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한창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도 아름다웠고, 흔들리는 나뭇잎의 노래조차 감미로웠다.
설렘이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아드넬이 아렌이었다니.
8년 전 그를 처음 만나고 함께한 시간은 고작 일주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테시우스에게 있어 아렌은 함께한 시간 그 이상으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짐승의 모습이었던 제게 먼저 손을 내밀고, 보기 흉한 상처에도 거리낌 없이 약을 발라 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테시우스에게 친구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어머니만큼이나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차가운 황후의 견제와 시선 아래, 그 흔한 놀이 친구조차 갖지 못했으며 다른 귀족가 자제들과의 왕래도 철저히 제한되었다.
누구도 그를 ‘테시우스’가 아닌 ‘2황자’로만 보았으며, 정통한 핏줄인 바스토르와의 비교는 어딜 가든 따라붙는 꼬리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준 건 오직 바스토르뿐이었다.
오직 그만이 한 가족으로서 테시우스를 봐 주었다.
제게 주어진 기회를 기꺼이 포기한 건 그 때문이었다.
바스토르는 언제나 더 나은 나라를 꿈꾸었고, 그런 제 형이라면 훗날 제국의 황제로서 훌륭히 이끌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저 지금껏 그래 왔듯, 바스토르의 뒤에 선 채 묵묵히 지지해 주면 된다고.
그리 생각했기에 황좌에 오를 마땅한 기회를 포기했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언제나 가슴 한쪽이 외로웠다.
바스토르는 후계자 수업으로 바빴고, 거짓말을 하고 몰래 오지 않는 이상 얼굴 한 번 보는 것조차 어려웠으니까.
친구도, 가족도, 무엇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검을 휘두르며 훈련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창 몸을 단련하고 고요한 침실에 돌아오면 사무치도록 조용한 적막이 외로움과 함께 찾아왔다.
내게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웃고 떠들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나날도 분명 있었다.
그랬던 테시우스가 처음으로 가진 친구가 바로, 아렌이었다.
비록 정체를 드러내진 못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렌은 굳게 닫혀 있던, 그러나 누군가의 온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그의 마음속에 성큼 들어온 유일한 존재였다.
그랬던 만큼 아렌을 내가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은 지독하리만큼 그의 목을 죄어 왔다.
지난 8년 동안은 그저 그리워했을 뿐이었지만 아드넬에 대해 알아보고 별궁에 데려온 순간, 짐작은 확신이 되고 자책감은 물밀듯이 몰려왔다.
매 순간이 고통이었고 그래서 아렌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드넬을 이유 없이 미워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아드넬은 예전에도 그랬듯, 그가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스며들었다.
아렌이 아무렇지 않게 연고를 발라 주었듯 그 또한 그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아렌과 닮았다고만 생각했지만, 아드넬은 아렌이었고 저와 마찬가지로 8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아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는 구름 위를 걷듯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아드넬을 보며 느낀 혼란스러움과 알 수 없는 소유욕은 더 이상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런 감정을 생각하기엔 당장의 간질거리는 설렘이 훨씬 강했다.
이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테시우스는 이 낯설면서도 간지러운 감정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찾아갔고, 요리를 해 달라 청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저 멀리, 트레이를 끌고 나타난 아드넬을 본 순간.
‘……해는 저물어 가는데 너는 언제나 태양처럼 빛나는구나.’
8년 전의 아렌을 보며 생각했듯, 그는 늘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별것 아닌 평범한 차림에 목에 닿을까 말까 한 짧은 머리, 화장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말간 얼굴이 왜 이토록 예쁘게만 보이는지.
아름다운 영애들을 숱하게 봐 왔음에도 눈에 든 적이 없건만, 아드넬은 존재 자체로 빛이 나, 늘 그의 눈에 들어왔다.
테시우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의 박동을 느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별로……. 오래는 아니다.”
“다행입니다.”
너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림을 끔찍이 싫어하는 나지만, 네가 오길 기다리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오래 걸리는 거면 나도 같이…….”
“아, 아닙니다! 정말 금방이면 됩니다.”
예전에는 짐승의 모습이어서 도와줄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데.
고생을 자처하고 일을 도맡아 하는 건 여전했다.
그러던 그때, 익숙한 음식이 테시우스의 눈에 띄었다.
“이건…….”
“아, 전하께선 처음 보는 음식이시지요? 이건 삼겹살이라는 것인데, 돼지의 뱃살 부분으로 지방층이 두꺼워 느끼할 것 같지만 전혀 느끼하지 않고 맛있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아…….”
8년 전 그때도 아렌은 똑같이 말했었다.
‘이건 삼겹살이라는 거야. 돼지의 뱃살 부분인데 지방층이 두꺼워서 엄청 느끼할 것 같지? 근데 진짜 하나도 안 느끼해. 내가 보여 줄게.’
목소리만 좀 달라졌다 뿐이지, 말하는 것도 여전하니.
따듯한 추억으로 남은 기억을 지금의 현실에서 또 한 번 느끼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후로도 아드넬은 옛날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입을 꾹 다문 채 진중한 얼굴로 고기를 노려보는 것도, 이따금 “크으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도.
모두 과거와 다를 바가 없어 테시우스는 피식 웃으며 손을 입가로 올렸다.
자꾸만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짓누르며 애써 감춰 보는 미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대놓고 드러낼 것만 같았다.
“일단 소스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이건 소금과 후추를 기름에 섞어 만든 것인데, 다소…….”
“설명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예……?”
“굳이 듣지 않아도 맛있을 것 같군.”
일찍이 먹어 본 소스였다.
기름에 담갔다 뺀 것인데도 전혀 느끼하지 않던, 짭짤하고 고소하면서 쫄깃하고 부드럽던 식감과 독특한 풍미.
내가 이 요리를 다시 한번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너는 알까.
“……맛있군.”
“입에…… 맞으십니까?”
“맞지 않을 리가.”
이따금 생각나며 그리웠던 음식이었으나, 그보다 그리웠던 건 8년 전의 너였다.
아렌.
끔찍한 기억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르는 나의 어린 날을 오색찬란한 추억으로 아름답게 물들여 준 너를.
나는 정말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나는…….
“테오에게 들으신 거군요!”
“테오를……. 알고 있나?”
“……아……. 어, 그게…….”
더는 감추고 싶지 않아.
네게 나라는 사람을 솔직하고, 거짓 없이 보여 주고 싶어.
“……네게 고백할 것이 있다.”
* * *
“고백……할 것이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드넬은 놀란 나머지 테시우스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깐, 퍽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과 조금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 때문인지 가슴이 쿵쾅거려 자칫 숨이라도 가쁘게 쉴까 편히 내뱉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물린 입술이 벌어졌다.
“사실……. 얼마 전에 네가 만난…….”
“여어, 테시우스!”
바로 그 순간, 등 뒤로 꽤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드넬은 갑작스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휙 돌렸다.
테시우스도 마찬가지로 놀라 얼굴을 들었다.
“……바스토르?”
“리들리에게 물어보니 여기 있다기에.”
참으로 눈치 없는 등장이었다.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팍 구겼으나 불청객은 해맑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올 건 또 뭐람!’
얼마 전에 내가 만난, 뭐?
그다음이 궁금해 죽겠는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화도 못 내겠고, 아드넬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바스토르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그간 잘 지냈나.”
“2황자 전하께서 많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다만…….”
바스토르의 서늘한 눈빛이 아드넬을 살폈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보지 못했으나, 테시우스는 바뀐 낯빛을 발견하고 한 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스토르는 예의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감쪽같이 표정을 바꾸었다.
“이것들은 다 뭐지?”
사실 바스토르는 오랜만에 테시우스와 이야기나 나눌 겸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짬을 내서 찾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식당에 있을 줄 알았던 동생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음에도 후원 정자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인데, 막상 와보니 독특한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일단 노릇하게 익은 고기 냄새가 첫 번째로 식욕을 돋웠고, 돗자리 옆엔 이동식 화구와 팬이 있었다.
여기서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빨갛게 절인 채소며 다양한 색의 소스들까지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아……. 제가 종종 해 먹던 음식인데 2황자 전하께도 맛보여드릴까 하여 소소하게나마 식사 자리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흠……. 그래?”
바스토르는 잠시간 생각하는 듯하더니 씨익 웃으며 냉큼 테시우스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식사를 거르고 온 참이라, 나도 퍽 허기가 져서 말이야.”
“아…….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준비해서 돌아오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지금 있는 식기류는 2개씩밖에 없었다.
저가 쓰던 접시나 포크를 황태자에게 쓰라 줄 순 없어, 아드넬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다소 허망한 얼굴로 아드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시우스가 찌릿 옆에 앉은 바스토르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뭐야?”
“응? 뭐가?”
“아니, 온다는 말도 없이 이렇게 대뜸…….”
“우리가 언제는 약속하고 날 잡아 만났나?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기껏 큰맘 먹고 말하려 했더니만, 그렇다고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찾아왔을 바스토르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앞부분은 꺼냈으니까……. 곧 기회가 오겠지.’
말이 끊겨 궁금한 건 아드넬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냥 조금만 더 뒤로 미뤄지는 거야, 머지않아 적당한 때가 또 찾아올 거라고 테시우스는 애써 자위했다.
“……그보다 할 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