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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2)화 (72/141)

72화

그로부터 며칠 뒤.

오늘따라 술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그만큼 바스토르가 했던 말은 그저 설레기만 했던 테시우스의 마음에 동요를 몰고 왔다.

‘아드넬을 조금 멀리했으면 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야.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고.’

‘……어쩌면, 그 ‘저주’와 관련되었을지도 몰라.’

“하아…….”

테시우스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있어 짐승으로 변하는 저주는 고통 그 자체였다.

변할 때의 통증도 그렇지만 흑표범으로 변하는 매 순간이 두려웠다.

아무리 ‘저주’에 걸렸다 한들 그게 밝혀지는 순간 마녀와 연관이 있다며 꼬투리를 잡고 물어질 사람들은 차고 넘치게 많았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늘 숨어야만 했고, 말하지도 못하는 짐승의 모습으로 홀로 있노라면 온갖 상념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저 곱씹고 곱씹어야만 했다.

끝나지 않는 굴레에 갇힌 듯한 고독은 8년 전부터 지금까지 겪어 왔으나 단 한 번도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저주와 아드넬이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니.

‘물론 바스토르는 심증만으로 말했겠지.’

사람을 매혹시키는 화장품과 치료제, 사람을 매혹시키고 제 뜻대로 조종하는 마녀.

하지만 테시우스는 도저히 아드넬을 의심할 수 없었다.

주인과 서신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점이나, 이름이 흡사한 것 등은 물론 의심의 소지가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드넬이 제게 어떤 술수를 부렸다는 것만큼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따로 알아본다고 한들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어.’

바스토르가 진작 알아보고 말했을 텐데 저가 조사한들 단서를 찾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바스토르는 아드넬을 의심하고 있고, 분명 뒤에서 따로 움직일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을 밝히려면 방법은 하나였다.

‘아드넬에게 직접 듣는 것뿐이야.’

바보가 아닌 이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묻는다고 바로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아드넬이 진실만을 말하게 하려면 그 또한 믿음을 주어야 했다.

‘어차피 나도 얘기하려고 했으니까.’

바스토르는 말하지 말라고,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말라 당부했지만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믿고 있었다.

그가 8년 전 처음 마주친 아렌의 모습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아드넬의 모습을 굳게 신뢰했다.

이날 늦은 밤, 테시우스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침실과 이어진 아드넬의 방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원체 늦어 혹시 자고 있진 않을까 싶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닫힌 문이 열렸다.

“……2황자 전하?”

그래도 잘 준비를 하던 참인지 잠옷 차림이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퍽 귀여워 테시우스는 살짝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아……. 그렇지요, 지난번 식사 이후로 날짜가 꽤 지났으니……. 그런데 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할 말이 있어서.”

“할 말이라면…….”

아드넬은 잠시간의 생각 끝에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퍼뜩 떠올렸다.

지난번 정자에서 뭔가를 말하려다 불청객의 등장에 미처 못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아……. 예, 물론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아드넬이 몸을 살짝 비켜서자 테시우스가 침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방 한쪽에 있는 응접용 소파에 앉았고, 아드넬은 맞은편에 얌전히 앉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머지않아 테시우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네가 정자에서 요리를 해 주었을 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아드넬도 기억하는 말이었다.

사실 얼마 전 네가 만난, 까지 듣고 그 뒤는 듣지 못했지.

그러고 보니 그건 정말 뭐였을까.

아드넬이 고개를 살짝 들어 테시우스의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하자, 그는 주먹을 꽉 쥐는가 싶더니 곧 힘을 풀며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다.

“이곳 별궁 후원에서 지내던 테오에 대한 이야기다.”

“테오라면…….”

“그에게 매년 이맘때쯤 다시 짐승으로 바뀌고, 내가 도움을 주어 여기에 머물렀다 들었겠지.”

“그걸 전하께서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테오를 알고 있다고 말실수를 한 적은 있지만 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2황자가 그걸 정확하게 말할 줄이야, 아드넬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테시우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예?”

일순 가슴이 불안감으로 박동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긴장이 되는 걸까.

아드넬이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을 그러쥔 순간이었다.

“델리움의 산속에서 만난 테오가, 바로 나였다.”

그 한 마디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익숙한 풍경 속 유일하게 이질적이던 커다란 짐승.

윤이 흐르는 칠흑 같은 검은 털과 사납게 드러난 새하얀 송곳니.

하지만 속은 사람이고, 된장은 싫어하면서 쌈장은 좋아하던 귀여운 흑표범.

한때 나의 소중한 친구였던 테오.

그랬던 그가 사실은, 2황자라니.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아드넬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를 본 테시우스의 눈동자 또한 거세게 흔들리며, 차마 볼 자신이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산티노로 가던 여행길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어났을 뿐인데, 깨어나 보니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어.”

“…….”

“날 호위하던 이들은 내가 잡아먹혔다고 생각한 건지 날붙이부터 들이밀었다. 그래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널……. 만났지.”

“왜……. 제게 진작 정체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말하려 했다. 정확히는, 바스토르를 만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은 뒤 네게 모든 걸 밝힐 생각이었어.”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바스토르의 오해 때문이었노라, 테시우스가 덧붙였다.

아드넬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대뜸 자신을 체포하라 명령했던 남자아이.

그런데 그가 황태자 바스토르였다니, 아드넬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당황한 그녀를 대신해 테시우스가 계속 말했다.

“네가 그렇게 사라진 후, 흔적을 지우길 바랄 거란 생각에 네가 살던 거처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그로부터 8년 뒤 널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게 되었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건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불을 질렀고, 카리아 상회의 주인은 그 시기에 아렌이 죽었다고 했다.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정확히는, 내가 죽였다고 생각했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 수도 있던 8년 전의 과거를 따듯한 추억으로 채워 준 널, 내 손으로 타오르는 화염 속에 밀어 넣었다고 생각했어.”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리만큼 끔찍했다.

그 죄책감에, 미안함에, 마음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매 순간 숨이 턱턱 막혔노라고.

테시우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고백했다.

“내가 테오의 모습으로 있을 때 이미 들었겠지만, 나는 지금도 매년 짐승으로 변한다. 그래서 후원의 출입을 막고 숨어 지내는 거야. 그런데 그때……. 네가 날 알아보았다.”

“…….”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것이 감사했어. 짐승으로 바뀌는 저주마저도 기쁠 만큼. 넌 그때의 나를 좋아해 줬고, 반가워했고, 친구로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더 말하지 못했다.”

정체를 밝히고 나면 더는 날 ‘테오’로 보지 않을 것 같아서.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고 비비는 일도,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말을 편히 하며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두, 사라질 테니까.

“그럼……. 이제 와 말씀하시는 이유는…….”

“더는 감추고 싶지 않아서.”

테시우스는 얼굴을 감싼 손을 내리며 아드넬을 응시했다.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하다. 하지만 ‘테오’일 때의 나와 ‘황자’일 때의 나를 똑같이 생각해 줬으면 했어. 이젠 네게 나라는 사람을 솔직하고, 또 거짓 없이 보여 주고 싶었어. 그리고…….”

테시우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까지 들은 얘기만으로도 충격이 클 테지만, 아드넬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테시우스는 안쪽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게 믿음을 줘야지 너 또한 진실을 말하리라 생각했다.”

“진실이라니…….”

“네가 정말로 테오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지금의 날 믿는다면.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해.”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드넬은 새하얗게 질린 주먹을 애써 감추며 긴장했다.

“아렌, 아드넬, 아실라. 이 세 개의 이름이 비슷한 이유. 주인과 서신을 주고받지 않으면서 어떻게 화장품을 만드는 건지. 그리고……. ‘마녀’에 대해 혹 아는 바가 있는지.”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내뱉은 마지막 질문 때문이었다.

처음 두 가지 질문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렌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름의 유사성은 눈치챌 수밖에 없고, 저에 대해 알아봤다면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녀라니, 혹시 그에게 준 연고의 효능을 눈치챈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능력을 발현할 때 누군가 지켜보았던 것일까?

만약 말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나라에서 ‘마녀’라는 것은 즉결 처분 대상이나 다름없는데 솔직하게 말했다가 산 채로 화형이라도 당하면?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2황자에겐 내일 말하겠다 하고, 동이 트기 전에 도망치면 어떻게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수배령이 떨어지면?

필립과 제이든은?

이성을 붙잡으려는 노력과 다르게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숨이 턱턱 막혀서인지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꽉 움켜쥔 주먹 위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드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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