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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4)화 (74/141)

74화

원래 테시우스의 신분을 생각하면 시종이나 시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귀족가 자제를 아랫사람으로 들이는 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오직 펠릭스 한 사람만 곁에 두었다.

그런데 오늘 드물게, 자원해서 별궁에 오게 된 시녀가 도착했다.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고귀한 검이자 방패이시며, 제국의 땅을 비추는 지고한 별이신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세레나 바얄란이라고 합니다.”

“…….”

테시우스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 세레나를 위아래로 흩었다.

풍성하고 물결 진 분홍빛 머리칼은 사랑스러웠고, 그 아름다운 머리칼만큼이나 예쁘장한 이목구비를 가진 영애였다.

갈색빛 눈동자엔 생기가 어렸으며 두 뺨은 상기되어 먹음직스러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훑어보는 테시우스의 눈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아드넬이 훨씬 예뻐.’

며칠 전 그를 마주하고 토해 낸 진심이 무엇에서 비롯된 감정인지 자각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때는 혼란스러웠고 애써 외면했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드넬이 받아 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널 좋아하고 있었다고.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고, 그걸 너 또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감정을 깨닫고 나니 아드넬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향수를 뿌린 눈앞의 시녀와 달리, 아드넬은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늘 싱그러운 꽃내음이 체취처럼 은은하게 났다.

화장기를 찾아볼 수 없는 말간 얼굴은 깨끗했고, 조금 자란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바닷빛 눈동자는 그저 찬란하게 반짝였다.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아도 아드넬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세레나도 퍽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그 미모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테시우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알았으니 이만 가 보도록. 배정과 관련해선 펠릭스가 대신 알려 줄 거다.”

“……예, 전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얼핏 아쉬움이 어린 것도 같았지만 제 알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세레나는 축객령이 내리자마자 테시우스의 집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 문 앞엔 펠릭스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럼 이제 일할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저, 잠시만요.”

그런데 세레나가 대뜸 펠릭스의 말을 끊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세레나는 싱긋하며 보기 좋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혹 제가 일할 곳을 고를 수 있을까요?”

“예? 그게 무슨…….”

“실은, 이리 별궁에 오게 된 이유가 요즘 화제의 중심에 계신 그 ‘아드넬 님’ 때문이랍니다. 원래도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는데, 황후 폐하께서 쓰시는 화장품을 만드시는 분이 별궁에 계시단 소릴 듣고 자원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아드넬 님을 모시면 안 될까요?”

이건 전혀 예상 못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쉬이 납득하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귀부인들의 초대장이 빗발칠 만큼 아드넬이 유명한 건 사실이지만, 세레나와는 엄연히 신분이 달랐다.

아무리 자작가의 영애라 한들 그녀는 귀족이었고, 아드넬은 평민이었다.

그런데 평민인 그를 저가 모시면 안 되겠냐니, 펠릭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세레나가 냉큼 덧붙였다.

“조금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실라’님의 광팬이어서요, 그분의 대리인만이라도 꼭 한 번 뵙는 게 소원이었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정말 진심이라는 듯, 세레나는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그렁그렁 빛냈다.

그 간절해 보이는 태도가 퍽 귀여워 펠릭스는 잠시간 볼을 붉히며 “흠흠.” 하고 낮게 헛기침하는가 싶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우선 아드넬 님께 먼저 허락을 받으시고 후에 제게 말씀해 주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펠릭스 님!”

세레나는 친근하게 펠릭스의 이름을 부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펠릭스는 또 한 번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해 보이곤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세레나가 서늘하리만큼 차갑게 얼굴을 굳힌 건 바로 그때였다.

‘하여튼 사내들이란, 조금만 웃어 줘도 저리 헤벌레 하고 말지. 그에 반해 우리 2황자 전하께서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닫힌 집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잠깐이었지만 가까이서 마주한 2황자는 그야말로 완벽함, 그 자체였다.

‘무예도 뛰어나시고 외모도 빼어나시고, 게다가 나의 미색에도 흔들리지 않으시다니……! 역시 내가 들어온 이야기 그대로셨어. 저리 완벽한 남자가 내 남자라니 너무 행복해.’

세레나는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콩콩 뛰는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곤 아까 보았던 테시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굳게 다짐했다.

‘조금만 기다리셔요, 전하. 세레나가 전하의 저주를 반드시 풀어드릴게요.’

* * *

한편 새로운 시녀가 왔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아드넬은 작업실에서 멍하니 앉은 채 시간만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다.

이미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테시우스가 했던 모든 말들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내가 감히 어떻게, 너를.’

‘숨통을 죄어 왔던 그 죄책감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나는 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마음속에 성큼 들어와서는, 마주하는 매 순간 혼란스럽게도 날 뒤흔들고 가. 그러니……. 내가 널 그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아드넬, 너 때문이다.’

서툴지만 명백하던 사랑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 속에 차오른 감정은 기쁨이었다.

테시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저도 모르는 새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은연중에 품은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전하께선 내가 남자인 줄 아시니까.’

남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하니 남장한 채인 저를 좋아할 리 없다고 줄곧 생각해 왔지만.

막상 진심을 듣고 나니 의심이 들었다.

그동안 여자도 곁에 두지 않고, 무슨 소문이 난 적도 없고, 한때는 병 때문이겠거니 했지만, 거짓된 모습으로 들은 고백은 역시 기쁘지만은 않았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답을……. 해 줘야 하는데.’

언젠가는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답했지만.

그가 한 질문의 대답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니 마녀의 능력이니 하는 걸 말하는 순간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마땅한 답은 끝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결국 오늘도 이렇게 멍하니 앉아 시간만 보내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생각에 잠긴 아드넬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노크 소리였다.

“……들어와.”

아마도 필립, 아니면 제이든이겠지.

요근래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둘러댄 터라 얼굴 보기가 어려웠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온 것 같다 생각하며 아드넬이 고개를 들자, 문이 열리며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풍성한 분홍빛 머리칼과 예쁘장한 얼굴에 드레스 차림을 한 여자였다.

“누구……십니까?”

“…….”

그러나 놀란 아드넬이 물어보아도 여자는 대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싱긋하고 웃어 보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처음 뵙겠어요. 저는 오늘부터 별궁에서 일하게 된 시녀, 세레나 바얄란이라고 합니다.”

“그……러시군요. 아, 전 아드넬이라고 합니다.”

“물론 알고 있답니다. 황성뿐만 아니라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드신 분을 몰라뵐 리가요.”

세레나는 성큼 작업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탁 하고 닫았다.

그리곤 자연스러운 태도로 내부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것들은 다 화장품에 들어가는 재료인가요? 완성품은 역시 카리아 상회에서 공급하던 화장품이겠죠?”

“예?”

“아실라 님은 어쩌다 화장품을 만들게 되신 건가요? 또 어떻게 개발하시는 거고요? 누군가에게 배우신 건가요? 듣기로는 연금술에도 해박하시다는…….”

“저, 바얄란 님. 송구하지만 저도 주인님에 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런 것들을 물어보시니, 퍽 당황스러워…….”

그 말마따나 아드넬은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걸음을 멈춰 선 세레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마, 미안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봐요, 아실라 님의 광팬이라고 펠릭스 님께만 말씀을 드린 걸 깜박 잊었네요. 사실 아실라 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도저히 뵐 수가 없어, 그분의 대리인만이라도 뵙고 싶었거든요.”

“아……. 그, 그러셨군요.”

“그래서 아까 여쭤본 것들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궁금해서요.”

이렇게까지 직진인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아드넬은 비질 진땀을 흘리면서도 해명했다.

자기 또한 얼굴을 직접 뵌 적은 없으며, 지금 만드는 화장품은 모두 서신으로 레시피를 보내 주셔서 가능한 것뿐이다 등, 그러하니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드릴 수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그마저도 기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제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니 역시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요.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지만……. 아드넬 님을 만났으니 그것으로나마 만족해야겠죠. 저, 그래서 말인데…….”

세레나는 모아쥔 손을 꼼질대며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제가 앞으로 아드넬 님을 모셔도 될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바쁘지 않으실 때만이라도요. 아드넬 님이 화장품을 만드시는 걸 한 번만 구경할 수 있을까요?”

“예……? 아니, 어, 그러니까 화장품 만드는 건 그다지 재미도 없으실 테고. 그런데 바얄란 님께서 절 모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당황한 아드넬이 버벅대며 되묻자, 세레나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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