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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67)화 (67/141)

67화

그때 바스토르가 사뭇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테시우스가 그를 쳐다보자,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드넬을 조금 멀리했으면 해.”

“뭐?”

뜬금없는 이야기에 테시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아드넬을 멀리하라니?

애당초 그의 존재를 먼저 발견해 알려 준 것도 바스토르였건만, 이제 와 멀리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테시우스가 반박했다.

“지금까지 날 치료해 줬고, 실제로 차도도 보이고 있어. 그런데 갑자기 멀리하라니?”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그동안은 지켜만 봤지만…….”

원래 이렇게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테시우스에게 아렌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만큼, 바스토르는 되도록 그에게 아렌이 아드넬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 황족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중죄를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스토르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은……. 아드넬이, 그 아렌이야.”

“…….”

그런데 엄청난 사실을 알려 준 것 치곤 테시우스의 반응이 영 무미건조했다.

바스토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테시우스가 답했다.

“나도 알아.”

“……어?”

“나도 안다고. 아드넬이 아렌인 거.”

이 눈치 없는 곰탱이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바스토르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테시우스는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말했다.

“실은, 얼마 전에 후원에서……. 흑표범 모습으로 아드넬과 마주쳤어.”

날 보자마자 테오인 걸 알아봤다며, 그가 덧붙였다.

그리 말하는 얼굴엔 미미한 온기가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아까 말하려고 했어. 사실은 내가 테오였다고. 더 이상 아렌에게 날 감추고 싶지 않…….”

“그건 안 돼.”

그때 바스토르가 단칼에 말을 자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또 안 된다는 건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야.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고.”

“그건 형 때문이라고 아드넬이 말했어. 갑자기 잡아가려 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저 아이, 주인이 보낸 레시피대로 화장품을 만든다는 말과 다르게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없어. 따로 키우는 전령조도 물론 없고.”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테시우스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자 바스토르가 냉큼 덧붙였다.

“당장은 네 치료가 급하니 놔뒀지만, 서신을 주고받지도 않는데 무슨 수로 화장품을 만들지? 게다가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상처 연고며 근육통 연고 같은 치료제를 만들고? 심지어 이름조차 비슷해. 아렌은 아드넬이었고, 아드넬이 모시는 주인의 이름은 아실라야. 네가 생각해도 너무 흡사하지 않아?”

“…….”

“……어쩌면, 그 ‘저주’와 관련되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바스토르가 한 가지 단어를 내뱉은 순간, 테시우스가 그것만큼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곧장 반박했다.

“아렌을 만난 건 우연에 불과해. 그것도 내가 찾아간 산에서 마주친 거였고, 이 별궁에 데려온 것도 나였어. 그런데 저주와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자는 거야. 설령 저주와 관련이 없더라도, 아드넬이 만드는 것들은 뭔가 다르잖아. 마치 ‘마녀’가 만드는 것처럼 사람들을 매혹시킨다고.”

“바스토르……!”

“나도 네게 있어 아렌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 너 다음으로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일 거야. 나도 한때 그를 섣불리 체포하려 했던 것에, 그리고 그렇게 떠나게 만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테시우스, 아드넬은 네 가족이 아니야. 나만큼 널 생각하진 못해.”

“…….”

“그를 내치라는 게 아니야. 그저, 아드넬이 아렌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의심을 거두지는 말라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리 말하는 보랏빛 눈동자엔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다.

일순 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바스토르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더구나 그 ‘주인’과 서신을 주고받은 적도 없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심의 싹이 트기엔 충분했다.

결국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는 새에 움켜쥔 주먹을 풀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하지만 이미 가라앉은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으나, 테시우스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보다 용케 탄신연을 체스터 영애에게 맡겼네. 황후 폐하께서 싫어하셨을 텐데.”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 저의를 알아챈 바스토르도 피식 자조하며 수긍했다.

“뭐……. 그렇지.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한때 라이칸 후작이 거세게 반대했던 것 때문에 지금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시는 것뿐이니.”

“신경 안 써. 나는 나대로 살고 있고, 황후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도 하지 않을 거니까.”

후계자 수업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했을 때 누구보다 거세게 반대했던 사람이 라이칸 후작이었다.

하지만 테시우스의 강경한 태도에 끝내 포기했고, 지금은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은 것인지 서신도 잘 보내지 않고 있었다.

테시우스 또한 이제 와 황제 자리를 넘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물론 없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지금의 바스토르를 뛰어넘을 수도 없었다.

그가 현재에 머물러 있을 때 바스토르는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갔으니까.

더 나은 황제가 되기 위해,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즉위하면 그럴듯한 작위나 하나 줘. 언제까지고 별궁에서 지낼 수도 없잖아.”

“당연하지. 영지도 제일 큰 걸로 줄 거야.”

“제일 큰 영지는 북부잖아. 그 추운 데서 살라고?”

“적어도 거기서는 왕 노릇 하며 살 수 있잖아. 왜, 싫어?”

“왕은 무슨, 황제가 버젓이 있는데. 그리고 추운 건 딱 질색이야.”

“한번 고양잇과 동물이 되더니 진짜 동물처럼 체질도 변했나, 예전엔 더운 게 더 싫다더니.”

“……몰라, 아무튼 추운 건 싫어.”

“알았다, 알았어. 비옥한 땅으로 골라서 줄게.”

바스토르는 피식 웃으며 어렸을 때처럼 테시우스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어린아이 대하듯 하지 말라며 손을 뿌리치는 것도 어릴 때와 똑같았다.

물론 바스토르는 그러면서도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로란트 후작에게 조사를 맡겨야겠어.’

그가 알아본 것보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만약 아드넬이 아렌이었다는 사실 외에도 또 다른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라면…….

‘그땐 나도 결정을 내려야겠지.’

테시우스를 위해.

그리고 제국을 위해.

부디 아드넬이 ‘저주’를 비롯한 마녀와는 관련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한편 두 사람이 잠깐 장난을 치는 사이, 주방에 갔던 아드넬도 새 식기를 들고 돌아왔다.

식기만 챙겨오는 것 치곤 꽤 늦게 돌아와 바스토르가 물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아, 원래는 일찍 돌아왔는데……. 두 분께서 긴히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설마 대화 내용을 들은 건 아니겠지?

바스토르가 눈을 살짝 치켜들었으나 그는 곧 납득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다가왔다면 분명 인기척을 느꼈을 테니.

실제로도 아드넬은 저 멀찍이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가볍게 장난을 치기에 다 끝났구나 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아드넬은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아 새 식기를 바스토르 앞에 놓고 그를 위해 다시 한번 설명했다.

“이건 돼지고기의 뱃살 부위로, 취향껏 마음에 드시는 소스에 찍어 드시면 됩니다. 각각 고소하고 짭짤한 기름 소스, 고추로 만든 매운 소스, 냄새는 독특하지만 고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소스입니다.”

“생각보다 퍽 다양하군?”

“일단 드셔보시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리 자신한다면야 어디…….”

확신에 찬 목소리에 바스토르가 포크를 들었다.

어쨌든 얘기는 끝났고 저녁때라 그런지 허기가 졌다.

여기에 노릇하게 익은 고기 냄새가 자꾸만 식욕을 자극해, 바스토르는 주저 없이 삼겹살을 한 점 찍어 세 가지 소스가 담긴 종지 그릇 쪽으로 팔을 옮겼다.

그의 선택은 아드넬이 세 번째로 설명한 쌈장이었다.

냄새는 독특하나 고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소스라니 처음 보는 음식을 도전하기에 제일 적당할 듯싶었다.

그렇게 쌈장을 적당량 묻혀 곧장 입으로 가져간 바스토르는 잠시 후, 무척이나 놀란 듯 두 눈을 끔벅거리며 입을 벌렸다.

“아니……. 이게 무슨…….”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다소 바보 같은, 허 하고 입을 벌린 채 눈만 끔벅이는 모습에 아드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바스토르는 그런 아드넬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아, 아니. 너무 놀란 나머지.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인데도 무척……. 맛있어서.”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고기는 적당히 부드럽고 쫄깃하면서, 기름진 비계 부위의 느끼함은 살짝 매콤하나 은근히 쌉쌀한 소스가 확 잡아 주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온갖 진귀한 음식들은 다 먹어 보았지만 이런 맛은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테시우스는 그런 바스토르의 모습에 피식 가볍게 웃었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이게 대체 뭐냐고, 텃밭에서 퍼 온 진흙 아니었냐며,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왕왕대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만큼 맛있고, 누구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소스였다.

한편 아드넬은 맛있다는 대답에 그제야 마음을 놓고 싱긋 웃어 보였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번엔 다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다른 방법이라니?”

“삼겹살을 더 맛있게 먹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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