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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3)화 (73/141)

73화

너무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조금은 서늘해진 밤공기 때문인진 몰라도.

차가워진 주먹 위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에 아드넬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는 새에 내려간 고개를 들자 이전과 다르게 더는 흔들리지 않는 금안이 눈에 들어왔다.

“널 벌하려는 것도, 추궁하는 것도 아니다. 네가 솔직하게 말해 준다면 난 최선을 다해 널 지킬 거야.”

“……정말로……. 절 벌하시려는 게 아닙니까?”

어느새 아드넬의 눈동자엔 한 방울 눈물이 맺혀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그녀의 손을 테시우스가 감싸 쥐며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감히 어떻게, 너를.”

“…….”

“숨통을 죄어 왔던 그 죄책감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나는 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대체 왜……. 제가 전하께 뭐라고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내가 아렌인 걸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저 한때의 친구, 그리고 지금은 병을 치료해 준 사람에 불과할 텐데.

마음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정도의 죄책감 그 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할 이유가 무엇인지.

아드넬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지켜 준다는, 그 말도.

내가 당신에게 무엇이기에 그리 말하는 것인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멈출 새도 없이 입 밖으로 나왔고, 테시우스는 잠시간 침묵했다.

그러나 그는 감싸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주어 강하게 잡았다.

“글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걸.”

“예……?”

“대체 네가 무엇이기에. 아름답게 치장한 영애들 속에서도 너만 눈에 띄는지. 언젠가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괴로운 건지. 말 못 할 진실조차 너라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지……. 대체 네가 내게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는지. 나는 되레 네게 묻고 싶어.”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다.

그 요란한 박동이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거세게.

하지만 확실한 건, 아까와 같은 감정에서 비롯된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정확히 무어라고 정의할 순 없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테시우스가 말했다.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마음속에 성큼 들어와서는, 마주하는 매 순간 혼란스럽게도 날 뒤흔들고 가. 그러니……. 내가 널 그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아드넬, 너 때문이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아드넬이 숨기고 있는 진실도, 한때의 과거도, 심지어는 지금의 모습조차도.

그러나 테시우스가 말하는 건 명백했다.

감춰 두고, 묻어 두고, 외면하리만큼 어지럽던 감정을 토해 내는.

서툴디서툰 사랑 고백이었다.

그리고 나는…….

‘……설렘이고 기쁨이었구나.’

긴장과 두려움에 박동하던 불안한 심장의 뜀박질이 아닌, 설렘에서 비롯된 두근거림이었다.

거짓된 모습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래서 아니라고 그리 생각해 놓고도, 듣는 순간 가슴 속에 차오른 감정은 기쁨이었다.

어쩌면 나도 그처럼,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고통을 덜어 주고 싶고, 크게 다칠까 저도 모르게 걱정하게 되고, 얼굴을 마주하면 두 뺨이 달아오르고.

그렇게 테시우스의 말마따나 천천히 스며들듯,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듯 차가운 현실이 감정의 불꽃을 사그라트렸다.

그만큼 쉬이 말하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감정에 기대기엔 솔직하게 털어놓은 후 파도처럼 밀려올 파급력이 두려웠다.

말한다 한들 믿어 주리란 보장도 당연하지만, 없었다.

아드넬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테시우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곧 맞잡은 손을 자신에게로 잡아끌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아드넬의 눈에 들어온 건, 그녀가 일찍이 보았던 표정이었다.

평소와 같은 말투.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눈물을 닦아 주던 손길은 부드러웠고, 볼에 닿은 온기는 따듯했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위로해 주었던 그때처럼.

테시우스는 그녀의 뺨에 손을 올린 채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슥 훔쳤다.

“당장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약속해 줘, 언젠가는 말해 주겠노라고. 이 순간 말하지 못하는 진실뿐만 아니라 너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말해 주겠노라 약속해 줘.”

이젠 알 수 있고, 볼 수 있었다.

이 순간 마주 보고 있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엔 진심 어린 걱정뿐만 아니라 저를 향한 애정 또한 담겨 있었다.

그가 그동안 보여 주었던 미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드넬은 끝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언젠가는 전하께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수도 변방지.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에 자리한 버려진 마구간 안에, 약속이라도 한 듯 로브를 뒤집어쓴 두 인영의 발밑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어렸다.

“황태자는 예상 대로던가?”

“그럼요. 이젠 절 별궁에 보내겠다 하셨는걸요.”

“하지만 테시우스는 펠릭스만 곁에 둘 텐데. 따로 생각해 둔 방도는?”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가요? 결국 절 사랑하게 되실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낮고 묵직한 음성과 약간은 새된 여자의 목소리가 오고 갔다.

남자는 조금은 탐탁지 않은 듯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로브를 뒤집어쓰고도 퍽 요염한 자태로 서 있는 여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태자가 모르는 것도 확실하겠지?”

“아이참, 몇 번을 물어보시는 거예요. 알고 있었으면 절 보내시겠어요? 황후가 그 독사 같은 눈을 뜨고 지켜보는데?”

“여하간 별궁에 들어가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내가 따로 부르기 전까지 허튼 행동은 말고.”

“저도 이제 황성 생활이라면 빠삭해요. 하여튼, 후작님은 늘 걱정이 지나쳐서 문제라니까.”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그 순간, 뒤집어쓴 로브 속 감춰진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그러나 흉흉하게 빛나는 눈빛만은 명확하게 보였다.

그 시선을 마주한 여자는 아차 하더니 냉큼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며 아양을 떨었다.

“아이, 말실수에요. 너무 그렇게 보지 마셔요.”

“그 말 한마디로 목이 잘려 나가는 게 황성이다.”

“그러니 더 조심할게요. 저라고 뭐 목이 달아나길 바라겠어요? 말씀하신 대로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할게요.”

“후…….”

애교 섞인 목소리는 달콤했으나 남자는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튼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도록. 조만간 다시 부르지.”

“……아 참, 그러고 보니.”

그런데 남자가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 여자가 그를 멈춰 세우며 말문을 열었다.

“대체 그 ‘비기’는 언제 알려 주실 거예요? 그것만 있으면 당장 올해 가을에라도…….”

“너……!”

“아니, 오늘은 말해 주고 가셔야 해요. 제가 기다린 세월만 몇 년인데요? 무려 8년이나 지났어요! 그동안 우리 2황자 전하께선 매 순간 고통받으셔야 했다구요!”

말하면서 울분이 차오른다는 듯 여자가 팩하고 뒤집어쓴 로브를 벗어 넘겼다.

그러자 하나로 묶은 물결 같은 분홍빛 머리칼이 튀어나오며, 이젠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피부와 진한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퍽 예쁘장한 얼굴이었으나 눈엔 독기가 차 있었고, 불만스럽다는 기색이 다분한 표정이었다.

“아직 네 힘으로는 못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그년이 들고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계획’은 훨씬 빠르게 진행했을 거야. 나라고 안 하고 싶어 안 한 줄 아느냐?”

“그러니까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일단 알려 주시면 제가 해 보겠다니까요? 먼발치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며 제 마음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알기나 하세요? 그러잖아도 요즘 그 맹한 남자애 때문에 매일 밤 쉬이 잠들지도 못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데……!”

“세레나!”

“자꾸 이렇게 미루시기만 하면 저도 방도가 있어요. 2황자 전하나 황태자 전하께 다 말해 버리는 수가 있다고요!”

“이……!”

그 순간 남자의 잇새로 부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세레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고개를 치켜세우며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님의 계획에 제가 필수적이듯, 우리는 동업자나 마찬가지예요. 언제까지고 절 10년 전의 여자애로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세레나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하고는 팩하고 몸을 돌려 마구간을 나갔다.

그 안에 홀로 남은 남자의 주먹은 어느새 하얗게 질린 것으로도 모자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 오만방자한 것이……!’

거지꼴에 냄새나던 계집을 주워 와 이만큼이나 키워 준 게 누군데!

지금 저리 고개를 꼿꼿이 들고 턱을 치켜세우며 방자하게 굴 줄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제 협박까지 하는 수준에 다다르다니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차올랐다.

‘내가 어디 너 같은 더럽고 하등한 계집을 테시우스의 옆에 계속 둘 줄 아느냐? 사람에게도 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이래서 천민들이란……!’

남자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손을 탁탁 털어냈다.

그것이 일종의 신호였는지, 남자의 등 뒤로 새로운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명하십시오.”

“주변에서 계속 지켜봐. 혹시나 누구에게든 말하려는 조짐이 보이면 내가 따로 명하지 않아도 잘 알아듣게, 설명하도록.”

“존명!”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의 사내는 마치 왕이라도 대하듯 깍듯한 태도로 대답하더니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홀로 남은 남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구간을 나섰다.

어쨌든 일은 바라던 대로 진행되고 있고, 그가 그리는 큰 그림이 실현될 순간 또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네 표정이 궁금하구나, 과연 그곳에서 어찌 생각할는지.’

남자의 주름진 얼굴 위로 탐욕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로부터 며칠 뒤, 별궁에 새로운 시녀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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