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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59)화 (59/141)

59화

“테시우스…….”

“……괜……찮아, 늘 그랬으니까…….”

괜찮다는 말과 달리 씨근덕대는 숨소리는 퍽 괴로워 보였다.

바스토르는 안타까움에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8년 전, 한 차례 흑표범으로 변한 뒤 테시우스는 매년 두 번씩 다시 그때의 모습으로 변했다.

당연하지만 그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마녀들이 숙청당한 과거가 있는 만큼 ‘저주’에 걸렸다는 건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때문에 테시우스가 흑표범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바스토르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변할 때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는 것도,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왜 자꾸 너에게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

왜 불행은, 너에게만 찾아오는 걸까.

바스토르는 고통스러워하는 테시우스를 지켜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불행은 축복받아 마땅한 탄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테시우스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리아누 황비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때였다.

원인은 독살. 백이면 백, 입에 들어가는 순간 몸속 장기를 모두 망가트려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독이었다.

그런 강한 독을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인이 견뎌낼 리가. 그렇게 리아누 황비는 손 쓸 틈도 없이 생을 달리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정인을 잃은 황제는 무너졌다.

‘그때부터 아버지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어.’

마음의 병은 몸의 건강까지 알음알음 깎아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지탱한 건 단 하나, 분노였다.

용암보다 뜨겁게 불타오르던 황제의 분노는 제국 전역을 휩쓸었다.

모두가 반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애썼고, 그때 주동자를 잡아낸 것이 다름 아닌 리아누 황비의 친오빠인 라이칸 후작이었다.

‘그 가문은 완전히 사라졌다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당시 황제는 가문의 성을 이어받은 이라면 어린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처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역사서에 기록된 가문의 이름까지도 완전히 지워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바스토르는 그런 아버지보다도 테시우스가 안타까웠다.

어머니에 대한 따듯한 기억 한 조각도 갖지 못한 제 어린 동생이 안쓰러웠다.

화사한 봄꽃 같은 사람이었다며,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어디 그뿐인가. 대뜸 저주에 걸리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더 챙겨 주려 애썼다.

다른 배에서 태어난 동생이라 할지라도 피로 이어진 형제였다.

황후는 그런 바스토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몰래 보러 가 함께 어울리곤 했다.

어머니가 주지 못한 사랑을 형으로서, 가족으로서 채워 주려 했었다.

테시우스는 그런 바스토르를 잘 따랐고 종래에는 제 입으로 후계자 수업을 포기하겠노라 말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 알기에 저를 위해 황제의 자리를 포기한 동생을 더욱 아꼈고, 그렇게 나름 평온하다면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랜만에 떠난 여행길에서 테시우스가 갑자기 흑표범으로 변하고 말았다.

다시 재회했어도 의사소통을 하기엔 무리가 있어 기사들을 물리고 여관 뒷마당에 나간 그때, 어디선가 바스락하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인기척의 주인을 찾으려던 순간, 테시우스는 갑자기 사람으로 바뀌었고 당시 들렸던 인기척의 주인은 지금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테시우스는 사람에서 흑표범으로, 흑표범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큭……!”

“테시우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바스토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참아야 한다, 괜찮을 거야.”

고통을 참는 신음에 바스토르는 곧장 몸을 뒤로 빼고 침대에 달린 장막을 내렸다.

두꺼운 장막 너머로 억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고 억눌러도 새어 나오는, 극심한 통증에서 비롯된 목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소리란 이런 것일까.

바스토르는 비통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어서 이 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지나가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잠시 후, 지쳐 나가떨어진 거친 숨소리에 바스토르는 다시금 침대의 장막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그곳엔, 8년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흑표범이 있었다.

* * *

같은 시각, 아드넬은 창가 앞에 앉아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려 바삐 움직인 덕분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라그랑에서의 일정을 끝마쳤지만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이든은 병증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왜 자꾸, 그게 다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고민을 털어놓고 난 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긴 했는데, 가슴 한쪽에 찝찝하게 남은 무언가의 정체만큼은 알 수 없었다.

‘내 시종이 되어라. 그리고 내 곁에 머물러.’

‘제발, 가지 마.’

‘네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막막해져…….’

‘미안……하다.’

‘가능하면 빨리,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

파노라마가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듯, 그 말을 하던 2황자의 얼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말을 하던 낮은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내가 여자의 모습이었더라면.’

지금같이 억지로 만들어 낸 남자의 모습이 아니라, 어엿한 여인의 모습이었더라면.

그 모습으로 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날 좋아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말이 되지 않았다.

곁에 머무르라고, 가지 말라고, 기다리겠다고.

단순히 문장만 보더라도 연인이나 혹은 좋아하는 이에게 할 법한 말들이었다.

아드넬이 혼란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색엔 취미가 없는 2황자가 남자의 모습인 저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았어.’

물론 놀라고 당황스럽긴 했다.

왜 이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건가 싶었고, 그런 그가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말들을 들은 순간만큼은.

제 나이 또래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뭘 하고 계실까.’

앞으로 술은 절대 드시라 말라 단단히 말해 두었으니 또 드시진 않으시겠지.

어쩌면 이미 자고 있을 수도 있고.

잠이 오지 않으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계실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그때도, 한창 훈련하실 때는 상의를 벗고 계셨는데 설마 밤에도 안 입고 하다가 찬 공기에 감기라도 걸리시는 건 아닐까?

아드넬은 멍하니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때문일까, 굳게 닫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미처 듣지 못했다.

아드넬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노크 소리가 세 번째로 울렸을 때였다.

“누, 누구세요!”

“아드넬, 나야. 제이든.”

“아, 응. 들어와!”

내가 왜 2황자가 뭘 하는지 궁금해하는 거지, 아드넬은 당황해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제이든이 한 말에 또 한 번 당황하고 말았다.

“……찬 바람을 너무 많이 쐰 거 아냐? 볼이…….”

“어, 어? 내 볼이 왜?”

“조금 붉어져서.”

“……차, 창문을 오래 열어 놨더니!”

아드넬은 황급히 창문을 닫고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제이든은 곧 씨익 미소 지으며 품 안에 들고 온 것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게 다 뭐야?”

“그냥 오랜만에 둘이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필립은 먼저 곯아떨어졌거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바깥 공기 쐰 김에 술이라도 실컷 마시라며 돈푼깨나 쥐여 줬을 뿐.

역시나 필립은 예상대로 잔뜩 신이 나 저녁부터 열심히 술잔을 비우다가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지금만큼 적절한 때는 다시 찾기 어려울 터였다.

그래서 제이든은 필립이 술을 마시는 동안 라그랑 곳곳을 쏘다니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당장 가져온 음식만 해도 방금 막 여관 주방에서 받아온 따끈따끈한 새 요리였다.

제이든은 웃는 낯으로 바구니에 미리 담아 온 것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본 아드넬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와아, 이게 다 뭐야……!”

제이든이 준비한 건 다름 아닌 아드넬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찰랑이는 와인부터 향긋한 버섯구이와 치즈, 카나페, 샐러드 등 그녀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푸짐하게 올라왔다.

“실컷 마셔도 돼. 잔뜩 사 왔어.”

“이 와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이 버섯구이랑 치즈도 내가 좋아하는 거야!”

함께 지낸 세월이 있다 보니 제이든은 아드넬의 취향이라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와인은 일전에 고백을 결심했을 때 진작 사 두었고, 버섯이며 치즈 같은 것들은 따로 사 와 조리를 부탁했다.

조금은 수고스러울지 몰라도 만개한 미소를 보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제이든은 뿌듯한 마음으로 병의 코르크 마개를 뺀 뒤 잔에 쪼르륵 따라주었다.

“그런데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그냥 아무거나 사 와도 되는데.”

“별궁으로 돌아가면 또 바빠질 텐데 하루쯤은 쉬어 줘야지. 기왕 먹는 거 좋아하는 음식이면 더 좋잖아.”

“하여튼 세심하다니까. 고마워, 제이든.”

아무렇지 않게 배려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아드넬은 제이든을 향해 웃어 보이며 냉큼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잖아도 시간이 늦어선지 배가 살짝 출출하던 참이었다.

이내 푸릇한 샐러드를 푹 찍어 한 입, 입가심으로 와인 한 모금을 마시니 되레 식욕이 동했다.

아드넬은 제이든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열심히 먹고 마셨다.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지만 제이든은 연신 웃는 낯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둘 다 취기가 조금 올랐을 즈음.

제이든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아드넬,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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