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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69)화 (69/141)

69화

벨리페가는 수도의 중심지에 있었는데, 과연 그 저택의 위용마저도 남달랐다.

그동안 봤던 지방 영지의 저택들이 별장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면 수도의 저택은 그야말로 궁전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황성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건물 하나가 어찌나 큰지 층수는 3층에 불과해도 그 넓이가 어마어마했다.

건물을 둘러싼 울타리 너머로 얼핏 보이는 정원도 일전에 보았던 별관 연무장만 한 크기였고 대문을 넘어서고도 저택 입구는 저 멀리 보일 정도였다.

마차를 타지 않고서는 가는 데만 족히 십여 분은 걸릴 거라며 아드넬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마차는 경비병이 지키는 대문을 통과해 저택 앞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는데 아드넬이 내리자마자 수많은 사용인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벨리페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드넬 님.”

“……어, 그, 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어찌나 깊게 숙여 보이는지 아드넬은 당황스러워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이내 몸을 바로 세운 사용인 중 한 명이 공손한 태도로 안내를 자처했다.

아드넬은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는데, 귀족의 저택도 처음 와 보는 데다 티 파티라는 것도 처음인지라 이 상황이 못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딱히 예술적인 안목은 없으나 저택 곳곳에 놓인 여러 가지 장식품이며 그림이며 무엇 하나 값싸 보이는 게 없었고, 한눈에 봐도 관리가 잘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릎의 통증 때문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더니, 대신 안살림에 더욱 신경을 쓴 듯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아드넬이 진짜 놀란 건 그다음이었다.

저택 뒤편에 있는, 실비아가 직접 가꾼 작은 화원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와아…….’

저택 정면에 있는 정원은 별궁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뒤편의 작은 화원은 전혀 달랐다.

꽃밭이라는 단어가 체감될 정도로 만발한 꽃들은 제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고, 준비된 테이블이며 의자에도 작은 다발로 이루어진 꽃들이 달려 있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은 꽃에 향기가 독하진 않을까 싶었으나 인위적인 향수 냄새가 아닌 생화의 향기는 은은했고, 그마저도 드문드문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날려 보내 코가 시큰거리는 일도 없었다.

아드넬이 잠시 감상에 젖은 사이, 다른 귀부인과 대화 중이던 실비아가 시녀의 언질에 고개를 돌렸다.

“……아드넬 님!”

대번에 아드넬을 알아본 실비아는 그녀가 가꾼 꽃처럼 만개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다가왔다.

주최자의 목소리에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드넬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실비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벨리페 후작 부인. 이리 귀한 자리에 초대까지 해 주시다니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인걸요. 바쁘시다는 건 알고 있으나 보답할 길이 없어 이렇게나마 자리를 마련해 보았어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고요. 아, 이만 자리에 앉을까요?”

“아, 예. 감사합니다.”

다만 나이도 꽤 있는 귀부인이 존칭을 쓰며 심히 높여 주니 조금 불편했지만 아드넬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가장 상석인 테이블 끝 바로 옆자리였다.

실비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시녀에게 차를 가져오라 이르고는 곧장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제 남편이 과한 부탁을 했다는 걸 뒤늦게 듣고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몰라요. 2황자 전하의 치료만으로도 충분히 바쁘실 텐데, 어디서 관절염에 좋다는 얘기만 들었다 하면 눈이 돌아가는 사람이라…….”

“괜찮습니다, 부인. 수고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과한 부탁도 아니셨고요.”

“그래도요. 다짜고짜 서신부터 보내 불렀다기에 제가 크게 혼을 냈답니다. 철없는 그이를 대신해 꼭 사과하고 싶었어요.”

그리 말하며 실비아는 아드넬의 손등을 두 손으로 감싸듯 덮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온기에 조금 놀란 찰나, 실비아가 덧붙였다.

“하지만 아드넬 님이 보내 주신 연고를 사용하고서부터 정말로, 통증이 많이 사라졌답니다. 그동안 관절염에 좋다는 건 다 해 보았지만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박하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아픈 부위를 자극해 주더니 걷는 게 아주 편해졌어요.”

확실히, 거동이 불편하다고 들은 것 치곤 곧잘 걷는 것 같았다.

당장 지금만 봐도 크게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근육통 연고만으로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비아는 통증이 덜한 것만으로도 기쁜 듯 아드넬에게 고마운 마음을 한껏 표현하고 있었다.

‘혹시나 의심받을까 봐 다른 재료는 안 넣었는데…….’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니 테시우스에게 준 연고와 마찬가지로 능력을 사용해 관절염 치료제를 만들어 볼까 하는 마음도 문득 들었다.

한편 파티의 주최자가 요즈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아드넬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이목이 쏠리며 사람들도 차츰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어 있던 자리에 하나둘씩 앉으면서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다.

한 귀부인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건 바로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공녀님들께도 특별한 화장품을 만들어 드렸다고 들었어요. 듣기로는 피부의 잡티를 말끔히 가려 준다죠?”

“저도 봤어요! 피부가 훨씬 화사하고 깨끗해 보이던걸요, 그건 무슨 화장품인가요?”

확실히 여자들이라 그런지 화장품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특히나 어린 영애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는데 저들도 갖고 싶다는 기색이 다분한 얼굴이라 설명을 안 해 줄 수 없었다.

‘모델로 쓰는 건 무산됐지만 이참에 홍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메이크업 베이스나 비비크림, 섀도우 등의 색조 화장품은 라그랑에서 나오는 미용 흙이 필수로 들어가야 하는 만큼 대량 생산엔 부적합했다.

하지만 무조건 상회를 통해 팔라는 법도 없고, 꼭 저렴한 값에만 팔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마르타’라는 브랜드를 평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이참에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돌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 아드넬은 예의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화장하기 전, 피부색을 균일하게 맞춰 주고 잡티 등을 가려 주는 용도의 화장품으로 체스터 영애께서 ‘특별히’ 부탁하셔서 만들어 드렸지요.”

“그 화장품은 아예 팔지 않는 건가요? 듣자 하니 황후 폐하께서 쓰시는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이 곧 살롱을 연다던데…….”

“원래 주인님의 계획은 그러셨습니다만, 이번에 조금 바뀌었습니다. 줄곧 거래하던 카리아 상회를 통해 화장품을 보다 저렴하게 판매하기로요. 해서 당분간은 공녀님들께 만들어 드린 고가의 화장품 종류는 판매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드넬의 말에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물론 예상한 반응이었다.

아드넬은 벨리페가에 오기 전 만든 아이크림을 꺼냈다.

미리 준비한 상자에 넣어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해 왔는데 그 안에 든 게 화장품이라는 걸 확신이라도 하듯 몇몇 귀부인들이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이건 벨리페 후작 부인께 드리는 제 작은 선물입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세상에나,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는걸요. 그래도 고맙게 받겠어요.”

준비한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실비아는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선물을 뜯어 보았다.

그녀가 안에 든 작은 통을 꺼내 보인 순간 아드넬이 냉큼 덧붙였다.

“레티놀 아이크림이라는 화장품입니다. 주름 개선에 효과가 좋고, 눈가에 바르면 촉촉한 느낌과 함께 보습력이 오래 지속되지요. 다만 빛과 열에 민감해 밤에만 사용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역시나 ‘주름 개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이가 있는 귀부인들이 크게 반응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주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경륜을 말해 준다지만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만큼은 사양하고 싶은 게 여자의 마음이라, 실비아를 바라보는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실비아도 마찬가지로 대놓고 티를 내진 않지만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살롱을 열지 않는다니 너무 아쉽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수도에 새로 생긴다기에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살롱도 열지 않고 고가의 화장품은 판매하기 어렵겠다니 아쉬움만 한가득이었다.

이쯤에서 살짝 홍보해 볼까.

아드넬은 태연한 얼굴로 아쉬움을 한껏 드러내는 귀부인들을 향해 말했다.

“저도 대리인으로 있는 것이 전부라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주인님께 한 가지 들은 게 있긴 합니다.”

“그게 뭔가요?”

“당분간은 카리아 상회를 통해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저렴한 화장품을 판매하지만, 나중엔 같은 이름으로 고가의 화장품 또한 내놓을 계획이라 하시더군요.”

“……아! 아드넬 님이 제게 주신 그 연고 통의 문양이 그것이었군요.”

그때 실비아가 연고 통에 그려진 상징과 이름을 떠올리고 맞장구치자 아드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당장은 어렵겠으나 혹 이런 기능성 화장품이 필요하시다면 ‘마르타’라는 이름만 기억해 주시면 됩니다.”

“그날이 되도록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저도요.”

홍보는 꽤 성공적이었다.

저렴한 값에 파는 화장품만 얘기했다면 귀부인들은 ‘마르타’라는 브랜드를 오히려 격이 낮다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봤을 테지만, 주름 개선에 효과가 좋은 아이크림을 선보이며 고가의 화장품 또한 만들 계획이라 하니 저마다 갖고 싶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드넬은 상상도 못 했다.

훗날을 기약할 거라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별궁으로 돌아가고 정확히 사흘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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