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도저히 궁금증이 가라앉질 않아 다짜고짜 지나가는 하녀를 붙잡아 세워 물어본 것인데, 설마하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아드넬이 놀라 입을 벌리자 하녀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신 뒤부터 매년 이맘때쯤이 되면 갑자기 사라지곤 하세요.”
“매년……. 말입니까?”
“대충 여름과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요. 일 년에 두 번씩,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에요.”
하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피더니 곧 손을 입가 근처에 가져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전하께선 사라지셨는데 전하의 식사만큼은 매 끼니 후원 정자 뒤편에 가져다 놓고 있어요.”
“그게 무슨…….”
“저희도 이유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펠릭스 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에요. 그리고 식사를 가져다 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가면 빈 접시만 놓여 있고요. 물론 그 기간에는 식사를 가지고 가는 아이 빼곤 아무도 후원에 들어갈 수 없어요.”
듣고도 알쏭달쏭했다.
그만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드넬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하녀가 덧붙였다.
“그런 만큼 어디 가서 절대로 발설하셔선 안 돼요. 전에 이상하다며 본성 하녀에게 말을 흘린 아이는 그날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거든요. 저희끼리야 별궁에서만 지내니 종종 얘기하곤 하지만 밖에 말이 새어 나가는 순간…….”
하녀는 손가락으로 목을 슥 그어 보였다.
얼핏 장난스러운 행동 같지만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아드넬이 사뭇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자 하녀는 살포시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그래도 대략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다시 돌아오시니 크게 걱정은 마세요.”
“아, 예…….”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푹 주무세요, 아드넬 님.”
그렇게 저가 아는 모든 것들을 알려 준 하녀는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곤 총총 빨래 바구니를 들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드넬은 선뜻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이유를 들었는데도 이해할 수가 없어.’
매년 두 번씩,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는 2황자.
그런데 그의 식사는 후원 정자에 가져다 놓는다니.
그 기간엔 출입조차 금지되니 직접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굳이 알아볼 필요 없잖아.’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휘휘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일주일이면 다시 돌아온다는데 저가 나서서 찾아볼 이유가 뭐가 있다고.
게다가 말 한 번 잘못 흘리는 것만으로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데 직접 알아봤다가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자신이 이해되지 않아 아드넬은 미간을 좁혔다.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나랑은 크게 관계없는 사람이야.’
언제가 되든 치료만 끝나면 별궁을 나갈 테니까.
그때 이후론 다시 만날 수조차 없는 사람이니까.
아마도 영원히…….
“…….”
아드넬은 우두커니 복도에 선 채 잠시간 침묵했다.
당연한 일인데, 왜 마음 한쪽이 허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은 정이 들었나……?’
이별은 언제나 아쉽고 후회를 남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섭섭하기도 서운하기도,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은 이미 질리도록 겪었다.
그래서인지 더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리를 둬야겠어.’
2황자는 가지 말라 했지만 저는 언젠가 떠날 사람이니까.
아드넬은 결심하고 제 침실로 돌아갔다.
다음 날, 누구를 만나게 될지 꿈에도 모른 채.
* * *
일만 하긴 했지만 라그랑에 다녀오며 숨통도 조금 트였고, 2황자의 조언 덕에 사업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테시우스가 사라져 머리가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바쁘게 일하니 그도 잠시뿐이었다.
‘게다가 황후가 자기 화장품도 만들어 바치라 했으니.’
그동안 한정 수량으로 풀 근육통 연고며, 로고 디자인에 시간을 다 투자해서 당장 만들어 둔 것도 없었다.
아드넬은 황후가 자주 쓰던 화장품을 몇 가지 떠올리다가 곧 “아차.” 하며 침대 옆 협탁, 가장 아래 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엔 낡은 종이 묶음이 들어 있었다.
아무리 숱하게 만든 화장품이래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 또한 흐려지기 마련이기에, 처음으로 화장품을 만들었던 7살 때부터 기억나는 대로 짬짬이 적은 일종의 레시피 북이었다.
처음엔 돈이 없어 천으로 감싼 목탄으로 썼는데 자꾸 펼쳤다 덮었다 하다 보니 지워지기도 하고 번지기도 해서 돈을 좀 번 뒤엔 새 종이에 잉크로 옮겨 써 두었다.
덕분에 지금은 원하는 레시피를 찾아보기가 편했다.
‘어디 보자, 분명 여기쯤…….’
아드넬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이내 원하는 레시피를 찾았다.
일전에 공녀들에게 말했던 화장품이자 여름의 필수 아이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네랄 파우더와 데오드란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혹시 몰라, 그냥 내가 거슬려서 공녀들을 모델로 쓰지 않아도 사업을 못 하게 막을지.’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뇌물이었다.
지금은 한여름이었고, 햇빛이야 시녀들이 알아서 가려 줄 테지만 더운 날씨에 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화장까지 했다면 피부의 번들거림과 피지로 인해 화장이 들뜨게 된다.
그때 하얗게 뜨지 않으면서도 유분기를 싹 잡아 주는 게 미네랄 파우더였다.
‘게다가 땀이 나면 으레 냄새도 나기 마련이야.’
제국에선 향수가 꽤 번성한 편에 속했다.
이렇다 할 세안 화장품이라곤 비누 정도가 최선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냄새를 가리기 위한 최선은 또 다른 냄새로 덮는 것.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데오드란트만 한 화장품이 없었다.
문제는 스프레이 용기였다.
전생에서야 완제품을 사서 쓰기나 했지, 스프레이 용기의 원리를 찾아볼 생각은 한 번도 못 해 봐서 만들지 못했다.
‘대체품으로는 탈취 파우더가 있지만 효과가 더 좋은 건 역시 데오드란트야.’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스킨처럼 펴 바르는 것.
물론 없는 것보단 나아서 아드넬은 필요한 재료를 편지지에 옮겨 적고 봉인했다.
이대로 서신을 전달해 주는 하인에게 건네주면 클리프가 알아서 보내 줄 터였다.
‘이것 말고도 만들 게 상당히 많네.’
몸을 씻을 때 사용하는 샴푸나 치약 같은 세안 화장품은 물론이고 기초 스킨케어 화장품 등 가짓수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도 생각이 많을 땐 몸이 바쁜 것만 한 게 없었다.
그렇게 아드넬은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그런데 작업실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제이든?”
작업실에 막 들어서자, 언제부터 기다린 건진 몰라도 제이든이 와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아드넬이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오늘도 많이 바빠?”
“어? 어……. 아주 바쁜 건 아닌데…….”
아드넬은 말끝을 흐리며 문을 탁 닫았다.
막상 제이든을 보자 잠시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내가 먼저 얘기하자고 했었지.’
깜박 잊고 있었는데.
아드넬은 머쓱한 얼굴로 볼을 살짝 긁다가 빈 의자를 끌고 와 제이든의 맞은편에 두고 앉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얘기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아드넬이었다.
“……전에 라그랑에서, 내가 물어볼 게 있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물론 기억나지.”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제이든은 내 어디가 좋아서, 아니.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아드넬이 궁금한 건 바로 이것이었다.
저도 어디 가서 눈치로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제이든의 마음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다정하고 세심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저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만약 일찍 눈치챘더라면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난 그때 어린아이였는걸.’
제이든과는 무려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아렌’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아드넬’로서 제이든을 만났을 때 그녀는 고작 12살에 불과했다.
이후로 8년간 함께했고, 성인이 된 지는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드넬은 이것만큼은 꼭 짚고 가고 싶었다.
제이든은 아드넬을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거 알아? 난 원래 아드넬을 믿지 않았어.”
그리 멀지 않은, 하지만 동시에 먼 과거의 기억.
제이든은 생각에 잠겨 오래전 일들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아드넬은 그저 맹랑한 꼬맹이에 불과했다.
아버지와 대판 싸운 뒤 집을 뛰쳐나왔다는 말에 그녀를 돈 많은 철부지로만 보았다.
어찌 됐건 보수는 나쁘지 않았고 어린아이 하나 지키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었으니 순순히 의뢰를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다니며 지켜본 아드넬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생긴 건 조금 어리숙해 보일지 몰라도 말하는 것만큼은 어른스럽고, 세심하고, 다정했다.
야시장에서 본 구두닦이 소년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착하고 마음이 깊었다.
그런 아드넬의 옆에 있으면 마치 저도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그래도 한동안은 그저 지켜만 보았다.
제아무리 아이라고 한들 아드넬은 그의 고용주였고, 고용주라는 사실을 떠나서라도 제게 진짜 속사정을 캐물을 자격 같은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드넬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만 더 쌓여 갔다.
‘이렇게 비싼 마도구는 어디에 쓰려고?’
‘어? 아, 그게……. 음, 그냥 취미 생활이야! 별거 아니야.’
저는 상상도 못 할 금액의 마도구를, 그것도 직접 주문 제작하기도 했고
‘이번에 새로 만들어 본 화장수인데 두 사람 한번 써 볼래?’
‘화장품을 만들 줄 알아?’
‘조금은……? 사실 내가 생각해 낸 건 아닌데, 아무튼 한 번 써 봐. 선물이야.’
뜬금없이 화장수 같은 화장품을 만들어서 주는 둥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시리도록 춥던 겨울의 어느 날.
제이든은 처음으로 아드넬이 우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