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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1)화 (71/141)

71화

‘날씨도 좋은데 조금만 걷고 갈까.’

테시우스는 별궁 후원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 영향인지 정원사도 크게 관심을 기울여 가꾸지 않았는데, 본성 후원은 넓기도 어마어마하게 넓었지만 아름답기도 해서 잠시간 산책하기엔 딱 적당했다.

이참에 조금 걸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아드넬은 후원에 접어들었다.

원체 넓어 길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산책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금은 뜨거운 바람을 느끼며 걷던 중, 한 인영이 눈에 띄었다.

‘……하르트 공녀?’

후원에는 짧은 티 타임을 즐길 수 있는 티 테이블이 놓인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율리시아가 홀로 앉아 있었다.

시중을 드는 시녀도 없었고 오롯이 그녀 혼자였다.

아드넬은 조금 놀라 멀찍이서 율리시아를 지켜보았는데, 그녀 특유의 담담한 무표정은 여전했으나 어쩐지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듯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잠깐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아드넬은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왠 오지랖이야. 나 할 일만 생각해도 벅찬데, 내가 뭐라고 나서.’

율리시아와 따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역시 가서 말을 거는 건 오지랖인 것 같았다.

결국 아드넬은 못 본 척 지나칠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길이 한 방향으로만 나 있어 피치 못하게 조금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는데, 일부러 다른 쪽을 쳐다보며 걷는 아드넬을 놀랍게도 율리시아가 먼저 불러 세웠다.

“……아드넬 님?”

주변은 조용했고 율리시아의 목소리는 못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지도 않았다.

심지어 율리시아는 아드넬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에 못 들은 척하려야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아드넬이 고개를 돌리자 율리시아가 먼저 다가왔다.

“이곳 본성까진 어쩐 일이신가요?”

“아, 그게……. 황후 폐하께 새 화장품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혹시 디아나도 있었던 걸 알려나?

아드넬이 눈치를 보던 그때, 율리시아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예.”

젠장, 알고 있구나.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린 기분이 들었다.

“혹시 많이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저와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아……. 그, 음……. 잠깐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늘 담담한 얼굴만 봐 왔다 보니 율리시아의 어두운 표정은 퍽 낯설면서도 궁금했다.

뭐, 이야기 잠깐 듣는 정도야 괜찮겠지.

아드넬은 율리시아를 따라 그녀가 앉았던 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율리시아는 시녀를 아예 물렸는지 직접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혼자 있었는데 왜 빈 찻잔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덧붙였다.

“……실은 오늘 황후 폐하와 담화를 나누고자 미리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디아나 반 체스터 공녀도 마찬가지로 저와 같은 날에 말씀을 드렸더군요.”

“아…….”

“체스터 공녀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율리시아는 말을 하는가 싶더니 곧 입을 다물며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이, 무더운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긴 소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황후와 디아나는 그래도 팔꿈치까진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아드넬의 눈가가 미묘하게 찌푸려진 찰나 율리시아가 고개를 들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될까요, 아드넬 님.”

“제게……. 말씀이십니까?”

“새로운 화장품을 만들어 주었으면 해요. 디아나 공녀와 함께가 아닌, 오직 제게만요.”

예상치도 못한, 그리고 뜬금없는 부탁이었다.

갑자기 웬 화장품? 하는 생각이 들던 그때, 아드넬은 율리시아의 떨리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어딘가 굉장히 두렵고, 무서워하는 듯한 가녀린 떨림이었다.

그리고 부탁하는 목소리엔 간절하다 못해 애원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드넬이 조금 당황하자 율리시아는 냅다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기까지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한눈에 빠지실 수 있는 그런 화장품이 필요해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들어주겠어요. 그러니…….”

“자, 잠깐만요, 공녀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지 않으면 저는 정말로……!”

그리 말하다가도 율리시아는 또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엔 그렁그렁한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늘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첫인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공녀님, 우선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무슨 이야기든 들어드릴 테니…….”

“아니, 제가 필요한 건 화장품이에요. 제발 만들어 주세요, 대가는 얼마든지 치를게요.”

율리시아는 자기 속사정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계속 가능하냐고, 가능해야만 한다고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에 아드넬은 큰 고뇌에 빠졌다.

‘하르트 공녀에게만 만들어 줬다가는 분명…….’

제 앞에서도 대놓고 편애하던 모습을 보여 주던 황후가 나설 수도 있었다.

형평성과 공평성을 언급하며 벌이라도 내렸다간 아드넬은 꼼짝없이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율리시아는 진심으로 다급하고 간절해 보였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그 침착하던 공녀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걸까.’

아드넬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율리시아의 얼굴은 점차 절망감으로 물들어갔다.

“……역시, 어려운 부탁이었나 보군요. 미안해요.”

“그……. 아닙니다, 공녀님.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바쁘신 분이니 이만 돌아가도 좋아요.”

“예…….”

그러나 아드넬은 끝내 만들어 드리겠단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경합 중이었고, 황후가 꼬투리를 잡는 순간 아드넬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위험 부담을 온전히 저가 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물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별궁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렇게 아드넬은 심란한 마음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그 시각, 본성 황태자 집무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스토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은 중년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황실 친위대 기사단장, 호르세였다.

“후작에게 따로 명할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데려온 평민, 아드넬을 기억할 테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봤으면 해.”

“자세히라면…….”

“내가 알기로 아드넬은 ‘아실라’라는 주인에게 서신을 받아 화장품을 만든다고 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더군, 서신을 주고받은 적도 없거니와 따로 키우는 전령조도 없어.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야.”

아렌, 아드넬, 아실라.

비슷해도 너무나 비슷한 세 가지 이름.

바스토르는 아드넬이 한때 ‘아렌’이었다는 것을 언급하며 흡사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호르세는 무척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예전에 쓰던 이름이 ‘아렌’이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8년 전까지는. 혹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

“……실은, 저도 따로 그 청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건 바스토르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 추궁하자 호르세가 덧붙였다.

“2황자 전하께서 데려오라 명하신 후 혹 위험한 인물일까 싶어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제가 들은 건 ‘아드넬’ 이전에 ‘아렌’이라는 또 다른 대리인이 있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세 개의 이름이 다른 듯하면서도 무척 비슷해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것 말고 더 알아낸 것이 있나?”

“송구하지만 없습니다. 카리아 상회와 거래를 시작하던 당시 카르카스에 정착했는데, 그 전의 과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런가.”

바스토르는 심란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조사해도 나오지 않는 과거라니, 테시우스와 헤어진 이후의 공백기 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기에 행적을 잡을 수가 없단 말인가?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지켜만 볼 수는 없어.’

그러잖아도 지금껏 아드넬을 줄곧 지켜보던 눈을 조만간 별궁에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여기서 조사를 멈출 생각도 없었다.

“후작, 혹 마녀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마녀라면……. 모두가 아는 만큼만 알고 있습니다.”

간악하고 사악한 인간, 이상한 주술을 사용하고 사람을 매혹시키는 약을 만들어 제 마음대로 조종한다 했다.

짐승을 부릴 줄 알아 숙청에도 꽤 애를 먹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힘이라 모두 사냥당한 지금은 존재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왜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호르세가 눈을 들자 바스토르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아드넬에 대해 조사하되, 그가 마녀 혹은 저주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알아보도록 해.”

“왜 갑자기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그것까진 말해 줄 수 없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만들어내는 화장품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매혹시킨다는 거야. 화장품을 만드는 이가 연고를 비롯한 치료제를 만드는 것도 이상하고. 나는 그런 사람을 테시우스의 옆에 둘 수 없어. 다만 테시우스가 그 아이를 퍽 아끼니, 따로 알리지는 말게.”

“……명 받들겠습니다.”

바스토르의 말에 호르세는 어딘가 복잡한 얼굴로 깊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방에 홀로 남은 바스토르도 복잡하기로는 마찬가지였다.

부디 호르세가 저들의 의구심을 풀어낼 단서를 찾아내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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