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흑표범의 모습으로는 별궁 안에서 지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시우스는 매년 이맘때쯤, 강제로 변할 때면 후원 구석에 만들어 놓은 비밀 거처에서 지내곤 했다.
별궁 사용인들이 정자 뒤편에 식사를 놓고 가면 인기척이 사라지고서야 몰래 가서 먹고, 배를 채우면 다시 돌아가 계속 잠만 자다가 밤이 되면 뜬눈으로 지새우곤 했다.
지나치게 조용한 수풀 속 어둠은 언제나 그를 상념에 빠지게 했다.
오래 묵은 기억들은 고요함 속에서 튀어나와 마음을 괴롭혔고,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후회와 죄책감으로부턴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저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고.
오롯이 그 혼자 견뎌야만 하는 고독은 저주, 그 자체였다.
분명 그럴 터인데…….
“……테오?”
이젠 너무나 익숙해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드넬의 놀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라기로는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아드넬이 ‘테오’를 아는 거지?
그러나 생각은 짧았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테오, 너 맞지?”
아드넬은 놀라 입을 가리면서도 확신을 갖고 물었다.
흑표범인 그를 무려 8년 만에 보았지만 아드넬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체구는 예전에 비하면 곱절로 커졌지만 윤기 어린 새카만 털과 황금처럼 빛나는 금안은 여전했다.
그리고 저를 보고도 달려들지 않는 것도, 8년 전 처음 만난 그때와 똑같았다.
테시우스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크게 벌어진 눈을 하고서 굳어 있다가 우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드넬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물들듯 퍼져 나갔다.
“나 아렌이야! 기억나? 델리움에 있는 동굴, 거기서 만난 아렌!”
순간 테시우스는 흠칫하고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아드넬이, 아렌이었다고……?’
카리아 상회의 주인은 아렌이 죽었다고 말했다.
델리움 산에 불이 난 해, 여름이 다가오던 시기에.
그 불은 다름 아닌 테시우스 본인이 지른 불이었고, 내가 아렌을 죽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순간이동 마도구를 사용한 아렌이 그 산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필요한 걸 챙기러 돌아왔을 수도 있고, 애초에 목적지를 어디로 설정했는지도 모르는데 아렌이 있는지 확인조차 안 하고 불부터 질렀으니까.
부디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아렌의 얼굴은 기억에서 많이 흐려졌다. 처음 아드넬의 바닷빛 눈동자를 보았을 땐 퍽 닮았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아렌과 머리 색도 목소리도 달랐다.
그러니까 아드넬은 아렌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자연히 내가 아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확신이 되어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드넬은 아렌이 맞았다.
가슴을 저리다 못해 산산이 조각내던 죄책감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이 크게 차올랐다.
한편 아드넬은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 테시우스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맞추고 앉았다.
“물론 그때랑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머리는 일부러 물들인 거고 이름은 바꾼 거야! 혹시나 그때 날 잡으라고 했던 남자애한테 쫓길까 봐 어쩔 수 없었어. 넌 어떻게 지낸 거야? 설마 그때 이후로 몸이 바뀌질 않은 거야?”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고 나니 반가움을 뛰어넘어 기분까지 무척 들떴다.
아드넬은 궁금한 것들을 조잘조잘 떠들며 그의 안부를 캐물었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그런 그녀에게 대답하는 대신 커다란 앞발로 오른쪽 어깨를 꾹 밀었다.
“테오……? 으, 으앗!”
“푸르릉…….”
힘없이 풀썩하고 뒤로 넘어간 아드넬의 양어깨 옆으로 앞발이 지탱하고 섰다.
그리고 곧, 크고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으며 보드라운 털이 뺨에 닿았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안듯 위로 올라가 뺨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고마워.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네게 너무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무사해 줘서 고마워.
날 치료해 줘서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너는 알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느냐 묻는다면 자신 있게 손을 들 수 있을 만큼.
그저 모든 것이 행복하고 감사했다.
‘다시는 널 놓치지 않을 거야, 아렌.’
네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한없이 막막하던 순간 선뜻 손을 내밀어 준 소중한 너를,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거라고.
“왜, 왜 그래? 너무 반가워서 그래?”
전보다 두 배로 커진 몸은 아드넬을 짓누르지 않고 마치 감싸듯 덮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그르렁거리는 낮은 목 울림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서가 아닌 흐느낌 같이 들려와서, 아드넬도 그런 테오의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곤 작게 토닥이며 속삭였다.
“나도 정말 반가워, 테오. 오랫동안 보고 싶었어.”
* * *
“그러니까……. 바뀌는 이유는 모른다, 이거지?”
끄덕끄덕.
극적인 상봉 끝에 테시우스는 제 상황을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렌이니까.
하지만 듣고도 이해되지 않는 건 저와 마찬가지인 듯 아드넬은 “흐음.”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이유가 뭘까? 해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이상한 술수를 부렸으면서 정작 손을 대진 않고. 짐승으로 바꾼들 딱히 득 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저주’라는 단어에 ‘마녀의 능력’과 관련된 걸까 싶었지만 그와 관련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능력을 개방한 뒤로 새로운 지식들이 흘러들어오긴 했지만 그간 축적된 마녀의 치료술에 관한 것뿐이었고 짐승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해 봐도 마땅한 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짐승으로 바꿔 얻는 이득이 무엇일지 짐작도 안 되고.
결국 아드넬은 추리하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다른 걸 물어보았다.
“그런데 테오는 어쩌다 여기 별궁 후원에 있던 거야? 2황자가 출입을 엄중히 막았다던데.”
“…….”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테시우스의 몸이 움찔하고 작게 흔들렸다.
매년 이맘때쯤 짐승으로 바뀐다는 건 솔직하게 말했지만 진짜 정체를 밝히는 건 아무래도 꺼려졌다.
아드넬은 흑표범 테오에겐 무척 친근하나 2황자 테시우스에겐 늘 거리를 두니까.
정체를 밝히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저를 ‘테오’로 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테시우스는 그렇게 극명하게 갈릴 태도의 온도 차이가 조금, 두려웠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냥 잠깐, 잠깐 동안만 숨기는 것뿐이야.’
테시우스는 애써 제 생각을 합리화하며 땅바닥에 단어 몇 가지를 적었다.
각각 ‘오웬 백작가’, ‘편지’, ‘도움’이었다.
이를 본 아드넬이 다시금 추측에 나섰다.
“오웬 백작가라면 내가 편지를 써서 보낸 곳이고, 도움은……. 그곳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니면 그쪽에서 도움을 줬다는 얘기야?”
팡팡.
테시우스가 8년 전처럼 꼬리를 두 번 내려치자 이를 본 아드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쪽에서 도움을 줬다는 소리지?”
“컹!”
“그런데 백작가에 그만한 힘이 있어? 아무리 그래도 여긴 황궁인데…….”
움찔.
생각해 보니 후원의 출입을 엄중히 막은 건 테시우스 본인이었다.
그런 후원에서 나타났으니 아드넬이 물어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8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매번 정곡을 찌르네.’
물론 그것도 귀엽긴 하지만.
어쨌든 정체를 숨기려면 어쩔 수 없었다.
테시우스는 다시금 앞발을 들어 발톱을 꺼낸 뒤 오웬 백작가라는 단어 밑에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를 그리고, 그 밑에 ‘2황자’라는 단어를 적었다.
이를 본 아드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2황자……? 이 오웬 백작가가, 2황자라고?”
끄덕끄덕.
사실은 제가 아닌 바스토르의 위장 신분이지만, 발설해선 안 되는 비밀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굳게 믿었다.
그가 ‘아렌’이라는 것만으로도 확신 어린 믿음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오웬 백작가가 2황자라고…….”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드넬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한 얼굴에 덩달아 테시우스의 찌푸려진 콧등도 실룩였다.
“크릉……!”
“……어? 아,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컹?”
그러니까 그 생각이 뭐길래.
테시우스는 저가 얼마나 궁금한지 보여 주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 저의를 찰떡같이 알아챈 아드넬은 잠시 머뭇거리며 볼을 살짝 긁었다.
“아까 말했잖아, 2황자 전하의 명으로 여기 오게 되었다고. 그때 나는 2황자 전하가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
그건, 당사자가 생각하기에도 할 말이 없었다.
다짜고짜 잘 살던 사람을 붙잡아와 치료하라 명하고, 차도를 보이지 않으면 사지를 찢겠다는 둥 살벌한 협박부터 했으니까.
얼굴을 볼 낯이 없어 테시우스가 고개를 살짝 수그린 그때, 아드넬이 덧붙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 보이시더라고. 차도가 보여서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 해 주신 사과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어. 이후에 태도도 많이……. 변하셨고.”
“크릉…….”
아드넬은 테시우스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피식하고 작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괜스레 신경이 쓰이더라. 지금은 잠깐 자리를 비우셨는데, 돌아오시면 라그랑에 다녀온 얘기도 해 드리려고. 조금 더 친해지면 우리가 예전에 먹었던 요리도 해 드리고 말이야.”
아드넬의 말에 테시우스는 그가 처음 별궁에 온 날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널 다시 만나면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았다고.
사실 나는 제국의 2황자였고.
네가 연고를 발라 줬던 곳들의 흉터는 여전히 날 괴롭히고 있고.
이따금, 네가 해 줬던 요리들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지곤 한다고.
그리 생각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되레 내가 듣게 될 줄은…….’
가슴 한쪽이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의 뺨에 얼굴을 부빗거리며 꼬리를 살랑였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내가 먼저 말할 거야. 네가 해 줬던 그 고기 요리를 먹고 싶노라고.’
그리고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테시우스가 흑표범 테오의 모습으로 변하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