 가려움증은 완전히 사라졌고 상처는 차츰 아물기까지 했다.

아마도 머지않은 시일 내에 흉터만 살짝 남고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은근히 아쉬웠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전엔 틈만 나면 들이닥쳐 발라 달라 떼라도 썼는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으니 얼굴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이러다 완전히 병이 낫고 아드넬이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꿈이 있으니까 별궁을 나갈 것이다.

그리고 제 고백을 들은 아드넬의 마음이 어떤지는 아직 몰랐다.

저와 같은 마음이라면 나가더라도 조금 안심을 할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자꾸만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야 아드넬을 붙잡을 수 있을까.’

지독한 병을 그대로 둘 수도 없지만 아드넬을 계속 별궁에 두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럴 핑계 자체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것뿐인가.’

일전에 한 질문의 답은 나중에 듣더라도, 아드넬을 옆에 두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 또한 날 좋아하게 만드는 것.

마찬가지로 계속 보고 싶고 그리워져 떠나려야 떠날 수가 없게 만드는 것.

테시우스의 금안이 반짝하고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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