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0)화 (70/141)

70화

“세상에, 대체 티 파티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고 오신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뭘 딱히 한 것 같진 않은데…….”

아드넬은 모나가 가져온 수북한 초대장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니까 사흘 전, 벨리페가에서 열린 티 파티에 다녀온 뒤.

일부러 짜기라도 한 듯 티 파티 초대장이 연달아 도착했다.

하나같이 수도에서 열리는 것들로 날짜가 겹치는 초대장도 더러 있었다.

갑작스레 빗발치는 초대에 아드넬은 무척 당황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충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넋 놓고 기다리긴 싫다 이거지.’

초대를 받아 가게 되면 자리를 준비한 주최자에 대한 성의로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 때문에 아이크림을 만들어 갔고, 실비아는 무척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런 고가의 화장품은 나중에나 팔 수 있다니 성격 급한 귀부인들이 티 파티를 부랴부랴 준비해 초대한 게 틀림없었다.

당연하지만 아드넬은 갈 생각이 없었다.

‘수도의 중앙 귀족들이니 인맥을 만들어 두면 좋긴 하겠지만. 솔직히 그리 아쉽진 않아.’

관계의 주도성을 따지자면 귀부인들이 환장하는 화장품을 만들 수 있는 아드넬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쉬울 게 없었다.

돈은 충분히 많고, 황실 일원과도 안면이 있다.

모델 건은 물 건너갔지만 공녀들에게 화장품을 만들어 줌으로써 빚도 생겼다.

그런데 굳이 수고해 가며 값비싼 화장품을 만들어 선물하고 인맥을 쌓을 필요가 있을 리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티 파티는 무슨 티 파티.’

그러잖아도 아드넬은 근육통 다음으로 선보일 화장품 제작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천연 바셀린이었다.

‘일종의 가정상비약이지. 연고로 먼저 브랜드를 알리고 바셀린으로 완전히 각인시키는 거야.’

유명한 피로 해소제를 떠올렸을 때 로고가 바로 생각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더구나 천연 바셀린은 피부 보습, 튼살, 거친 피부 등에 두루 쓰이며 립밤, 힐밤 대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 여유가 없는 평민들에겐 이만한 화장품이 없었다.

이것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 언젠가 제국민이 모두 알게 된다면 ‘마르타’라는 브랜드는 제국을 대표하는 화장품 브랜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아무것도 안 하고 돈방석에 앉는 거지. 어마어마한 부, 명예, 유명세!’

그야말로 노후 걱정이 없었다.

지금 근육통 연고 생산량만 따져도 머지않아 정식으로 판매할 수 있어서 예전처럼 아드넬이 일일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놀고먹기만 해도 알아서 돈이 벌리는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히죽 입꼬리가 올라가며 행복해졌다.

“……아드넬 님?”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그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히죽 웃는 얼굴에 모나가 부르자 아드넬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초대장들은 다 어떻게 할까요?”

“……답신을 보내야겠죠. 다만 모두 거절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아 티 파티에 참석할 여유가 없네요. 혹 답신을 대신 부탁드려도 될까요?”

모나는 사용인 중에서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으로, 보통 성별에 따라 사용인이 배치되지만 남장 중인 아드넬에게 그녀가 배치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평민인 아드넬이 글을 모를 거라 판단한 펠릭스가 모나를 사용인으로 배치한 것이다.

“물론이에요. 음……. 아무래도 황후 폐하를 언급하는 게 낫겠지요?”

“예. 마침 오늘 가야 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아드넬은 황후만 생각하면 정이 뚝 떨어졌다.

당장 테시우스의 바뀐 태도만 보아도 그랬다.

예전에 별궁에 막 도착했을 때 모나는 그의 성격이 원래부터 포악하고 거칠진 않았다고 했다.

심한 병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때문에 예민해진 탓에 그리 변해 버렸다고.

여기서 아드넬이 그동안 카리아 상회를 통해 납품한 화장품을 황후가 별궁에 조금만 보냈어도 막 도착했을 때처럼 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짜고짜 화장품을 만들어 바치라질 않나, 사업도 접으라질 않나.’

라그랑까지 가서 미용 흙을 구해 오고, 메이크업 베이스에 비비크림까지 만들어 줬는데.

그 대가로 요구한 모델 건은 황후의 말 한마디로 물 건너가 버렸다.

당장 그것만 생각해도 싫지만 오늘은 일전에 만들어 둔 데오드란트를 주러 가야 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체라도 해야지 감정을 안 쌓지 않겠는가.

‘사업에 제재만 걸어 봐라. 절대 안 만들어 줄 거야.’

모나가 수북한 초대장을 챙겨 나간 뒤, 아드넬은 작업실에 들러 전에 만들어 둔 데오드란트를 챙겼다.

공녀들에게 만들어 준 두 가지 화장품과 미네랄 파우더는 다른 사람을 통해 보냈지만 이것만큼은 직접 얼굴을 보고 줘야 했다.

얼마나 만들기가 힘든지 어필하는 건 그녀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곧장 본성으로 향한 아드넬은 머지않아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미리 약속을 잡고 온 터라 문 앞에 서 있던 시녀장이 먼저 방문을 고했다. 들어오는 걸 허락하는 종소리가 울리자 아드넬이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응접실엔 알라니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디아나까지 있었다.

‘하르트 영애는 왜 없지?’

응접실에서 차를 즐기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비 경합 중인데 율리시아만 쏙 빼놓고 있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드넬은 일단 허리를 깊게 숙여 보였다.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고귀한 검이자 방패이시며, 제국의 땅을 비추는 지고한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일로 만남을 청한 것이지?”

“긴히 드릴 화장품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알라니아는 턱을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빈자리를 가리켜보았다.

앉으라고 말이라도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아드넬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아 가져온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 보였다.

그리고 뚜껑을 열자, 별다른 색이 없는 반투명한 액체만 담긴 조그마한 용기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볼품없는 모양새였는지 알라니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게 화장품이라고?”

“그렇습니다. 이름은 데오드란트, 여름철에 가장 필요한 화장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설명하기에 앞서 아드넬은 긴장감에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게 냄새 같은 예민한 부분이라면 더더욱.

“아시다시피 더운 여름철엔 으레 땀이 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땀이 나다 보면 자연스레 좋지 못한 체취가 나기도 합니다. 물론 고귀하신 황후 폐하께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이나, 바르면 시원한 느낌과 함께 상큼한 향이 나기 때문에 무더운 날씨에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화장품이라고 생각되어 만들어 보았습니다.”

“…….”

알라니아는 특유의 서늘한 눈빛으로 아드넬이 말하는 걸 잠자코 지켜보았다.

옆에 앉은 디아나도 살짝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말에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는지 알라니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냄새와 관련된 이야기라 그런지 탐탁지 않은 표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 거지?”

“땀이 많이 나는 부위에 두드리듯 발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양이 너무 적군. 게다가 한 개뿐이라니.”

그리 말하며 알라니아는 옆에 앉은 디아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한 개’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 주는 태도였다.

‘내가 여기에 체스터 공녀가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냐고.’

미리 말해 주지도 않았으면서,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아드넬은 바짝 긴장한 채로, 여기에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체 만드는 방법이 어렵고 들어가는 재료가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이 정도 양이 최선이었습니다. 사실 재료가 너무 부족해 아예 만들지 않을 생각도 했습니다만, 황후 폐하의 자애로우심에 보답하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좋은 화장품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 이리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하군, 디아나 공녀. 더위라는 것이 사람을 가리는 것도 아닌데 선물로 주긴 어려울 듯해.”

“전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오히려 그리 귀한 것이라면 응당 폐하께서 사용하시는 게 맞지요.”

“어쩜 공녀는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이리 어여삐 말할까. 이러하니 내 공녀와 담화하는 시간을 즐길 수밖에.”

알라니아가 아드넬을 보는 눈과 디아나를 보는 눈빛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누가 보면 자기 딸이라도 되는 듯 대놓고 예뻐하는 것이 보였다.

‘역시 그건가, 편애?’

당연하지만 아드넬은 황제파, 귀족파에 대해서는 전무했다.

두 공녀 중 누가 친 황제파 가문인지 알 턱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예뻐하는 모습을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체스터 가문이 황제파이고, 그래서 아예 작정하고 디아나를 바스토르의 짝으로 만들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경합 중인데. 이렇게 대놓고 편애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뭐, 어차피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율리시아가 어쩐지 조금 불쌍하긴 했지만.

아드넬은 이만 가 볼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길게 대답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알라니아는 아예 디아나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말이지 정을 붙이려야 붙일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아드넬은 응접실을 나와 별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드넬은 가던 중 전혀 예상치 못 한 사람을 마주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율리시아, 황후와의 담화에 초대받지 못한 하르트 공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