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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68)화 (68/141)

68화

아드넬은 팬에 남은 기름을 닦아 낸 뒤 새 삼겹살을 올렸다. 삼겹살이 차츰 익어가며 기름이 흘러나왔을 땐 적당히 익은 김치와 얇게 썬 마늘을 차곡차곡 올렸다.

고기 기름에 익힌 김치와 마늘만큼 삼겹살과 찰떡궁합인 건 없었다.

“먼저 여기, 이 오크 리프에 쌀밥을 적당량 올리십시오.”

“손으로…… 말이냐?”

다만 바스토르는 선뜻 아드넬이 하는 것처럼 맨손으로 오크 리프를 들지 못했는데, 일전에 리들리가 제육볶음을 먹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아드넬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테시우스……!”

“어차피 우리끼리 있는데 예법이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난 더 맛있게 먹고 싶어.”

“…….”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니,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그러나 테시우스의 말대로 이곳엔 저들 셋뿐이었다.

더구나 파비오 후작이 후원 입구 근처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끔 대기하고 있어 혹 다른 누군가에게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스토르는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 아드넬이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했다.

포크로 새하얀 쌀밥을 퍼서 오크 리프 위로 올리는 동작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퍽 귀엽기도 했다.

아드넬은 살짝 웃으며 거의 다 익은 김치를 싹둑싹둑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다음 순서를 알려 주었다.

“그다음엔 고기를 한 점, 원한다면 두 점을 올리셔도 됩니다. 여기에 소스를 적당량, 구운 김치와 마늘을 곁들이시면 되는데 매운 것을 잘 못 드신다면 마늘은 넣지 마십시오.”

“김……뭐?”

그때 바스토르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발음에 알쏭달쏭한 얼굴로 묻자 아드넬이 아차 하며 냉큼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이건 ‘김치’라는 것인데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매운 양념을 묻혀 숙성한 배추 요리입니다. 이 또한 입에 잘 맞으실 겁니다.”

생김치는 낯설지 몰라도, 고기 기름에 구운 김치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다만 포크로는 잘 찍히지 않아 아드넬이 집게로 두 황자가 들고 있는 쌈 위에 착착 올려 주었다.

“마늘도 올려드릴까요?”

“난 좋다.”

“황태자 전하께선…….”

“……한 번……. 도전해 보지.”

“알겠습니다.”

여기에 마늘까지 올려 준 뒤, 알아서 쌈장을 적당량 묻히자 아드넬은 자신이 만든 쌈을 하나로 모아 접었다.

“이제 한입에 드시면 됩니다.”

“뭐……. 이 큰 걸, 한입에 먹으라고?”

“예, 한입에 드십시오.”

필립이 만드는 쌈 크기를 보면 크단 소리가 안 나올 텐데.

아드넬은 시범을 보여 줄 겸 먼저 입을 와앙 벌리고 쌈을 한입에 넣었다.

테시우스도 조금 놀랐는지 바스토르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들려오는 와삭, 하고 이파리를 베어 무는 소리.

고기와 밥을 감싼 쌈이 벌어지며 깜짝 선물처럼 튀어나오는 다채로운 맛!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으음……!” 소리를 내며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씹었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테시우스는 생각했다.

‘아드넬은 생각보다……. 입이 크구나.’

입 자체는 조그만데 입 안이 큰 걸까.

하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씹다 보니 볼이 다람쥐처럼 튀어나와 그마저도 귀여웠다.

곧 테시우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쌈을 싸서 한입에 넣고, 바스토르도 뒤이어 자신이 만든 쌈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아드넬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음!” 하는 탄성이 나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솔직히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하지만 아드넬의 말은 사실이었다.

입에 밀어 넣은 오크 리프를 베어 문 순간 고기와 마늘, 김치와 쌈장의 맛이 한데 어우러졌다.

자칫 짜게 느껴질 수 있는 소스와 김치는 아무런 간이 되지 않은 쌀밥이 잡아 주었고, 조금 맵긴 하지만 구운 마늘의 알싸한 풍미가 일품이었다.

여기에 채소 특유의 아삭한 식감까지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완벽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허…….”

지금까지 먹어 온 음식도 맛있었지만, 이 ‘삼겹살’이란 것은 여태 먹은 음식 중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이걸 이제야 맛본 게 억울할 정도로.

‘이 맛있는 음식을 둘이서만 먹으려 했다니. 마침 오늘 안 왔으면 아쉬웠겠어.’

아드넬의 정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상쩍은 것들이 일순 잊힐 정도로 맛있었다.

처음 먹은 음식인데도 나중에 문득 떠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말은 다 한 것이다.

결국 바스토르는 쌈을 삼키자마자 퍽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이 음식을 먹을 땐 나를 꼭 부르도록.”

“……예?”

“이 맛있는 걸 둘이서만 먹는다니 너무하지 않나. 그러니 앞으론 나를 무조건, 필수적으로 부르도록 해.”

두 사람만 두기엔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으니 내가 옆에서 계속 지켜봐야지.

사실 핑계에 불과했으나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할 만큼 맛있었다.

한편 농담처럼 말하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바스토르가 무슨 심각한 문제를 언급하듯 미간을 좁힌 채 진지하게 말을 하자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크게 웃고 말았다.

“왜 웃는 거지?”

“아, 하아, 그게, 송구합니다. 이렇게 웃으면……. 푸흡, 아, 안 되는데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쉬이 가라앉질 않는 웃음에 눈물까지 찔끔 났다.

아드넬은 소매로 눈을 훔치며 가까스로 심호흡했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아무튼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바스토르는 곧장 오크 리프부터 집어 들었다.

예법 따위는 머릿속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해 질 녘 노을을 맞으며 퍽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만끽했다.

* * *

다소 평화롭다면 평화롭다고 할 수 있는 나날이 이어졌다.

무투회와 탄신연이라는 큰 행사도 끝났고, 근육통 연고에 대한 문의가 빗발치는 만큼 아드넬과 클리프는 서로 합심해 대량 생산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다만 라그랑은 미네랄이 풍부한 미용 흙과 금홍석이 나오긴 하나 수도와 거리가 꽤 있기 때문에 오고 가며 드는 시간과 비용이 상당했다.

따라서 천연 화장품 재료를 추출하는 공방을 세워 해당 지역 주민을 교육해 공정에 투입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수도와 가까운 영지의 일부 면적을 라그랑과 마찬가지로 대여해 카리아 상회 소속 화장품 공방을 만들기로 했다.

이미 있는 건물을 사들여 공방으로 바꾸는 것이라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또한 해당 지역 주민을 고용했고, 아드넬이 만든 교육 지침서대로 교육한 뒤 곧장 투입했는데 근육통 연고의 난이도 자체가 워낙 쉽다 보니 화장품을 처음 접해 보는 사람도 곧잘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마도구의 한계가 있어 아드넬이 사용하는, 소량 생산에 적합한 마도구뿐이었지만 하루 동안 꼬박 만들면 한 사람당 족히 200여 개는 나왔다.

그렇게 나름 바쁘다면 바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드넬은 초대장을 받게 되었다.

다름 아닌 벨리페가에서 열리는 티 파티 초대장이었다.

‘내가 티 파티 초대장을 받게 되다니.’

그러니까 아드넬은 무투회가 끝나고, 노르디안의 부탁을 받아 그의 아내인 실비아 벨리페를 위해 근육통 연고를 만들어 보낸 전적이 있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일이 많아 깜박 잊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초대장이 온 것이다.

수신인은 실비아 벨리페로, 대충 감사한 마음에 준비했으니 모쪼록 꼭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티 파티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해서인지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기분이 묘했다.

뭔가 하하 호호 웃는 귀족 영애들이 생각나는 자리라 그런지 더욱 그랬다.

‘하지만……. 초대를 받았으니 가야겠지.’

애당초 실비아가 이 티 파티를 준비한 이유가 아드넬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근육통 연고의 효과를 톡톡히 본 모양이라,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어 아드넬은 티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다만 초대를 받아 가는 입장이더라도 자리를 준비한 사람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용도로 약소한 선물이나마 준비해야 했다.

해서 아드넬은 고심 끝에 귀부인들이라면 반색하고 달려들 화장품을 만들기로 했다.

바로 레티놀 아이크림이었다.

‘스포츠 젤은 근육통 연고랑 효과가 비슷해서 크게 필요하진 않을 것 같아.’

스포츠 젤도 마찬가지로 관절염에 좋은 화장품이지만, 크리스털 멘톨이라는 동일한 재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기왕 선물을 준비한다면 아이크림이 나을 것 같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주름이 생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더구나 저는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이니만큼 기왕 선물을 준비한다면 천연 화장품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티 파티가 열리는 당일, 아드넬은 출발 전 아이크림 제작에 돌입했다.

먼저 각기 다른 용기를 준비해 각각 재스민 워터, 그리고 오일류와 유화제를 계량해 넣고 가열한 뒤 적정 온도로 달아올랐을 때 오일류에 가열한 워터류를 부어 주었다.

여기에 스푼으로 골고루 섞어 유화시켜 준 뒤, 자몽씨 추출물을 비롯한 첨가물과 에센셜 오일을 넣어 가볍게 저어 주면 끝이었다.

시간도 십오 분 남짓으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미리 준비한 용기에 담은 뒤 아드넬은 곧장 벨리페가로 출발했다.

실비아는 친절하게도 아드넬에게 무려 마차까지 보내는 성의를 보였는데, 지금까지 그녀가 타 본 마차 중 가장 좋은 것이었다.

새하얀 마차는 크기도 컸지만 어디 하나 얼룩진 곳이 없었고, 화려한 금장 장식이며 실크로 만든 커튼이며 하다못해 손잡이까지 고급스러웠다.

연회 때 줄줄이 들어오던 마차가 딱 이런 모양새였지, 아마.

이 정도 마차는 얼마나 할까 싶어 아드넬이 입을 벌렸다.

“이만 가시죠, 아드넬 님.”

“아, 네. 감사합니다.”

벨리페가에서 온 마부는 정중한 태도로 문까지 열어 주었다.

아드넬은 떨떠름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는데, 그녀가 타자마자 출발했음에도 덜컹거림이 거의 없을 만큼 승차감이 좋았다.

그동안 내가 탄 건 마차가 아니라 수레였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출발한 마차는 곧장 수도의 벨리페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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