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느지막한 오후, 별관 기사단장 집무실.
호르세는 응접용 소파에 앉아 긴 한숨 내쉬었다.
‘대체 왜 행적을 종잡을 수가 없는 거지.’
아드넬과의 독대 이후 따로 알아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조사를 시작하고서도 의문점은 사라지질 않았다.
어느 순간 불현듯 나타나 카리아 상회와 거래를 시작한 아드넬, 그러나 그의 과거는 통 나오질 않았다.
호르세가 알아낸 것이라곤 그가 ‘아실라’라는 사람의 대리인이라는 것과 화장품 거래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전에 ‘아렌’이라는 또 다른 대리인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해.’
아렌, 아드넬, 아실라.
이 세 개의 이름은 다른 듯 하나 무척 비슷했다.
우연이라 해도 그렇게 겹칠 수는 없을 텐데, 물론 ‘아실라’는 여자라고 하니 그렇다 쳐도 왠지 모를 꺼림칙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캐 보아도 과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그러했다.
카리아 상회와 거래를 시작하던 당시 아드넬은 카르카스에 정착했는데 그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지내는 두 조수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 싶었지만 몰래 뒤를 캐는 마당에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실마리에 닿을 듯한데, 진실이 눈앞에 있는데 보이지 않는 막에 가려진 듯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호르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너무 엇나간 생각을 하는 건가?’
의심의 시작은 켈리언의 말부터였다.
어딘가 엘튼을 닮은 듯하다는, 그래서인지 아드넬을 독대했을 때 저와도 좀 닮은 듯했다.
보기 드문 바닷빛 눈동자도 그러하니 더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아드리아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청년이라면?
그거야말로 헛된 일에 시간 낭비가 아닌가?
‘찾아서 뭘 어쩌려고.’
처음엔 아드리아나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아드넬이 정말 제 핏줄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반역자의 딸이 낳은 황실 기사단장의 사생아, 그것만큼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이슈가 있을까.
게다가 그 ‘반역자의 딸’이라 함은….
‘물론 나는 누명이라는 걸 믿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야.’
프리테 가문.
한때 아드리아나의 이름 뒤에 따라붙던 성이자, 이제는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지워진 이름.
리아누 황비를 독살한 범인이 바로 아드리아나의 아버지였다.
‘호르세, 믿어줘요……! 우리 아버지는 이번 일과 전혀 관계가 없어요!’
아직도 생생한 그녀의 간절한 외침.
하지만 모든 정황이 그녀의 가문을 가리켰다.
실제로 그 아비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끝내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이 리아누 황비를 독살한 범인이라 자백했다.
그런 마당에 황실 기사단장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드리아나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지만 죄를 시인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녀는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는 허무하게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아드리아나가 도망치고, 누명을 쓴 거라는 그녀의 말을 믿었기에, 호르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누명을 썼다는 증거를 찾으려 애썼지만 나오지 않았다.
도망친 아드리아나를 제외한 프리테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결국 처형당했으며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 또한 사라졌다.
‘가슴이 답답해.’
수면 위로 드러나긴커녕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토록 무능력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언젠가 진실을 밝힐 수는 있을까.’
호르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나의 당신도 저 햇살처럼 찬란하게 빛났는데.
어쩌면 나는, 닿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을 바라며 찾는 건 아닐까.
그 끝이 있기는 할는지.
호르세는 복잡한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 * *
한편 그 시각, 별궁.
아드넬은 작업실에서 한창 황후에게 보낼 화장품을 만드는 중이었다.
뇌물도 겸하는 화장품이니만큼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했다.
‘먼저 미네랄 파우더.’
천연 미용 흙으로 만들어 미네랄이 풍부한 미네랄 파우더는 시중에 나온 분가루와는 달리 모공을 막지 않으면서도 유분기를 잡아 주어 여름철에 꼭 필요한 화장품이었다.
피부의 번들거림과 피지로 화장이 들뜨는 걸 막아 주기도 하지만, 피부톤 또한 부드럽게 잡아 주어 화장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효과 또한 있었다.
‘진짜 황후 정도 되는 사람 아니면 못 쓰겠어.’
아드넬은 깨끗하게 소독한 유리 볼에 옥수수 전분인 콘스타치와 일전에 금홍석에서 추출한 첨가물, 그리고 진주 가루 등을 계량해 잘 섞었다.
제국에서도 진주는 귀한 보석인데 이걸 가루로 만들어 쓴다니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선 못 쓸 정도로 귀한 것이라 아드넬은 가루를 계량하면서도 손을 떨어야 했다.
여기에 민감한 편인 황후의 피부를 생각해 라그랑에서 보내 준 미용 흙인 그린 클레이를 넣고, 라벤더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떨어트린 뒤 다시 잘 섞었다.
마지막으론 고운 체에 꼼꼼히 밭쳐 여러 번 걸러냈다.
파우더는 이대로 통에 담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다음은……. 데오드란트였지?’
제아무리 고귀한 핏줄이라 한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땀이 나면 냄새도 으레 나기 마련이다.
아드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적당한 용기에 보드카를 계량해 부었다.
원래는 무수에탄올을 사용해야 하지만 아직 없어 보드카로 대체한 것이다.
여기에 레몬과 사이프러스 등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넣고 섞은 뒤, 정제수를 넣어 다시 섞었다.
이렇게 데오드란트도 끝났다.
‘계랑만 제대로 하면 터무니없이 쉬운 난이도지만 일단 한 번 써 보면 절대 포기 못 할 화장품이야.’
미네랄 파우더는 이미 공녀들에게 말을 해 두어 어쩔 수 없다지만, 데오드란트는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해도 시원한 느낌과 함께 상큼한 향이 나며 악취를 잡아 주는 데오드란트는 지금 같은 여름철에 필수라고도 할 수 있는 화장품이었다.
게다가 고귀하신 황후에게서 악취가 나기라도 하면 그만한 망신이 어디 있을까.
해서, 아드넬은 우선 시제품이라며 아주 조금만 보낸 뒤.
데오드란트를 사용해 본 황후가 어서 더 만들어 보내라 독촉하면 재료도 그렇고 만드는 방법도 무척이나 까다로워 어렵다는 식으로 둘러대며 한참 시간을 끌다가, 나중에라도 혹시나 황후가 대량 생산 사업에 제재를 걸려는 순간 데오드란트를 뇌물로 바쳐 확실한 허락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
‘음, 그야말로 완벽해!’
심지어 데오드란트는 냉장 보관도 필요하지 않고 사용 기간도 2달이나 되어 평소에 가지고 다니기에도 무척 좋았다.
안 좋아하고는 못 배길걸?
아드넬은 뿌듯한 얼굴로 완성된 데오드란트를 작업실 구석진 곳에 꼭꼭 숨겨 두었다.
그러던 그때, 대뜸 닫힌 문 너머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시제품이라며 줄 생각으로 작은 용기에 담은 탓에 바로 숨길 수 있었다.
금세 데오드란트를 숨긴 아드넬은 냉큼 일어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문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2황자 전하?”
그런데 열린 문 앞엔 예상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테시우스로, 입은 옷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머리는 쓸어 올리고 손가락엔 반지까지 낀 것이 어딘가 좀 신경을 쓴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혹 병증이 갑자기 도지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테시우스는 열린 문을 탁 하고 닫으며 성큼 들어오더니 멋쩍은 얼굴로 볼을 살짝 긁어 보였다.
“……급한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해 놓고 자리를 비웠다 보니……. 할 말이 없더군.”
맞다, 그러고 보니 라그랑에서 돌아왔을 때 없다고 서운해했지.
자리를 비울 수도 있는 건데, 그게 뭐 그리 섭섭하다고 투덜댔는지 과거의 자신이 창피해 아드넬의 귓등이 살짝 달아올랐다.
“괘, 괜찮습니다. 전하께선 바쁘신 분이니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지요.”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
와씨, 그걸 꼭 저렇게 말해야 하나. 사람 설레게.
그냥 약속했다고 말하면 되지, 문장에 힘을 주어 말하니 무슨 의미라도 내포된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귓등만 살짝 붉어졌을 뿐이었는데 결국 아드넬의 두 뺨도 발갛게 익고 말았다.
“저, 그, 아무튼 라그랑에도 잘 다녀왔고. 네,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께서도 괜찮으시죠?”
당황해서인지 저가 말하고도 뭐라는지 모르겠는 횡설수설한 말이 튀어나왔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곧 피식, 하고 낮게 웃었다.
그러나 얼굴에선 비웃는 기색도, 조롱하는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귀여운 무언가를 보듯, 따듯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부탁하긴 미안하지만. 예전에 네 고민을 들어줬으니, 내 작은 부탁도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부탁…… 말이십니까?”
“응, 다름이 아니라…….”
테시우스는 아드넬이 별궁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장 리들리와 함께 테라스에 모여 음식을 먹던 걸 보았노라 설명했다.
그리곤 그때 만든 음식을 주방에서 보았다고 했다.
“그 음식이 퍽……. 궁금하더군.”
“아…….”
“다만 나는 양념 된 고기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터라, 그냥 팬에 굽는 정도로도 충분해. 그러니……. 네가 만든 음식을 내게도 맛보여 줄 수 있겠나?”
예상치 못한 부탁에 아드넬은 끔벅끔벅,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어딘가 진지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였다.
‘제육볶음이 그렇게 궁금했나?’
물론 냄새가 매우니 그럴 수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할 건 아닌 듯해 어쩐지 속으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뭐……. 아예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니까.’
며칠 전 테오를 만났을 때 아드넬은 2황자와 조금 더 친해지면 우리가 예전에 먹었던 요리를 해 드릴까 한다며 얘기한 전적이 있었다.
다만 테오는 그새 또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몇 번을 후원에 나가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말이라도 하고 가지, 갑자기 생각하니 서운했다.
‘혹시 냄새를 맡으면 오려나……?’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아드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럼 오늘 저녁. 후원 정자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