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실은 제가 화장품을 만드는 게 꿈이었답니다. 아실라 님의 화장품을 처음 접해 보고 갖게 된 꿈이지만……. 그걸 배우기엔 너무나 막연하고 또 부모님이 무척 반대하셔 완제품만 접해 봤지, 만드는 과정에는 전무해요. 물론 레시피를 알려 달라 말씀드리는 건 아니에요. 그저 옆에서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서 드리는 청이랍니다.”
발갛게 물든 두 뺨은 첫사랑에 빠진 앳된 소녀를 보는 듯했다.
그러니까 대충 요약하자면, 화장품 만드는 게 꿈이었고 그 때문에 옆에 붙어 있고 싶다는 얘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분의 차이가 있는데…….’
시녀가 평민을 상전으로 모시는 것도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나는 일이건만, 심지어 그걸 자기가 자처해서 하겠다니 아드넬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 정도로 화장품에 큰 관심이 있는 걸까, 그렇다고 옆에 두면 불편할 것 같고…….
“그냥 편히 생각해 주셔요. 2황자 전하께서 늘 펠릭스 님과 대동하시는 것처럼 저도 멀찍이서나마 아드넬 님의 편의를 봐 드릴게요. 간간이 만드시는 모습도 보고요. 너무……. 무리한 부탁일까요?”
그리 말하는 얼굴이 얼마나 애절한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아드넬은 차마 칼 같이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고 말았다.
“……예,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아드넬 님!”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는 미소가 어찌나 화사한지, 순간 눈이 부셔서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세레나는 연신 고맙다고 말하고는 냉큼 몸을 돌렸다.
“오늘은 바쁘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펠릭스 님께도 말씀드려야 해서요, 그럼 조금 뒤에 뵐게요.”
“예에…….”
그렇게 세레나가 나가고 탁하며 문이 닫히자, 작업실에 남은 아드넬은 얼떨떨한 얼굴로 멍하니 닫힌 문만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리고 왠지 모를 싸한 느낌 또한 들었다.
‘원래 말하는 게 저런 걸까? 아니면 저것도 예법 중 하나인가?’
저를 모신다는 사람이 하는 말투라 보기엔 어딘가 묘했다.
상황이 어떻든 내 신분이 더 높으니 자기를 높여 말하는 느낌이랄까.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뭔가 굉장히 불편해질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무슨 큰일이 생기겠냐며 애써 자위했다.
다만 여러 가지 겹친 상황도 그렇고 조금 복잡해서 잠깐 산책이나 할 생각으로 아드넬은 작업실을 나섰다.
별궁에서 산책할 곳이라곤 후원뿐이었다.
출입 금지령은 진작 풀려 편히 가도 되었는데, 그렇게 걷다 보니 금세 정자 근처에 다다랐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선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유독 후원 정자에서 많이 마주쳐서인지, 비어 있는 정자를 보자니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 있는 듯해 아드넬은 천천히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텅 빈 옆자리 위로 손을 올렸다.
옆에 앉으라며 빈자리를 툭툭 두드리던 테시우스가 문득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훌쩍이던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위로해 주었던 그날도.
이곳에서 함께 삼겹살을 먹었던 그날도.
테오의 모습으로 어깨를 꾹 밀어 넘기곤 얼굴에 보드라운 털을 비비던 그날도.
‘……뭔가 보고 싶네.’
지난번 대화 이후로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의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고 보고 싶어지는 건지.
아드넬은 작게 실소했다.
그 순간, 바스락하며 풀잎이 짓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넬.”
그리고 고개를 돌린 곳엔, 테시우스가 서 있었다.
* * *
사실 지난 며칠간 테시우스는 계속 아드넬을 쫓아다녔다.
늦은 밤 침실에서 나눈 대화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그것 때문에 끼니를 거르진 않을까 하며 산책하는 척 뒤쫓아 다닌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아드넬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제 조수들도 물렀다.
생각이 많은 듯해 일부러 찾아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아드넬이 후원으로 산책을 나가는 걸 보자마자 테시우스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그리곤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등장했다.
“산책 중이었나?”
“……아, 예.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나도 산책 중이었어. 어쩌다 보니 또 여기더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생각마저 같은 듯해 아드넬이 볼을 살짝 붉혔다.
그사이 테시우스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오늘 별다른 일은 없었나?”
아직 그날의 이야기는 하기 싫을 듯해 꺼낸 화제였다.
그런데 별것 아닌 일상적인 질문에 아드넬은 그가 예상치 못한 답을 해 왔다.
“아, 한 가지 있었습니다.”
“있었다고?”
오늘 종일 작업실에만 있지 않았나?
일이랄 게 뭐가 있었지?
그리 생각하던 찰나 아드넬이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오늘 별궁에 시녀 한 분이 오셨더군요.”
“……아.”
그, 세 뭐였는지 뭔지.
아무래도 그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작업실에 들렀다 간 모양이었다.
다만 그녀를 떠올리자마자 코끝을 찡하게 만들던 향수 냄새가 떠올라 테시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그분께서 좀 이상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상한 부탁이라니?”
“절 모시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전하께서 펠릭스 님을 곁에 두시는 것처럼요.”
그게 무슨 소리지?
좁아진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녀에 대해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 펠릭스에게 알아서 하라 말하긴 했지만, 따로 당부를 하지 않았던 건 시녀가 평민인 아드넬에겐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누구를 모신다면 당연히 저일 테니 되도록 눈에 잘 안 띄는 자리에 배치하라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아드넬에게 직접 찾아가 그런 부탁을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물론 그건 당사자도 마찬가지였다.
“듣고 무척 당황스럽긴 했습니다만, 나름의 이유가 있으신 듯해 일단은 알겠다고 답했습니다.”
“뭐?”
그러나 그 순간 테시우스가 발끈하며 다소 화난 얼굴로 되물었다.
이에 아드넬이 깜짝하고 놀라자 그는 “아차.” 하더니 흠흠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그래도 불편하지 않겠어? 그런데 왜 알겠다고 대답을…….”
“그게……. 화장품에 관심도 많고 해서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이라도 하고 싶으시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혹……. 불편하십니까?”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분의 차이가 있는데 시녀가 평민을 상전으로 모신다니 예법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순간 발끈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좋아하면, 안 돼.”
“예?”
“그 시녀 말이야. 눈길 주지 말라고.”
그리 말하는 옆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못내 민망하다는 듯, 하지만 안 할 수도 없다는 듯 테시우스는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덧붙였다.
“남자인 내가……. 같은 남자인 널 좋……아 한다는 게 어쩌면 불쾌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아무튼, 나는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게 너니까, 그 시녀한테 웃고 그러지 말라는 소리다.”
“…….”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풋 하는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왜 웃는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찌나 서툰지, 질투하면서도 좋아하게 만든 게 너니 네 탓도 있다며 책임을 돌리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드넬은 지금 남장 중이었고, 테시우스는 여전히 그녀를 남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저도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 또한 쉽게 내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궁금해. 단순히 이 사람의 취향인 건지, 그게 아니라면…….’
아드넬은 잠시 숨을 돌리며 웃음기를 가라앉히곤 곧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아까 생각했던 질문을 꺼냈다.
“……실례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전하?”
“그래.”
“혹시 원래부터 남자를……. 좋아하셨습니까?”
내뱉고도 긴장이 되어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만약 그렇다면 마음을 접어야 하는 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아드넬은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들어 테시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어.”
“아…….”
그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안도 어린 탄식이 새어 나왔다.
다행이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풍선처럼 크게 떠올랐다.
그때 테시우스가 고개를 저으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만 보면 마음이 들뜨고, 왠지 모를 소유욕이 생기고……. 그래서 한때는 너처럼, 예쁘장한 남자가 취향인 걸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 혼란스러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남자랑 부대끼며 훈련한 세월만 몇 년인데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실로 처음이라 그저 당황스럽고 또 두려웠다.
예쁘장한 남자들을 모아 그린 화첩을 찾아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말 어쩌면 내가 그런 취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을 보아도 아드넬을 볼 때의 마음과는 전혀 달랐다.
아드넬보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렇다 해서 제 감정을 깨달은 것도 아니었다.
혼란스러움은 여전했다.
한동안은 분명, 그랬다.
“하지만 아니었어. 나는 그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오직 너라는 사람만을.”
이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하고 문득 생각했던 8년 전부터, 남자라는 걸 알고서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커져 버린 지금까지.
“내 심장을 이토록 요란하게 뛰게 하는 건 오직 너뿐이다, 아드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