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음, 역시 이만한 게 없지.’
아드넬은 뿌듯한 얼굴로 시장에서 사 온 것들을 즐비하게 조리대 위에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2황자를 위한 요리로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생각하던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음식은 딱 한 가지였다.
‘당연히 삼겹살이지!’
양념한 고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고, 팬에 굽기만 해도 충분하다 했다.
여기에 테오는 삼겹살도 좋아했어서 후원에서 먹는다면 딱 삼겹살이 적당할 듯싶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음식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2황자에게 저녁에 보자는 약속을 잡은 뒤, 아드넬은 곧장 시장으로 달려가 고기를 싸 먹을 오크 리프와 삼겹살을 사 왔다.
델리움의 정육점에서처럼 주인에게 왜 비계 달린 고기를 사가냐는 질문을 듣긴 했지만.
아무튼 아드넬은 서둘러 오크 리프부터 씻기 시작했다.
“아드넬 님의 요리라니……. 저도 꼭 한번 맛보고 싶은데…….”
물론 등 뒤의 푸념은 감수해야 했다.
아드넬은 씻다 말고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리들리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리들리 님. 다음에 꼭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꼭, 꼭 입니다.”
“약속드릴게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어, 음……. 그러면 여기 이 마늘을 좀 씻어 주시겠습니까?”
“예!”
아드넬이 2황자의 식사 준비를 대신한 탓에 할 일이 사라진 리들리가 곧 팔을 걷어붙이고 다가왔다.
그리곤 옆에서 같이 오크 리프와 마늘을 깨끗한 물에 씻고, 아드넬이 말한 대로 얇게 썰어 작은 종지 그릇에 담았다.
그사이 아드넬은 씻은 오크 리프의 물기를 탈탈 털어 채반에 담고 삼겹살은 넓은 접시에 예쁘게 올려 트레이에 올렸다.
‘삼겹살은 자고로 장맛이지!’
삼겹살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쌈장과 김치!
아드넬은 빈 그릇을 들고 지하 숙성실에 내려갔다.
생고기를 보관하는 숙성실 한쪽에 놓인 장독대가 퍽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김치는 이 정도……. 쌈장은 한 끼 먹을 만큼만, 고추장도 좀 챙기자.’
빈 그릇에 적당량을 덜어 담은 뒤엔 주방으로 올라와 곧장 쌈장부터 만들었다.
다만 삼겹살은 고추장과 곁들여도 맛있어서, 소금과 후추가 들어간 기름장과 고추장, 쌈장이 담긴 종지도 트레이에 차곡차곡 올라갔다.
2단으로 된 트레이 하단부엔 이동식 화구와 팬, 고기 기름을 받을 그릇과 돗자리를 넣었다.
마지막으로 김치와 새하얀 쌀밥만 챙기면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러 마침내 냄비 밥까지 완성되자 아드넬은 적당량을 그릇에 덜어 담은 뒤 트레이에 올리고 커다란 반구형 뚜껑으로 음식 위를 덮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봤자 요 앞 후원일 뿐이지만.
아드넬은 리들리의 배웅을 받으며 묵직한 트레이를 달달 끌고 복도를 지났다.
그런데 어쩐지 후원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좋아……하겠지?’
솔직히 삼겹살은 치트키나 마찬가지잖아.
전생에서도 삼겹살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어.
정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 간장 계란밥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해서 주면…….
“아…….”
그때 후원에 도착한 아드넬의 눈에 선명한 인영이 들어왔다.
저 멀리, 테시우스가 서 있었다.
그의 짙은 흑발은 어느새 길게 자라 눈썹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옷은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일렁이는 금안도, 뚜렷한 이목구비도, 움푹 팬 볼과 툭 튀어나온 목울대도, 그는 어떤 모습이든 간에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드넬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한 테시우스가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아드넬.”
낮고 묵직한 음성.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친근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으나 아드넬은 테시우스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별로 오래는 아니다.”
“다행입니다.”
다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드넬은 서둘러 트레이 하단부에 넣어 둔 돗자리부터 꺼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오래 걸리는 거면 나도 같이…….”
“아, 아닙니다! 정말 금방이면 됩니다.”
별것도 아닌데 뭘 도와주기까지, 어째 라그랑에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다정해진 것 같았다.
심장이 벌렁거려 손까지 떨릴까 걱정이었다.
아드넬은 황급히 정자 중앙에 돗자리를 깔고 그 옆에 이동식 화구를 놓았다.
화구 위에 팬을 올린 뒤엔 돗자리 위에 가져온 음식 접시들을 보기 좋게 배열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담은 접시까지 가져오자 이를 발견한 테시우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건…….”
“아, 전하께선 처음 보는 음식이시지요? 이건 삼겹살이라는 것인데, 돼지의 뱃살 부분으로 지방층이 두꺼워 느끼할 것 같지만 전혀 느끼하지 않고 맛있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아…….”
언뜻 탄식 같기도, 탄성 같기도 한 음성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게 흘러나왔다.
이내 테시우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듯 감상에 젖은 눈동자였다.
다만 한창 준비를 하느라 이를 미처 보지 못한 아드넬은 본격적인 삼겹살 굽기에 나섰다.
화구를 작동시키고 불판이 어느 정도 뜨겁게 달아오르자 집게로 기다란 삼겹살을 촤악 올렸다.
금세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앉으십시오, 조리는 금방 끝납니다.”
“그래.”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반면 아드넬은 입을 꾹 다문 채 거의 노려보듯 삼겹살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기는 타이밍!’
덜 익히는 건 절대 안 되고, 너무 익히면 딱딱하고 질겨진다.
기껏 준비한 특별한 식사 자리에서 제대로 익지도 않은 음식을 내놓을 순 없었다.
아드넬은 삼겹살을 노려보며 적절한 때를 노리다가 차츰 하얗게 익어가며 기름이 흘러내리는 순간 집게로 휙 뒤집었다.
또 한 번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으로 구워진 단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으으……! 앗,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저도 모르게 반주하는 아저씨들이나 낼 법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2황자는 되레 피식 웃으며 눈을 낮게 깔며, 손을 입가로 올렸다.
‘그때처럼 또…….’
아드넬은 문득 그의 입꼬리에 닿은 엄지손가락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2황자는 공녀들을 위한 화장품을 만들어도 되냐는 허락을 받았을 때도 그랬었다.
‘일종의 버릇인 걸까.’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아니라면 웃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드넬이 냉큼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런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거야.’
오늘따라 유독 그런 느낌이었다.
아까 본 모습이 너무 예뻐서인가, 어쩐지 볼이 조금 뜨거운 것도 같고.
‘정신 차려! 이러다 고기라도 태워 먹으면 어쩌려고!’
아드넬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이내 삼겹살이 완전히 익자 빈 접시와 함께 챙겨 온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기름을 살짝 털어내고 담았다.
“일단 소스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이건 소금과 후추를 기름에 섞어 만든 것인데, 다소…….”
“설명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예……?”
“굳이 듣지 않아도 맛있을 것 같군.”
그리 말하며 테시우스는 먼저 포크를 들었다.
그리곤 삼겹살을 한 점, 기름장에 푹 담갔다가 곧장 입에 넣었다.
아드넬이 벙한 얼굴로 쳐다보던 그때, 테시우스가 말했다.
“……맛있군.”
“입에…… 맞으십니까?”
“맞지 않을 리가.”
응?
‘그게 무슨 말이지?’
꼭, 언젠가 한 번 먹어 본 것처럼 말하는 투에 아드넬이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떴다.
2황자가 삼겹살을 먹어 볼 일이 있던가?
‘삼겹살은 필립이랑 제이든, 그리고 테오말곤 먹어 본 사람이 없는데…….’
그때 곰곰이 생각하던 아드넬이 “아!” 하며 손뼉을 쳤다.
“테오에게 들으신 거군요!”
맨 처음 후원에서 테오를 만났을 때, 그는 오웬 백작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며 그 오웬 백작가가 2황자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대충 해석하자면 오웬 백작가는 2황자의 소유이고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소리였다.
말하지 못하는 테오와 자신이 의사소통했듯 어쩌면 2황자도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수도 있었다.
그게 삼겹살 얘기일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게 아니라면 2황자가 삼겹살을 알 리가 없으니까.
아드넬은 자신의 추리력에 감탄하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얼마나 맛있었다던가요, 하고 물어보려던 그때 테시우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테오를……. 알고 있나?”
“……아……. 어, 그게…….”
미처 생각지 못한 질문에 아드넬이 잠시간 굳었다.
테오를 안다는 건 8년 전 묻어 둔, ‘아렌’이라는 과거를 꺼내야 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수했다.’
테오에겐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황후는 아렌이라는 이름을 버린 이후 생긴 몇 년의 공백기 동안 분노했고, 클리프는 아렌이 죽었다고 알고 있으며, 필립과 제이든은 아렌으로 살았던 과거를 전혀 모른다.
더구나 아드넬은 이미 8년 전, 이름도 모를 누군가에게 잡혀갈 뻔한 전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더 철저하게 감췄어야 했는데, 순간 들뜬 나머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드넬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안쪽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마냥 이렇게 침묵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데…….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바로 그때, 테시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게 고백할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