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응? 응, 물어봐. 뭔데?”
“……혹시 이상형이라든가……. 이런 남자를 만나고 싶다든가, 하는 거 없어?”
옛날이야기를 하던 중 대뜸 이상형 얘기가 나왔다.
아드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져서. 그리고 아드넬이 여자인 건 나만 알잖아,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나 싶기도 하고 해서 물어봤어.”
“아…….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
그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제이든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스레 그런 이야기를 할 만한 상대가 전혀 없었다는 게 느껴졌다.
7살 때부터 남장을 시작했다 보니 동성 친구를 사귈 기회 자체도 아예 없었고.
아드넬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나는 일단 큰 남자! 키도 크고 상체도 크고, 물론 얼굴도 잘생기면 좋겠지만 나는 몸부터 봐!”
“아……. 그래?”
아드넬이라면 당연히 성격을 먼저 얘기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답이 나오자 제이든은 조금 당황함과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게 키도 크고 상체도 큰 남자라면 저보다는 필립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2황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 인간은 평균의 수준을 한참 벗어났는걸.’
타고난 체격은 어쩔 수 없는 건데도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제이든의 마음을 꿈에도 모르는 아드넬은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나만 바라봐 주고 성격도 세심한 사람이면 최고지! 뭐, 그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드넬.”
그때 제이든이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마주쳤다.
아드넬이 “응?” 하며 고개를 든 순간, 그가 말했다.
“외향적인 부분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성격도 세심한 사람이라면.”
“어……?”
“그런 사람이라면, 받아 줄 수 있겠어?”
일순 진지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드넬이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떴다.
그냥 농담처럼 가볍게 물어본 질문인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아드넬은 말끝을 살짝 흐리면서도 답했다.
“글……쎄? 일단 만나 봐야 알겠지만……. 못 받아 줄 것도 없지……?”
“……그럼 아드넬.”
“으, 응?”
“나는……. 어때?”
몇 년간 속으로만 한없이 곱씹고, 곱씹었던 한 마디가 마침내 입 밖으로 나왔다.
아드넬은 놀라 벙한 얼굴로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이든은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좋아해, 아드넬. 정말 오랫동안, 정말 많이, 진심으로 좋아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대답해 달라고는 하지 않아.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제이든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들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널 허무하게 빼앗기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어.”
“…….”
“물론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해도 괜찮아. 내 마음이 이렇다는 걸 알고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제이든은 아드넬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는 미소에 되레 가슴이 욱신거리는 건 당사자가 아닌 아드넬이었다.
“천천히 대답해 줘. 그게 언제든 언제까지고 기다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고 싶어. 좋아해, 아드넬. 너의 모든 것들을 오래도록 사랑해 왔어.”
* * *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2황자의 말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던 참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이든이, 무려 8년을 함께 한 가족 같던 제이든이 고백을 해 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자고 일어났음에도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전날 먹은 음식의 잔해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데도,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제이든이 나를…….’
좋아한다고.
나의 모든 것을 오래도록, 사랑해 왔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맙소사…….”
아드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작게 탄식했다.
단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어서인지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아니, 애초에 나는 제이든을 가족, 친오빠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걸.
머릿속은 백지장이 된 것 같고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이든은 평소처럼 대하라고 했지만…….’
저를 좋아한다 고백한 사람에게 예전처럼 행동할 수 있을 리가.
답답한 심경에 아드넬이 깊은 한숨을 내쉰 그때, 닫힌 문 너머로 똑똑 하는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넬! 일어났어?”
“……필립?”
“잠깐 들어갈게!”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감싼 손을 내리니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며 필립이 들어왔다.
분명 어제 술에 곯아떨어졌다고 들었는데 과음은커녕 술 한 잔도 입에 안 댄 것처럼 쌩쌩한 모습이었다.
“여관 주인이 접시가 부족하다고 하길래. 내가 대신 가져다주려고.”
“아…….”
“곧 출발해야 하니까 얼른 씻고 내려와. 어제 일도 다 끝났다며.”
“응, 그랬지…….”
라그랑에 와서 바쁘게 돌아다닌 덕에 아드넬은 본래 계획한 일정 안에 일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사실 필립은 그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더 쉬었다가 출발할 것을 권했지만, 아드넬은 본래 일정대로 오늘 돌아가자 말했다.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병증 때문이든 뭐든 간에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둘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아드넬은 합리화하며 곧 대답했다.
“알았어. 금방 씻고 내려갈게.”
“응, 응.”
필립은 아드넬을 대신해 어젯밤 두 사람이 먹은 음식 그릇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바구니에 넣었다.
그가 방에서 나가고서야 아드넬은 서둘러 씻고 짐을 쌌다.
짐이라 봐야 옷가지 몇 벌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아서 짐 정리는 금세 끝났다.
하지만 막상 내려가려니 어젯밤 마주한 제이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되니까, 제이든도 그러라고 했고.’
후우, 아드넬은 잠시간 심호흡을 한 뒤 달칵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던 그때였다.
“……잘 잤어?”
1층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제이든이 고개를 들어 아드넬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언제 고백 같은 걸 했었냐는 듯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아드넬도 살짝 웃으며 답했다.
“……응. 잘 잤어.”
“다행이다. 아, 마차는 지금 필립이 구하러 갔어. 짐만 다 실으면 바로 출발할 거야.”
“그렇구나…….”
아드넬은 계단을 완전히 내려와 제이든의 옆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하지만 잠시간 정적이 이어지자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제이든도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 남몰래 아드넬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아드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제이든.”
“응?”
“조만간……. 나랑 둘이서만 얘기할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 그럼, 물론이지.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안 바쁠 때 말해 줘.”
“응, 그럴게.”
물어볼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고백에 대한 답변일지도 모르지만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도 여기서 더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 전에 필립이 등장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곧 수도로 출발했다.
하지만 아드넬은 꿈에도 몰랐다.
언제나 있던 2황자가, 별궁에 없다는 것을.
* * *
수도로 가는 여정은 평탄했다.
아드넬과 제이든도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나아져 얼굴을 마주 보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별궁에 도착해선 빠르게 짐 정리를 마치고 클리프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라그랑에서 보고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적어 둔 것을 말끔하게 정리해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다.
“으……. 찌뿌둥하다.”
다만 라그랑에 오가는 데 걸린 시간만 무려 4일이나 되어서인지, 한 번 덜컹거릴 때마다 딱딱한 나무판자에 이리저리 부딪힌 몸 곳곳이 욱신거렸다.
큰일들을 해치우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더 아픈 듯싶었다.
아드넬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몸 곳곳을 주무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도 안마해 줄 사람 있으면 좋겠다…….”
2황자한테는 내가 해 줬는데, 그렇다고 그 사람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예전 같았으면 제이든에게 부탁했을 텐데 고백까지 한 사람한테 그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필립은 힘 조절을 못 해 잘못하면 뚝 하고 팔목을 부러트릴 것 같고.
게다가 남장 중이다 보니 자칫 들킬 위험이 있어 하녀들에게도 부탁할 수 없었다.
물론 같은 신분이니만큼 부탁할 생각도 없긴 했지만.
‘……그냥 확 아무나하고 결혼해 버릴까. 그럼 이런 걱정은 안 할 텐데.’
지쳐서인지 원래의 아드넬이라면 듣자마자 코웃음 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아드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2황자는 뭐 하고 있는 거지……? 언제는 가지 말라더니, 기껏 빨리 돌아오니까 코빼기도 안 보이고.’
묘하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별궁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고 서신도 쓰고 간만에 본 사용인들에게 인사하겠답시고 얼마나 바쁘게 돌아다녔는데.
2황자는 물론이고 언제나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전속 시종 펠릭스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에이! 내가 무슨 상관이야! 어딘가에는 있겠지.”
아드넬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팩 하고 몸을 돌아누웠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침실과 이어진 2황자의 침실에선 아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 늦은 밤, 끝내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드넬은 상상도 못 한 답을 들었다.
“……2황자 전하께서 사라지셨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